대체 뭐가 문제야?
대학 때 대동제(이 이름, 오래전부터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준비하다가 잘못한 일이 있다.
투쟁기금 마련 주점을 하는데 스무 살 무렵 후배들이 안주 재료도 조리법도 뭘 쇼핑하러 가야 하는지도 몰라서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그걸 보고 마침 우리 과 특성상 계신 나이 드신 여학우분들(강기훈 씨의 어머님인 70대의 고 권태평 학우님과 동일방직 투쟁의 노동자 출신 50대 여학우님 등)을 떠올리고 “잘됐네! 그분들께 부탁하자!”고 손뼉을 쳤다. 캠퍼스에서 뵙고 말씀드렸더니 그분들도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고 선배가 “잘됐다”라고 말한 게 맞냐는 질문이 들렸다. 바로 이런 상황을 비판하는 자보가 붙었고 인터넷의 학과 카페 게시판에 성토와 분노의 글이 올라왔다. 학내 여성주의 소모임 구성원들과 여러 사람이었다. 실제로 양파 같은 것을 다듬고 계셨던 여학우 누님께 “언니! 그거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다.
인터넷 게시판에 바로 잘못을 인정하는 답글을 올렸는데 지금 페친이기도 한 친구가 다시 비판글을 달았다. “우리는 지금 개인적 반성을 원한 게 아니다. 잘못했다고 하는데 뭘 잘못한 건지,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나는 다시 그에 답하는 글을 올렸던 것 같다. 그 일 때문에 당사자들과 비판자들이 모이는 간소한 차원의 좌담회도 열었고 어떤 술자리에서는 분노하셨던 누님들과 합석해 다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쓴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연이어 사과하는 태도를 보이자(당시 이 일과 관련 있던 사람들도 비슷한 행동을 했다) 어떤 남자 후배들이 작은 목소리와 조심스럽게 불만 서린 얼굴로 “이게 형이 이렇게까지 사과할 일이냐?”고 물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아니었고 자보나 게시판만 본 녀석들이었지만 “주점 준비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일 아니냐”는 얘기였다.
요리하는 건 당연히 여자라는 무의식
쓰다 보니 참 질질 끌면서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뭐가 잘못이었냐면 안주 만들고 요리하는 것을 당연히 여성들의 몫이라 간주한 무의식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일생 그러한 성별 역할 행동의 사회적 강제 속에서 살아오신 분들을 다시 그 자리로 내몬 것이었다.
스무 살 무렵의 대학생들이, 그것도 투쟁사업장들의 기금 마련차 여는 주점이라면 안주가 다소 어설프고 이상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레시피나 구입해야 할 재료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직접 재료들을 사서 힘겹게 요리하는 경험을 통해 가사노동이 과연 어떤 것인지 절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점을 이틀 앞두고선 단지 겁이 났던 거고, 누군가가 대신해주었으면 했으며, 마침 “아줌마(!)”들을 떠올렸던 것이었다. 욕을 먹어도 싼 상황이었다. 단지 강의실에서 세계 여성운동사나 페미니즘의 갈래에 관해 아무리 잘 나불거려본댔자 정작 현실에서 나는 그런 정도의 실천과 인식을 하는 존재임이 입증된 것이었다.
이 사건 덕분에 주점에서 예년보다는 남학우들이 조리와 설거지를 더 도맡아 하지 않았느냐는 사후평가를 했더니 주점에서 고생 많았던 한 05학번 여학우가 “그렇게 생각하시냐? 할 말은 많지만 참겠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던 장면도 선명하다.
“비판자들이 너무하는 거 아니냐”던 남 후배들과의 대화도 기억난다. 내가 아무리 열을 올려 비판의 내용이 정당하며 그걸 우리가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떠들어도, 내 ‘저자세’를 불만스러워 하던 남 후배들의 까만 얼굴과 고개 숙인 채 말 없던 장면도 기억난다. 앞서 언급한 미니 좌담회에서도 나와 함께 그분들을 “끌어 들였”던 한 남학우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해라는 거였다.
정작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역시 앞서 얘기한 술자리였다. 온수역 앞 2층쯤 호프집이었다. 이분도 현재 페친이신데, 나보다 연상이시면서 학과로는 후배이시고 여성주의자이신 분께서 이 사건을 성토하시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했어요. 근데 의도적인 건 아니었고, 물론 그래서 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저나 이 일에 책임 있는 친구들이 누나가 말씀하시는 그런 남자들은 아니잖아요?”
그때 번개처럼 내 말을 받아치셨던 그분의 질문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떻게 알지요? 그런 남자가 아닌지 어떻게 아나요? 정말 아닌가요?”
자승자박이었다. 그 누님의 송곳 같은 질문은 내 비겁한 가슴팍에 정확히 꽂혔다. 이른바 진보 쪽이라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깐, 하고 주접 떨던 주제에 나는 결국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렇죠. 알 수 없죠. 네, 맞네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제가 잘못 말했네요.”
그 순간의 그 초라함과 정직한 꼴은 벌써 10년 전의 일인데도 지금껏 생생하다.
정치적 올바름의 존재 이유
당시 주점엔 내가 활동하던 참여연대 노래패도 와서 공연해 유난히 즐겁고 화사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기억을 세월이 흘렀어도 계속 반복 상영해본다. 잘못이란 대개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란 자신이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지를 과시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거꾸로 자신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인지, 실체는 어떤 사람인 건지 발각나라고 있는 개념이다.
인간은 좀처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성은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저 자신 속의 감추고 싶은 제 진짜 얼굴들을 필사적으로 가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불현듯 그 얼굴이 발각 날 때 당황하고 결코 그게 자기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걸 가리키면 당연히 펄쩍 뛴다. “나를 뭘로 보냐?”며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니 너무 상처를 받았다.” 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 누나가 내게 던졌던 질문을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아닌지 어떻게 아나요?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닌 거 맞나요?”
퀴어페스티벌과 혐오자들에 관한 생각들을 쓰려다가 옛일만 지루하게 적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가 꼭 엉뚱한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스스로는 자신이 자유로운 줄로만 안다. 자신이 혐오자인 줄도 모르거나 자신의 혐오를 필경 “거룩한 분노”로 여긴다. 일부러 찾아오는 혐오자들은 차라리 정직하기라도 하다.
성적소수자에 관한 혐오자만 아니면 무관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그 누나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고민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떠한가. 정말로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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