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콘텐츠 창작자’는 대체로 3개의 단계를 거치며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주변의 여러 작가나 음악가를 만나며 정리된 것이기도 하다. ‘콘텐츠 창작자’란 말이 거시기하면 ‘뭘 쓰거나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 재능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어떤 재능을 가진다. 그걸 언제 발견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이 오십에 문학적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재능을 발견하고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건, 그걸 갖고 노는 것이다. 그런데 재능을 갖고 놀 때 가장 중요한 건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맺고 완성하는 것.
내 경우 처음 재능을 발견한 건 이야기였다. 어떤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을 소재로 내 방식대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마침표’를 찍었던 게 중1 때 썼던 SF소설이었다. 지구를 침공한 외계 생명체가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잡아 죽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대체로 해피하게 끝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비극으로, 그러니까 주인공들은 다 죽고 지구는 멸망하는 이야기를 썼다.
최초의 독자는 아버지였다. 처음엔 혼날까 봐 쫄았는데 다 읽은 뒤에 ‘재밌네’라고 얘기해줘서 계속 썼다. 이 단계에서는 칭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뭘 했는데 주변에서 잘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면 그게 동기부여가 되어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계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실력이 늘고, 나름의 노하우도 생긴다.
2. 자원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재능을 더 발전시키고 싶어진다. 재능을 갖고 놀던 중에 욕심이 생기면서 이론적으로 접근하거나 체계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재능은 조금 다른 단계로 업그레이드된다. 동시에 실패도 많아진다. 어떤 체계 안에서 논리적으로 결과물을 만들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익숙했던 게 낯설어지고, 다른 방식을 실험해보면서 내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게 된다. 여기서 포기하면 자기 재능에 만족하게 된다.
대신 재능을 ‘진로’로 고민하는 경우에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제도교육을 통해 전문가 과정을 밟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곧장 필드로 진입해 프로페셔널(=돈 받고 일하기)이 되는 것이다. 뉴미디어 환경에서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제도권에서 가르칠 수가 없으니까. 여기엔 새로운 기술과 환경이 중요하게 개입한다. ‘기술의 민주화’라고 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이게 혁신으로 여겨진다.
물론 일장일단이 있다. 아무리 환경이 바뀌고 혁신이 벌어져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할 분야는 체계를 배우는 게 장기적으로 좋다. 학교에 진학하든, 다른 방식으로 학습하든, 혹은 비슷한 관심사의 동료를 찾아서 어울리든, 아무튼 여러 방식의 공부가 필요한 단계고 이때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원’이라는 걸 확보하게 된다.
이쯤에서 ‘동료’를 만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질투와 선망, 콤플렉스를 느낀다. 저 인간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내가 만든 모든 게 하찮게 여겨진다. 분해서 눈물이 난다. 그러나 사실 이때는 정작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모른다. 그저 자신의 재능이 다듬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 같은 게 생긴다. 이거저거 하면서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어느새 각자의 영역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맡는 걸 보고, 그들이 업계의 메인스트림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대략 한 10년쯤 지나면, 우리는 아웃사이더였는데 이제는 메인스트림이네… 하는 순간도 온다. 나름 성공한 커리어 패스다. 꼬꼬마 시절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재능이 자원으로 확장될 때에는 약간의 호기심과 약간의 열정만 있으면 된다. 낯선 사람 만나길 꺼리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칭찬 받는 게 즐겁고, 결과물을 보는 게 신나는 걸 즐기는 거로 충분하다. 기회비용도 크지 않다. 다만 이 시기가 얼마나 길거나 짧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재능을 자원으로 삼는 것. 이게 중요하다. 재능이 장난감이라면, 자원은 도구니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스파이더맨도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나르는 훈련이 없었다면 손목에서 거미줄 나오는 왕따로 끝났을 거다.
이 시기에는 커리어, 인맥, 경험 같은 부가가치도 자원이 된다. 재능과 부가가치를 활용하면서 계속 일하고 성장하는 시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감 떨어지고 구식이 되고 어디 가면 늙다리 취급당하는 것 같은 때도 온다. 아직 한창인데 앞으로 20년 동안 뭐하나 싶고 그런 때. 이걸 읽는 여러분 말고 내 얘기다. 당신들은 이제 한창이니까 열심히 하시오.
3. 자산
재능(즐거움)을 기반으로 자원(도구화)을 축적하면 그럭저럭 먹고산다. 그런데 이 단계가 오래 지속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소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게 순환구조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순환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콘텐츠 영역에서 이런 순환구조를 만들기는 어렵다.
디자인, 영상, 편집, 텍스트 등 소위 크리에이터는 무형의 기술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수익모델이란 매우 성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부가가치 사업이다. 요즘 세상에 책 팔아서 돈 버는 저자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작가는 책을 통해 생긴 명성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한다.
이런 구조에서 혼자 순환구조를 구체화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21세기의 기술 발전이 노리는 곳이 죄다 이런 분야다. 창작이야말로 인간의 영역이라고? 요새는 인공지능이 기사도 쓰고, 음악도 만들고, 그림뿐 아니라 소설도 쓴다. ‘전문 영역’이라고 부르는 곳의 경계가 흐릿해지면, 재능에 대한 가격 측정을 하기도 애매해진다.
그래서 자원을 자산화하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자산’이란 말 그대로 ‘제 발로 돌아다니면서 가치를 만드는 구조’다. 크리에이티브 기반의 자산 구조는, 특히 혼자 혹은 소수의 팀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재능을 기반으로 한 ‘일’ + 명성을 토대로 삼은 ‘부가가치’ +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 가 구조화되면서 계속 순환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재능을 바탕으로 나름의 가치사슬을 설계해보는 셈이다.
앞으로 콘텐츠/크리에이티브 산업 구조는 독점적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기존 산업을 위협하는 큰 변화다. 그러나 이 변화는 개인 혹은 작은 팀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경쟁이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환경이 좋은 것만은 아닐 텐데, 당연히 더 빡세게 경쟁하게 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다른 영역의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독점’ ‘지배’ ‘경쟁’이라는 사회경제학적 개념이 재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거시적인 관점일지 모르지만, 2020년 이후의 삶(=임금노동+일상+생산+소비)에서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는 영역이 갑자기 확 늘어날 게 분명하다. 한 마디로? 바로 ‘문화 충돌’이다.
이제 무얼 할 수 있을까?
여러분처럼 나도 늘 고민한다. 최근엔 ‘티엠아이에프엠(TMI.fm)’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뉴스레터를 시작했다. ‘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의 뮤직레터’란 이름으로 수요일 밤 9시에 보낸다. 키워드는 일, 밤, 음악이다. 낮에는 해야 할 일을 하고, 밤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작했다. 하다못해 밤에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라도 공유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랄까.
이게 나중에 뭐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글쓰기라는 자원을 통해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니 ‘콘텐츠 비즈니스에 대한 빌드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혼자 감당해보기로 했다. 이 글도 티엠아이에프엠에 대한 고민을 하다 하다 쓴 글이다. 그러니 재능을 갖고 놀면서 성장하는 모든 이에게 럭키를 보낸다. 화이팅.
덧. 혹시 이런저런 상담이 필요하신 대기업, 스타트업은 따로 연락주시길. 콘텐츠 브랜딩, 플랫폼 비즈니스 분야에서 경험 많은 파트너들과 함께합니다. 편하게 문의주세요. 저는 친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