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합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종영했다. ‘넷플릭스’ 글로벌 종합 6위에 올라 한국 드라마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화제성만큼 내용도 좋았다. ‘떡밥 회수’의 재미를 안기며 시청자들과 소통했고, ‘힐링 휴먼 드라마’라는 기획 의도에 맞게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탄탄했다. 김수현 배우 보러 들어갔다가 인생 캐릭터 만난 서예지 배우에게 반했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연기한 오정세 배우를 재발견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좋은 드라마인 이유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트라우마를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해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애착 관계 형성 과정에서 비롯된 문제점들을 안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적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드라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이런 약점을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먼저, 이 드라마는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룬다.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트라우마를 하나씩 가졌다. 화마다 한 인물의 트라우마를 집중하여 조명함으로써 왜 그런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원인만 살피는 것이 아니다. 그 등장인물이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담는다. 드라마에서 좋았던 점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극복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용기나 의지가 필요한 것도 맞지만, 옆에 있는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줘야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는 메시지로 들렸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돕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드라마의 배경은 정신병원으로 설정됐지만, 병원이라는 장소는 다양한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도 보였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또 채워주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트라우마의 원인에 대한 비유법으로 ‘목줄’이라는 표현을 쓴다. 극 중 〈봄날의 개〉라는 동화가 나오는데, 동화 속 개는 목줄을 풀고 자유롭게 뛰쳐나갈 수 있음에도 스스로의 목줄을 끊지 못한다. 목줄을 끊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를 끊어내는 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용기’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강태가 문명에게 ‘나비 포옹법’을 알려주는 2회 장면에 나온다.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땐 셋을 세고 자기 자신을 다독이라는 강태의 조언에 문영은 “트라우마는 이렇게 앞에서 마주 봐야지, 뒤에서 보듬는 게 아니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트라우마를 앞에서 마주할 용기가 부족한 인물들을 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의외의 인물이 용기 내는 모습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목줄을 끊고 자유로워진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비단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너무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부모와의 잘못된 애착 관계 형성으로 힘들어한다. 주인공인 고문영 작가는 자신의 입맛대로 아이를 키우려던 엄마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캐릭터다. 겉으로 보기엔 강해 보이지만, 갑옷과 같은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려 하는 방어적인 내면을 가졌다. 어린 시절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을 강한 사람으로 포장한 탓이다.
‘센 척’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약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두려운 방어기제가 있다. 긴 머리가 예쁘다는 엄마의 말에 머리를 자르지 못했던 문영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잘라내며 목줄을 끊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문영이 마냥 약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강태의 도움을 받은 것도 있지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이 보여서다.
문강태 보호사 또한 어린 시절 엄마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형을 늘 먼저 챙긴 기억 때문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을 말할 줄 모르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캐릭터다. 우리 주변에도 강태 같은 친구들이 종종 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때문에 거절도 잘 못 하고, 타인에게 맞춰주려고만 하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이런 강태의 모습을 두고 문영은 “위선자”라고 팩폭을 날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강태는 겉으로는 선하고, 속은 곪아 있는 그런 상태로 계속 살아왔다. 미움받을 용기가 부족했던 강태는 문영을 만나 조금씩 ‘조커 미소’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는다.
