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몬한 사건? 한힌골 전투!
《환상과 몰상식한 작전지도》, 《무모와 독선, 그리고 수렁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말로 『노몬한의 여름』을 정리한 한도 카즈토시의 말이 있다. 그만큼 노몬한 사건은 미래의 일본제국군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벌이는 실패와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남아있다.
특히 이 전투는, 57,000명이 투입된 소련은 4,831명 전사, 12,251명 부상이라는 수치에 비해서 38,000~75,000명이 투입된 일본군은 서방추측 55,000명 사상 / 소련추측 80,000사상, 6,000명 포로(물론 서방입장에선 소련에서 부풀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라는 현대전에서 보기 힘든 교환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17,000여 명의 사상이라는 주장은 근소한 오차범위도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일본의 한도 카즈토시, 다나카 카즈히토 등 일본의 근대사 전문가들은 기존의 일본의 해석인 사소한 국경분쟁 ‘사건’이라는 입장에 비해 엄연히 일본이 탈탈털린 ‘전투’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 사건은 향후 보이는 일본 근대전쟁사의 농축폐기물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성을 띈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측에 노몬한 사건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일본은 그저 그런 국경분쟁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고의적으로 공식적인 전투기록을 훼손시킬 정도이다. 과연 무슨 일이 있던걸까?
2. 사건의 원인
사건의 원인은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1. 하나는 영·프·소의 집단 안보체제에 불만을 품은 소련의 태도(가장 우선적으로는 스탈린)에 기인한다.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와 병합한 나치독일이 이번엔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점령하는 작업에 착수하자 유럽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얘네 이러다 폴란드도 치는거 아닌가 싶은 소련은 프랑스와 영국과 대독(對獨)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의 반응은 ‘우리 상비사단은 다 해외식민지에 있는데’ 정도였고, 프랑스의 반응은 ‘우리는 아직 동원령 선포 안할 거임’수준이었다. 결국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는 병합되었고, 예상대로 다음 타겟은 폴란드가 되었다. 이에 빡친열받은 소련은 유태인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을 걷어차고 몰로토프를 앉혀, ‘반공노선의 파시스트’국가와의 분쟁을 무력충돌이 아닌 ‘외교노선’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다른 파시스트 외교대상인 일본제국이 1932년부터 만주국을 괴뢰정부로 앉히며 이어 장고봉 사건으로 실질적인 위협이 되면서 언젠가 한번 ‘손봐줘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2. 당시 주만특명전권대사(駐滿-特命全權大使)라는 직책을 겸임한 관동군사령관은 만주국의 입법, 행정, 사법권의 최고권한 가진 실질적인 총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군령권은 육군성의 밑에 있으나, 사령관은 행정업무를 천황(이하 총리)으로 지시를 하달 받는 상황이었기에 만주군은 월권행위에 대한 두려움에 상당히 둔감한 편이었다.
대본영이 1937년 상설기관으로 설치되기 이전까지도 관동군은 본토의 육군성, 해군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을 했고, 이는 대본영이 설치 된 이후에도 자신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천황 한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 게다가 일본 군부는 출신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인사제도가 팽배해 있었으며, 같은 출신 내에서도 실적에 따라 진급하는 실적제의 부정적인 부분이 횡행하고 있었는데, 군 장교들이 자신들의 공명심을 위해 지휘권을 남용하면서 덮어놓고 저지르는 식의 전투가 꽤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의 무다구치 렌야가 일개 연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월권행위를 통해 교전을 개시했으며, 처벌대신 전쟁 빌미를 잡은 일본군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지휘관들은 무식하면서 용감했고, 지휘체계는 그냥 무식했다.
