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구는 수능성적이 서울에서 가장 낮은 곳이고, 그중에서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부를 못하는 축에 속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문과 남자(공학인데 분반) 1–3반 중 내가 있던 3반에서만 인서울 대학에 갔다.
엄마는 비정기적으로, 그러나 꽤 자주 ‘같은 반 어머니 모임’에 나갔다. 누가 오는가 물어보면 거의 6–7명의 멤버가 고정되어있었다. ‘강□□, 조○○, 송◇◇ 어머니 등등’. 어머니 모임은 딱히 어떤 목적을 갖고 만난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모임’ 외에는 딱히 무언가를 하질 않았다. 그 흔한 학원이나 과외선생님을 공유하는 일조차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재수까지 포함해서 반에서 여섯 명이 인서울 대학을 간 것을 보니, 그중 한 명 빼고는 ‘어머니 모임’ 멤버의 자식들이었다.
어머니들이 자식의 ‘성적이 좋은 편이라서’ 모임에도 의무감으로 참석한 것인지,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써서 ‘성적이 좋았던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부모의 지원이나 관심이 입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게 됐다. 특히 내가 다니던 학교처럼 학교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일체의 진학 상담도 안 하는 환경이라면 말이다.
흔히 말하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이뤘다고 보기 어렵다. 노력은 노력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하고,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해야 가능하다. 입시에 있어서 중산층 부모라면 중위권 아이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서(투자) 성적을 어느 선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하층 부모라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신경 쓰지 못하고, 이는 입시 결과와 직결된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계발’의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방학을 대학생 인턴이나 대외활동으로 보내는 이와 육체노동으로 보내는 이의 스펙이 같을까? 구직활동과 알바를 병행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결과는 동일할까? 한 학교의 지역 캠퍼스를 다녔던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학교 친구들은 방학 시작하면 대부분 알바를 한다. 그런데 서울에 와보면 대외 활동, 토익 준비, 계절학기를 듣고 있더라.
우리는 ‘성공담’만을 소비한다. 각종 취업 관련 커뮤니티 카페를 보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한 이야기가 높은 조회 수를 얻고 찬사도 이어진다. 그런데 거기에는 수많은 맥락이 빠져있다. 생계를 돌보지 않아도 괜찮았는지, 생활 환경은 어땠는지, 기존 공부량이나 학습 스킬은 어느 수준이었는지 등등. 이런 것들은 고려되지 않은 채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오래된 교훈만 강조된다.
시간을 투자해서 이론을 외우고 문제를 풀이하는 시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아니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는 주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의도적으로 이 지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계층 상승’의 꿈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장승수 변호사’ 같은 신화적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러니 ‘일제고사’식의 시험이 누구에게나 공정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여기면, ‘정규직과 고연봉’은 꼭 일률적인 시험을 통과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거라고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부터 지금의 20대들은, 한국 사람들은 ‘명문대와 시험(공채)을 통한 정규직·고연봉 일자리’를 삶의 지향점으로 믿고 살아왔고, 또 그것을 개인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공채를 안 거친 ‘공사 정규직’은 상상하기 쉬울 리 없다.
제아무리 연봉체계도 다르고, 직군도 다르고, 신입 채용에 영향을 안 미친다고 해도 마음속으로 납득이 안 가는 거다. 그들 주변의 세계에선 시험이 곧 질서이고,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서 잘 보는 것만이 진정한 노력으로 간주된다. 그것만이 안정되고 높은 지위를 쟁취할 수 있는 법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일률적인 시험’을 치를 수 없거나, 치르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노력은 사소화될 수밖에 없다.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관련해 많은 사람이 20대를 욕했다. 그렇다면 다른 세대는 ‘시험 보지 않은 대다수 노동자’의 노력을 얼마나 인정하는가 묻고 싶다. 대학 이름으로 채용 여부를 가르고, 회사 안에서도 공채와 비공채출신을 가르던 사회에서 갑자기 ‘혁명 세대’라도 탄생하길 바라는 것일까. 수시보다 정시를, 로스쿨(요즘에는 변시도 붙기 어렵지만)보다 사법시험을 선호하는 정서는 세대 불문이다.
소위 ‘인국공 사태’를 두고 말이 많다. 그런데 시험을 잘 봤거나, 적어도 시험을 볼 기회가 있었던 이들의 목소리만 크다. 내 글 역시 그런 목소리 중 하나라는 점이 슬프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흔히 상상하는 시험이 아닌, ‘노동 현장에서의 수많은 시험과 난관을 거쳐왔노라’고, ‘그래서 내가 정규직 되는 게 뭐 어떠냐’고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건 지금의 사회에서 자부심이 아니라 ‘꼼수’나 피해 의식의 발로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들 스스로 ‘공채·정규직’이 누리는 특권을 줄여야, 비정규직-정규직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인천공항 보안검색요원이 다른 직군에 비해 고임금 노동자가 아니었다는 점(2019년 자회사 설립 기준 초봉 세전 3,200, 2013년에 180–200 사이라는 이야기를 보면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서 평균 30–40 정도 올랐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호봉제를 적용받지 않아 신입과 10년 차가 월급 20만 원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던 상황, 올 데이 근무(오전 6시 30분–오후 8시 30분) 등을 쭉 해오면서 휴게시간 1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군기가 세고 힘든 일이라 1년 이내 퇴사율이 50%가 넘는다는 점 등의 노동 조건은 크게 조명되지 않는다.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버텨왔고, 노력했는지는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까. 10–15년 일해도 시험을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될 것이니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어떤 노력만을 ‘진정한 노력’으로 여겼는지 드러내는 지점이다.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기만을 일삼으며, ‘선발고사’만이 ‘정당한 평가 방식’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타인은 어떤 노력을 하고 사는지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조이기도 하다. 기회를 얻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시험 통과에 의한 정규직·고연봉’ 방식이 유지되는 한,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공고한 이상 젊은이들의 ‘역차별’ 논리도 계속될 것이다.
큰 책임을 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기성세대가 ‘특권 구조’를 깨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내지 않으면, 갈등은 무한 반복될 뿐이다. 시험에 의한 공정한 경쟁은 ‘허상’이며, 시험을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일 때도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사회가 될 순 없을까.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