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徐廷柱, 1915~2000)는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시인’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그의 서정시가 이른 성취는 곧 한국 현대시의 성취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교과서마다 다투어 그의 시를 싣고, 지역의 나이 지긋한 시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온 그의 제자들이다. 진보 문학 진영의 원로 고은도 그의 제자다.
그는 첫 시집 <화사집>(1941) 이래 <귀촉도>(1946), <시선>(1955),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가히 ‘시선(詩仙)’의 지위를 얻은 듯하다. 그는 마치 우리 현대시단의 살아 있는 ‘표준’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다.
서정주는 ‘화사집’ 시대, ‘귀촉도’ 시대, ‘동천-신라초’ 시대 등으로 명명된 개인의 시사(詩史)가 버젓이 고교 교과서에 오를 만큼의 지위를 지닌 흔치 않은 시인이었다. 초기의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에서 ‘동양사상’과 ‘불교와 토착적 전통의 융화’를 거쳐 ‘우주와 공감할 수 있는 시적 깊이’까지 이른 미당 시세계의 변천은 그대로 우리 현대시사의 주요 흐름의 일부였던 것이다.
서정주의 시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고교 시절이다. 형이 사 온 민음사판 얄팍한 미당 시집이 있었는데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책머리에는 “스승의 시는 한 편도 뺄 수 없다”는 엮은이 고은 시인의 글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은은 70년대에 민중시를 쓰면서 스승과 정신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그 시집에서 읽은 ‘자화상’과 ‘밤이 깊으면’을 달달 외워버렸다. ‘밤이 깊으면’은 미당이 젊은 시절, 자신의 아내에게 바친 시라는데, ‘달래마늘같이 쬐그만 숙아’ 어쩌고 하는 시구의 울림이 어쩐지 마음에 감겨왔던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시 ‘자화상’은 미당이 스물세 살 적에 쓴 시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는 시구로도 유명한 이 시는 고교 문학 교과서에도 더러 실려 있고 모의고사에도 가끔 출제되기도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실제 그의 부친은 종이 아니라, 전북 고창의 거부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고 한다.
미당은 전북 부안의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나와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생으로 입학했다. 이듬해 11월 광주학생운동 기념시위를 주도해 퇴학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기소유예되었다. 1933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12월 <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으로 등단했다.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壁)’이 당선되었고,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11월부터 다음 해 12월까지 시가(詩歌) 중심의 문예 모임인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 만주로 가서 회사원으로 일하다 1941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을 발간하고 동대문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2년 봄까지 근무했다. 서정주가 문필로 친일 대열에 합류한 것은 같은 해 7월, <매일신보>에 평론 ‘시(詩)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國民詩歌)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또 좋은 술어(述語)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 동양에 살면서도 근세에 들어 문학자의 대부분은 눈을 동양에 두지 않았다. 몇몇 동양학자들이 따로 있어 자기들의 일상 사용하는 한자의 낡은 문헌들을 자의적(字義的)으로 해석해 내는 정도에 그쳤었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 기회에 부족한 실력대로도 좋으니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하여 황국(皇國)의 전적(典箱)들과 반도의 옛것들을 고루 섭렵하는 총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양에의 회귀가 성(盛)히 제창되는 금일” – <매일신보>(1942. 7. 13.~17.)
불과 스물여섯, 등단한 지 10년도 안 된 젊은 시인은 ‘동방 전통의 계승과 보편성에의 지향’을 내세우면서도 은근히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3년 10월에 최재서와 용산 주둔 조선군이 김제평야에서 진행한 전쟁연습에 조선군 보도반원 자격으로 종군했다.
그 후,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 입사하여 1944년 2월까지 일본어로 간행된 친일노선의 문예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 서정주는 주로 시·소설·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 발표한 ‘항공일(航空日)에’ 는 일제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동원을 독려하기 위해 제정했던 항공일 행사에 맞춰 쓴 기념시다.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 온 소원!
<매일신보>에 발표한 ‘헌시(獻詩)’(1943. 11. 16.)는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학도지원병 제도는 일제가 1943년 8월부터 실시한 징병제와 함께 식민지 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의무로 강요된 전쟁동원령이었다. 이 시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학도지원병의 영웅적 전투 행위를 그려내면서 조선 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 출정을 독려하고 있다.
어머니여, 저 용맹스런 함성은 저 곳이리
푸른 혈조가 끊임없이 내려와
커다란 목소리, 나를 부른다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
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
배를 띄우리
사이판으로!