4.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불분명한 국경선에 있었다. 1932년 만주국 개국 이후 노몬한 사건이 발생하는 1939년 이전의 만주-몽고 국경의 분쟁은 총 759건에 달한다. 이는 만주국에서는 지형적 국경으로 할하강(ハルハ江,칸킨콜)을 삼고 있던 것과 다르게, 몽고(소비에트 연방도)에서는 노몬한 고지에 연이어 있는 유목민의 길(길게 늘어서 있는 유목민들의 무덤표식)을 국경으로 삼는 것이 있다.
이는 유목민에 대해 국경 문제가 민감하지 않던 청(애시당초 몽고초원이 청나라 땅이었다.)과 과거 유목민적 관습이 남아있던 몽고에 따라선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국가의 체계가 확립 된 몽골과 만주국 사이에서 큰 문제로 발전 된 것이다.(그래서 러시아-몽골측에서는 우리땅인 한힌골의 전투라는 식으로 명명했고, 일본은 우리땅인 노몬한 고지의 사건이라는 식으로 이원명명하게 된다.)
3. 사건의 진행
759건에 달하는 국경분쟁 사례에서도 나타나 듯, 1939년 5월 11일에 발생한 분쟁도 그저 사소한 ‘교전’선에서 끝날 수 있었다. 몽골군의 소부대가 만주국군 주둔지를 기습하면서, 적의 월경을 격퇴하는(일본군 입장에서) 선에서 종료되었던 교전이 확대된다.
애시당초 만주군은 국경선의 공백지대를 적이 공격한다는 빌미로 장고봉 사건(하산호 전투)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치뤘던 만주군은 이를 갈면서 복수전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근거로 관동군은 츠지 마사노부가 작성한 「만소국경분쟁처리요강」을 본토의 참모본부 허가도 없이 공식작전으로 입안한 점에서 잘 나타난다.
골때리는 점은 해당 요강 제 4항에 의하면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라는 항목이 있었고, 세부사항으로 ‘그 월경을 인정하는 때에는 일시적으로 『소』영토에 진입하거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근데, 대본영의 방침은 소련 영토의 진입은커녕 직접적인 교전마저도 금지했다.
그러나 5월 28일, 관동군은 대본영의 허가 없이(…) 만주국군 기병대를 포함해 약 2,000명을 할하강 동편에 집결 시켰으며, 소련역시 관동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미리 읽고 약 1,500명의 병력을 서편에 집결 시킨다. 병력적 우세를 보였던 일본군과 화력적 우세함을 보인 소련군은 거의 비등비등할 정도로 전투를 실시했다. 그러나 6월 1일 전선이 교착됨에 따라서 대본영은 중일전쟁상태로 인해 전선을 이중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 한방 먹였다고 생각하라면서 장기적인 전투가 되기 전 일단 후퇴를 지시한다.
하지만 육군성 참모본부와 대본영의 수차례 제지에도 불구하고, 관동군 사령관이 부재중인 틈을 타 일개작전참모인 츠지 마사노부에 의해(단독적인 대리결로 상급 지휘관 및 부사령관 사령관의 공식서명이 날조되었다!) 대규모 항공작전이 개시되었다.
결국 6월 27일 관동군 사령관 ‘명의’로 개시된 명령에 따라 폭격기 30대, 전투기 77대로 구성된 ‘마두트, 탐스크 공군기지’에 대한 전격적인 기습이 이루어진다. 각 공군기지 들은 국경선 내부 약 100~120km 위치한 지역이었다. 제대로 된 선전포고 형식도 취하지 않고 때리고 보는 일본군 특성상(…) 이는 분명 국경분쟁적인 성격이 아닌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갔다고 소련 최고 사령부는 판단했다. 따라서 소련의 최고사령부는 판세가 급박하게 돌아간다.
결국 허흘러깅 처이발상(몽골 국가원수)의 전폭적인 지원요청에 따라 ‘관동군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 몰로토프 외상에 의해 작전지원안이 입안되었고, 이에 보로실로프 육군사령관은 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인 게오르기 주코프 중장을 전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주코프도 에이 뭐 별거 없겠지 했지만, 막상 모스크바에서는 3개 보병사단(차량화 사단 포함), 1개 차량화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 여단, 4개 포병연대. 8개 항공여단/연대로 구성 된 약 57,000명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투입시킨다.