이 드라마에서 ‘트라우마’와 관련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인물은 문상태다. 나는 문상태가 등장인물 중 가장 용기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또 가장 긍정적으로 변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 데는 호불호가 확실한 상태의 성격 특성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소음, 터치, 불결, 폭력, 거짓말을 싫어한다. 좋아하는 것은 그림, 공룡, 고길동, 줄무늬 셔츠, 그리고 고문영 작가다. 이처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싫어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당장은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일지라도 긍정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문영을 동생으로 받아달라는 강태의 말에 발길을 돌려 “고문영, 빨리 안 와?”라고 말하는 모습이라든지, 강태에게 돈가스를 썰어 주고 “아껴 써”라며 용돈을 쥐여주는 모습, 또 “내 동생들을 괴롭히지 말라”라며 도희재의 뒤통수를 내려친 모습까지. 특히 마지막 화에서는 삽화 작가로 독립하는 모습이 그려지며 감동을 주었다. 이런 상태의 변화된 모습에 시청자들도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국회의원 아들이자, 노출을 즐기는 급성 조증 환자를 연기한 아담도 인상 깊었다. 그는 좋은 집안의 공부 못하는 막내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관심 한 번 못 받고 망나니가 된 캐릭터다. 관심을 받고 싶은 나머지 자꾸 노출한다. 아이들이 자기 효능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적절한 관심이 필요한데,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비뚤어진 아이들을 종종 목격한다. 아담은 문영의 도움을 받아 신나게 한 판 놀고 트라우마를 치유하게 되어 다행이지만, 지금도 현실의 많은 아이은 힘든 10대 시기를 보낸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으로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유선해 환자 또한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으로 아파하지만, 강태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 상처를 털어놓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배우의 모습이 어린아이로 바뀌는 연출이 있었는데, 지금도 어딘가에서 학대받을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한편, 트라우마는 부모와의 관계 형성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건·사고를 겪는 등 다양한 상황에서 발발한다. 나는 이 드라마가 전쟁의 트라우마를 다룬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간필옹 환자를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다룸으로써 어떤 식으로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지 보여줬다.
간필옹이 공사장의 소음을 총소리로 오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과 상태가 자신의 겉옷으로 필옹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보호했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가 발발하기 직전 필옹과 상태가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다. 필옹은 상태에게 “과거에 갇히면 문이 보이지 않아 나올 수 없다”면서 “과거에 갇히지 말라”라고 조언한다.
이 드라마는 ‘트라우마’라는 큰 틀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한편으로는 ‘치유’라는 또 다른 축이 있다. ‘치유’는 역시나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치유자의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먼저,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캐릭터는 강순덕 여사다. 주리의 엄마 역할로 나오지만, 사실 모두의 엄마에 가깝다. 강태 상태 형제, 문영, 재수의 엄마이자, 이상인과 유승재의 엄마이기도 하다. 상태의 언어로는 “가짜 진짜 엄마”다. 무심코 툭 던지는 말에 위로와 지혜가 담겨있다.
강태의 친구 역할로 등장하는 조재수도 ‘힐링 캐릭터’다. 본래는 강태보다 한 살 많은 형인데, 친형을 보살피느라 힘든 강태를 위해 기꺼이 친구가 됐다. 재수는 친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믿고, 기다려준다. 자신의 입장이 아닌, 친구의 입장에서 조언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짜 우정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상상이상의 이상인 대표 또한 따뜻함의 대명사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문영의 옆을 맴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영의 약한 내면을 알아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큰 캐릭터다. 충격으로 집에 틀어박힌 문영이를 찾아갔다가 괜찮은 척하는 문영을 재빨리 캐치하고 “최악의 상태”라고 강태에게 전해준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런 역할의 캐릭터들이 치유의 역할과 동시에 ‘이상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강순덕 여사는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 조재수는 이상적인 친구의 모습이다. 이상인은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 조금씩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으며, 이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드라마 제목의 ‘사이코’가 당연히 고문영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고문영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을 ‘환자’가 아닌 그저 ‘사람’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영은 환자를 자신이 도와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드라마는 이런 문영의 모습을 통해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정상도, 비정상도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15화에서 오지왕 원장은 경찰에 붙잡힌 도희재에게 “넌 언제 사람 될래?”라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사람 인(人) 자를 만들어 보여준다. 이 장면은 타이틀 디자인의 ‘사’ 글자가 ‘사람 인(人)’으로 뒤집혀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임을 뜻하기도 한다. 인생은 오지왕이 이전에 언급하기도 했던 ‘이인삼각’ 경기와도 같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과 상처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온기로 치유하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드라마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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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슈뢰딩거의 나옹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