매킨·타와라로! 아투로!-‘무제- 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국민문학> 1944년 8월호) 중에서
‘무제- 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사이판 등지에서 일어난 일본 병사들의 옥쇄(玉碎)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를 통해서 미당은 옥쇄를 감행한 병사들과 하나가 되어 적과 맞서 싸우자고 선동했다.
일반에도 널리 알리진 ‘송정오장 송가’(<매일신보> 1944. 12. 9.)는 1944년 11월 24일 한국인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제일 먼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전사한 인재웅(창씨명 송정수웅)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서정주는 이 시에서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조선 병사의 죽음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영광스런 자기희생인 양 노래했다.
서정주는 수필 ‘인보정신(隣保精神)’(<매일신보> 1943. 9.1~9.10.)에서는 이웃 간에 일어난 촌극을 통해 일본 국기에 대한 흠모의 정을 그렸다. ‘스무 살 된 벗에게’(<조광> 1943년 10월호)와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춘추>1943년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징병에 젊은이와 어머니들이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이보단 앞서서 이미 우리들의 선배의 지원병들은 우리들의 것이요 동시에 천황 폐하의 것인 그 붉은 피로써 우리들 앞에 모범을 보이어 우리들의 나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야스쿠니 신사의 영령이 된 한 사람의 이인석(李仁錫) 상등병의 피는 절대로 헛되이 흘려져 버리고 말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가나우미. 땅에 흘려진 피는 또한 늘 귀 있는 자를 향하여 외치는 것이라는 것도 총명한 그대는 잘 알 것입니다. 지원병들의 뒤를 이어서 인제부터 젊은 사람들은 스물한 살만 되면 부절(不絕)히 일어서서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갈 것입니다.”
– ‘스무 살 된 벗에게’ 중에서
서정주는 소설로도 일제에 협력했다. <조광>에 발표한 ‘최체부 (崔遞夫)의 군속지망’에서 침략전쟁에 복무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신의 갈래도 아닌 소설을 써서 거기 일제의 전쟁 논리를 따른 것이다.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하고 큰 획으로 맨 처음 줄을 아로새긴 밑에, 신문지를 두 쪽에 낸 것만 한 백로지 위에 탄원의 문구가 가득히 쓰이어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체부의 소원은 마침내 관계 관원들을 울린 바 있어서, 그의 벗인 해리면 사무소의 가네무라 군과 같이 얼마 후에 두 사람 은 군속이 되어 먼 남녘 나라로 떠났다. 최체부는 떠날 달부터 꼭꼭 그의 집에 돈을 부치어, 집안은 전보다 살기에 궁색지 않았고, 마을사람들의 끝없는 호의와 존경 속에서 최체부의 어머니도 손자를 따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규-조-요하이(궁성요배)를 하는 갸륵한 습성이 생기었다.”
– 소설 ‘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조광> 1943. 11) 결말 부분
해방을 맞이할 때 서정주는 우리 나이로 갓 서른이었다. 그것은 그가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는 그의 친일이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떠한 반성의 뜻도 표하지 않았다.
<서정주문학전집>에 실린 자전적 성격의 글인 ‘천지유정’의 ‘흑석동시대’와 ‘창피한 이야기들’에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부일파’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자신은 다만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강변했던 것이다. ‘하늘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는 것인데, 반민족적 행위에 ‘하늘뜻’ 운운하는 것은 ‘파렴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당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서도 자신의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고백했다. 일찍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토로와도 맥을 잇는 발언이었다.
해방 후 서정주의 삶은 여느 친일 문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으로 근무했다. 어떤 시대든 주류로 살아가는 데에 그는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전기 <이승만 박사전>(삼팔사)을 발간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종군문인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후 그는 정년까지 대학 교수로 후진을 가르쳤고, 문단의 중진과 원로로서의 지위를 누리면서 평탄한 삶을 살았다.
서정주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도 만만치 않았지만,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와의 유착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 축하 축시 헌사, 광주항쟁 이후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행한 군사 파쇼 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등으로 일제와 독재정권 주변을 맴돌며 권력과 야합한 인물로 지탄을 받았다.
1987년 1월 18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생일 축하장에서 자작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낭독했다. 낯부끄러운 찬양과 아부로 점철된 이 시는 문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는 극한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략…]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는 2000년 12월에 사망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6월, <중앙일보>에서 미당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1년에는 고창에 미당시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2005년 이후 매년 가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미당시문학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유족회의 친일·친독재 작품 병행전시’ 요구를 받아들여 2006년부터 문학관 안에 친일작품과 전두환 생일 축시 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게 그나마 우리가 청산한 식민지 역사의 일부라고 자위할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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