당시 관동군 총사령관인 우에다 겐이치는 최초 2개 보병사단을 투입시킨다.(추가 증파로 센다이 2사단과 오사카 제 4사단의 경우 투입지시를 받았으나 센다이 사단은 전선투입과 동시에 괴멸했다. 골때리는 점은 오사카 제 4사단의 경우 꾀병을 부리며(…) 진격속도를 일부러 늦췄고, 이들이 전선에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종료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에다 겐이치는 정예 7사단이 아닌 사기가 낮고 군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23사단을 최초 투입시키는 폐착을 저지른다. 이는 장고봉 사건의 주역이었던 23사단에게 ‘복수’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겐이치의 독선적인 판단이었고, 지형적인 불리함을 무시한 채 투입된 제 23사단은 투입과 동시에 소련 포병대의 환영화포세례를 받으며 일패도지(一敗塗地)한다.
거기에다 소련군의 복수심은 일본군을 초월했다. 구식복엽기로 무장하고 있던 몽골항공대를 I-15 단엽기로 대체하였고, BT-5, T-26같이 당시에는 최신예 축에 속했던 전차들을 투입시키는 등 전투 개시와 더불어 모든 화력에서 관동군을 압도했다. 물론 일본도 최신예 전차는 있었다. 89식式 전차는 당시기준으론 ‘나름’ 대전차 화력을 가진 57mm 유탄포였으나, 전면장갑이 고작 20mm에 밖에 안되었으며, 상당히 제한적이고 상징적인 숫자만 투입되었다. 그에 반해 BT-5장갑차는 주무장이 대전차포였다(…)
결국 23사단이 고착되자 소련군은 이에 포위급습을 단행하였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7사단이 적의 전면으로 돌진(…)함에 따라 같이 포위되어 결국 관동 6군 전체가 포위되면서 약 70%의 사상자를 내며 2주 만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일본에겐 다행스럽게도 소련과 독일 상호간에 불가침조약이 발효되어 소련군은 폴란드를 집어삼키기 위해 유럽으로 병력을 집중해야 됐던 상황으로 갑작스러운 일-소간의 강화협정이 실시된다.(강화는 9월 15일에 조인되었다.)
휴전이 아닌 ‘국경승인’으로 체결된 강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련은 이 사건을 공식적인 전쟁으로서 인지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연스레 이것을 ‘사변’정도로 마무리 지으면서 묻어버렸다. 하지만 관동군은 이 사건이후 소련군에게 겁을 먹게 되었고 이는 관동군 전체가 중일전쟁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4. 일본의 뻔했던 패인
쇼와 15년 1월, 육군성에서 개회된 일종의 반성회에서는 다음 3가지의 내용이 제기된다. 「백병 돌격보다 화력을 중시해야한다. 정신력만으로는 맞설 수 없다. 참모들은 독선적인 교만을 버려야 한다.」 다음 3가지 사항만 보면 문제가 없으나, 정작 확정된 내용에는 「노몬한사건의 최대 교훈은 국군 전통의 정신위력을 점점 더 확충하는 동시에 저수준인 화력전 능력을 하루라도 빨리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정도로 희석되었다.
가장 첫 번째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독선적인 참모들과 지휘관의 모험적인 공명심이 있다. 다나카 카츠히코 교수의 저서 《노몬한 전쟁》의 10장은 ‘누가 이 전쟁을 바랬는가’라는 제목으로 ‘전쟁을 바란 남자 츠지 마사노부’를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천황제를 중심으로 육, 해군 2성을 통제해야 할 대본영의 역할에 비해서 정작 군 내부의 장악력은 당시에 신통치 않은 면이 많았고, 이는 독립적인 방면군의 고삐를 잡기에는 턱없이 약했다. 결국 츠지 마사노부가 올린 작전입안은 우에다 겐이치의 눈먼 공명심과 결탁하여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게 된다.
