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문제에는 개조식이 아닌, 서술식 보고서가 필요하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의 대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그의 저서 『Thinking, Fast and Slow』에서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의 사고체계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그 두 가지가 이것이다.
- ‘시스템 1’적 사고
- ‘시스템 2’적 사고
시스템 1은 직관의 영역이다. 즉각적인 반응을 가능하게 해준다. 생존을 위해 단련된 사고체계인 셈이다. 반면, 시스템 2는 논리적으로 심사숙고하는 뇌다. 통계, 과학, 분석을 위해 가동된다. 단, 느리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스템 2가 필요한 곳에 시스템 1이 가동될 때다. 인간의 뇌는 시스템 1 모드에서는 편향의 오류에 꽤 취약하다. 논리적 사고를 건너 뛰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의사결정을 내리는 게 직업인 사람들, 즉 리더들이 눈여겨 볼 문제다.
제프 베조스가 ‘서술식 보고서’에 집착하는 이유
세계 최대의 기업 중 하나인 아마존을 창업하고 이끌고 있는 제프 베조스. 아마존의 수장인 그는 글쓰기에 집착한다. 그것도 서술식 글쓰기 말이다. 개조식은 사용금지다. 파워포인트도 퇴출시켰다.
아마존의 모든 보고서는 여섯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식으로 작성되기에 쓰윽 대충 읽는 게 애초에 불가능 하다. 그 흔한 그래프도 없고, 컬러도 못 쓴다. 형용사와 부사도 쓰면 안 된다. 그 자리는 숫자들이 채운다. 집중해서 읽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는 문서다.
반면 개조식은 어떤가. 개조식 보고서는 대충 훑어보기 마련이다. 애초에 개조식 보고서는 ‘읽기’용이 아니다. 개조식은 속독을 위한 보고서다. 일목요연하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에 알맞다. 다시 말해 빠른 의사결정을 내려 주는 시스템 1과 잘 어울리는 셈이다.
서술식 보고서는 의도적으로 읽기의 속도를 늦춘다. 빠른 의사결정보다는 느리더라도 종합적 분석에 의한 의사결정을 위한 보고서다. 시스템 2를 위한 보고서인 셈이다.
리더가 어떤 글쓰기를 선택하느냐는 결국 회의의 모습도 바꾼다. 모두가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서술식의 경우, 회의의 초반에는 정적마저 감돌 수밖에 없다. 아마존의 회의가 그렇다. 마치 대학교 도서관 같은 분위기 속에서 30분간 차분히 정숙모드로 6페이지에 빼곡히 적힌 서술식 보고서와 각종 데이터를 모두가 둘러 앉아 읽는다. 자연스럽게 시스템 1이 차단되고 시스템 2가 가동되는 것이다.
‘개조식 보고서’로 해결하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과 정부기관은 개조식 보고서를 사용한다. 이것도 일종의 빨리빨리의 유물이 아닐까.
개조식 보고서가 특정 현안을 의사결정권자에게 빠르게 파악하도록 돕는 역할에는 탁월하다는 강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특히, 군부대와 같은 곳에서는 개조식 보고서는 매우 유용한 양식임에 틀림 없다. 또 한 분야에 정통한 리더들에게 해당 분야의 영역에 대한 의사결정이라면, 개조식 보고서로도 얼마든지 논리적 의사결정을 기대할 수 있다.
문제는 점차 한 가지 분야의 전문성으로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 사태만 보아도 보건, 경제, 교육 등이 복잡하게 얽힌 복잡한 사안이다. 당연히 한 분야의 전문가(30년이 넘는 경력을 지닌 전문가더라도)에 의해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다. 복잡한 시대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리더들의 종합적, 논리적 사고가 더욱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당연히 개조식으로 작성되어 오던 문서들의 목적과 효용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개조식 보고서,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전문가적 직관을 포함한 시스템 1만으로도 충분한 결정 위주의 조직이라면 지금의 개조식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잡한 정책,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해야 하는 기관들은 의사결정권자들의 시스템 2의 원활한 가동을 위해서라도 개조식 보고서를 서술식 보고서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런 변화를 실행하는 데에는 돈 한 푼이 들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기업의 경영방식을 무상으로 벤치마킹할 수 있다면? 사실 이건 노브레인너(No-brainer)다. 시스템 1로 즉각적으로 결정을 내려도 오류가 나기 힘든, 어쩌면 당연히 시도해 보아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개조식 보고서, 이제는 버려야 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원문: jwvirus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