1930년 말 미국의 학자 에드워드 드레어(Edward J. Drea)의 ‘일본 제국군’ 연구에는 츠지 마사노부의 이름이 그다지 비중이 없는데 그도 그럴게 일개소좌의 막강한월권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 연구자들의 모습에도 나타나듯 이는 지구상 어떤 국가의 군사교리적 상식으로도 해석이 안 된다.(물론 전투 상황에 따라 현장의 판단을 중시하는 경향은 많이 있으나, 일개 참모가 작전입안하고, 대리결 때려서 전쟁판을 키우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로 화력의 열세를 들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러일전쟁이후 은연중에 러시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산호 전투의 사례에서도 드러난 화력전의 문제는 ‘거 우리애들 근성이 부족해서 진거지 뭐…’식으로 때우는 바람에 노몬한 사건에 가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당시 제 23사단의 포병전력의 대부분이었던 근거리 지원용 38식 75mm 화포는 1905년 제식화 된 것으로 이는 메이지시대의 유산으로 노인학대 수준이었다.
거기에 이 화포의 성능은 사거리가 부족해 착탄지점이 전선 후방에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소련군의 대포병포격으로 급해진 포병대가 막쏴대는 바람에 아군 오사율도 심각했다. 게다가 전차의 전력비도 총 투입 일본 87대였던 것에 비해 소련은 446대에 이르렀으며, 주력전차였던 89식 ‘中’전차(경전차가 아니다;;)는 주무장이 ‘57mm 유탄포’로 이는 소련의 BT5 장갑차가 45mm 대전차 포였던 것과 상당히 대비된다.(이로 인해 전선에서 중전차가 장갑차에게 쓸려나가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대전차 전력에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던 일본군은 결국 대항할 수단이 전무하자 일개보병이 전차에 총검으로 대항하는 ‘대전차 총검술’이 당시에 등장하게 되었다.
세 번째 문제로 병참과 후방지원의 열악성에 있다. 주병참지로부터 일본군의 철도연선은 230km로 이는 소련군의 750km에 비해 매우 짧은 거리였으나, 이런 전략적 우월성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가 속행되자 부상자 사망률이 치솟았으며, 포위 이후로는 식량보급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의 사기와 건강은 곤두박질 쳤다.
후에 이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것이 고작 『정신론』에 입각한 근성을 통해 극복하라는 것이 상층부의 전체적인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전투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군의 전통적인 폐단이 있다. 일본군은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제대로 살려서 후에 활용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
5. 노몬한 사건의 뻘짓과 영향들
노몬한 사건은 명백한 전투였다. 이왕 발생한 거 한번 대차게 이겨보자는 씁 어쩔 수 없지 최고사령부는 이 전투에 최고사령부 명의의 작전명령과 작전지도를 하달하였고, 전역에는 군단급의 병력들을 투입시켰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를 일개 사건정도로 축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패전’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이 사건에서 정작 일본 우익들은 ‘승리한 전투’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는 황당무계함도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보여줬던 여러 가지 폐단들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은 이 사건이 그저 그런 국경분쟁으로 치부되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로, 전차에 얻어 터져 놓고도 발전되지 않은 대전차 화력이 상징하는 ‘교리, 장비체계의 발전에 대한 몰지각 함’이 그러하다. 태평양 전쟁에 동원 된 미군의 전차들 중 M3 스튜어트 경전차는 유럽전선에서 순전히 보너스점수무장순찰용으로만 사용되던데 비해, 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는 M4 셔먼과 함께 가볍고 빠른 주력전차로 활동하게 된다. 이는 전면장갑 50mm도 뚫을 수 없는 일본군의 빈약한 대전차 화력에 기인한다.
한힌골 전투 당시에 이미 당대의 전차들도 뚫지 못하는 화력을 고스란히 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 사용 한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물론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후일에 일본제국은 만주군을 징집하는 과정에서 공병 2개가 지참물자(보급이 아니다, 남의 나라 군대에 끌려오면서 자기가 들고 와야 된다…)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빈약한 대전차 화력을 ‘화염병’따위로 깨부술수 있다는때우려는 일본 관동군의 전략이 반영 된 결과였다.
또한, 중일전쟁 중 실시된 삼광三光작전에서 보여지는 ‘병참의 개념이 전무함’ 역시 그러하다. 삼광작전은 후에 중국인들에 의해 붙은 작전명이긴 하지만, 살광, 소광, 창광 즉 모두 죽이고, 태우고, 뺏으라는 이 전략은 실제로 적지에서 약탈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던 일본군의 관습성을 잘 나타내준다.
일본군은 중일전선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선에서도 걸핏하면 점령지에서 약탈과 방화를 실시했다. 덕분에 점령지 주민들(특히나 중국)의 경우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따라 일본군에게 잡혀서 죽든지 아니면 죽는 바에야 싸우든지 하는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으며, 미군의 경우 패퇴지에서는 전략물자를 전량소각하는 청야전술이 실시되었으므로 빈약한 보급을 약탈로 보충하는 것이 정식교리였던 일본군에게는 큰 타격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점들이 2차대전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는 것은 쇼와 15년 1월에 개최된 반성회의 결과가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식량이 떨어지면 물자를 나르던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는 임팔 작전의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의 말과는 다르게 오히려 극단적인 굶주림으로 객사한 우마가 더 많았다는 것은, 전선에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데다가 전략자원 군수물자도 제대로 수송할 수 없어 자국군을 굶겨 죽이는 일본군의 병맛나는 열악한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6.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히데모리 시무라의 2011년 8월에 나온 노몬한 사건의 연구자료에서는, 노몬한 사건이 발생한 할하강 인근지대를 「싸울 가치가 없는 장소」라고 이야기 한다. 이는 할하강 주변의 지역적 가치에 비해 일부 지휘관들의 공명심이 전투발발에 작용한 바가 더 크다는 것을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즉, 일어날 필요가 없던 전쟁을 자신들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이를 획책한 츠지 마사노부는 전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지 않았다.
츠지 마사노부는 오히려 중의원 시절 집필한 《노몬한》에서 “전쟁은 지도자 상호의 의지와 의지의 싸움이다. 조금 더 일본이 힘을 냈다면 아마도 소련이 정전 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한 미반성적인 모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우익사관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며, 2차 세계대전의 패배 까지도 정정당당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반복된다. 한도 카즈토시는 질문한다. ‘쇼와 14년의 전쟁이 15년 1월에 가서 반성회가 열렸고, 쇼와 16년 발발한 진주만 폭격까지의 시간은 1년이 넘는 기간이 있었지만 과연 이 기간 동안 일본 군부가 한 일은 무엇인가?’고 말이다.
이는 일본군이 준비가 철저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바보짓거리를 깨달을 때 까지 자국의 젊은이들이 국가의 무책임 속에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는 것을 이야기 한 것이다.
역사를 배우고, 전승하는 이유는 역사의 반복성에 있다. 수레바퀴가 구르듯 한쪽이 가라앉으면 다시 똑같은 역사로 떠올라 돌아오는 부침의 반복성을 무시한 채, 잘못된 관습을 반복하면서 정작 교훈적인 내용은 싹다 잊어버리거나 외면하는 일본의 우익사관과 이 단편적인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일본군의 전통적인 근성론의 무용함이 가져다주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무장만 하면 나름 큰소리 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해 적극적인 우향우를 향해 달려가는 일본은 전쟁과 전쟁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그것이 전략적이든, 평화적이든) 전쟁사관의 대전제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또 실수를 하시던가…
wandtatoosInformation of Oscar De La Ren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