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고승덕의 딸 고희경 씨가 등장하기 전에 쓰인 글입니다. (편집자 주)
학부모 국개론과 그 진실
서울 교육감 선거 여론조사에서 고승덕이 지지율 1위를 차지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는 분들이 많다. 이 분들에게는, ‘고시 3관왕’이다 뿐이지 초중등 교육에는 이렇다 할 식견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가 선두를 달리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지배적인 담론은 소위 ‘국개론’ 계열이다. ‘고시왕이 교육감 하면 자기 자식들도 공부 잘 할 줄 아는 멍청한 학부모들’ 때문에 선거가 이 모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논평이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학부모의 굴절된 욕망이 고승덕의 인기 비결이라는 주장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는 그릇된 진단이다. 이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은 여론조사의 데이터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 봐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다음 표를 보자. KBS/MBC/SBS 지상파 방송 3사가 5월 20일에 발표한 조사결과다. (자료 소개: 박예나님@epistazo2)
보다시피 초중고에 보낼 아이가 있을 연령대인 30~40대에서 고승덕의 지지율이 제일 낮다. 야당의 핵심 지지층이 선호하는 조희연(진보교육감 후보)에 대한 지지는 30~40대에서 가장 높으며, 야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진 세대인 20대가 되려 고승덕에게 42%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20대의 조희연 지지율은 6.6%에 불과하다.
즉, 어딜 봐도 학부모가 고승덕의 핵심 지지층이 되고 있다는 해석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1] 고승덕을 혐오하는 야권 지지층의 입장에서 학부모는 그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집단이지, 적대적인 집단이 아니다.
고승덕 표는 무관심 표
고승덕에 대한 지지는 학부모들의 욕망이 적극적으로 투영된 결과가 아니며 되려 그 반대에 가깝다. 적극적인 지지가 아니라 소극적인 지지이며, 무관심이 낳은 결과다.
교육감 선거는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하는 후보 없음/무응답’의 비율이 35~50%나 될 정도로 관심도가 떨어진다. [2] 일단 교육감 후보들이 몽땅 무소속이라 이 사람들이 어느 ‘계열’인지 한눈에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방선거판이 광역시장이나 도지사 같은 메이저 선거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교육감 후보자의 정책 방향 등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와 누굴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이름이라도 들어본 유명하고 익숙한 사람 버튼 누르는 거다.
후보자 간 차이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유권자가 선거에서 대충 유명한 사람 찍는 건 아주 흔한 현상이며, 서울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부산을 보자. 부산에서 1위를 달리는 후보는 무려 진보교육감 후보인 김석준이다. 부산이 진보적인 동네가 절대 아닌데도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김석준이 후보 중 제일 유명하기 때문이다. [3]
김석준은 부산에서 시장선거에 2번, 총선에 1번 출마했는데, 민노당 같은 진보정당 딱지를 달고 출마하고서도 17%를 득표할 정도로 지역 정가에서 이름난 정치인이다. 그런 유명인이 교육감 선거에 나오니 정치적 성향이 불리하게 작용하는 동네에서도 1등을 한다. 고승덕과 본질적으로 같은 케이스다.
유권자의 관심도는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다. 왜 20대에서 고승덕 지지율이 높겠는가? 그들이 교육감 선거에 제일 관심 없을 세대이기 때문이다. 초중고 교육이 어떻게 바뀌든 그들의 삶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이미 졸업했고 자식도 없다. 정치에 원래부터 관심이 많다면 모를까, 전부 무소속인 교육감 후보들의 차이를 일일이 조사해서 알아낼 만큼 관심을 쏟을 동기가 없는 것이다.
30-40대는 다르다. 당장 내 자식들을 혁신학교에 보내야 할지, 국제중 혹은 자사고에 보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변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의 상당량이 자식 교육 걱정이다. 교육감 후보들의 정책적 차이를 열심히 검토해 봐야 할 동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세대에서 조희연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보라는 것이 머릿속에 입력되고 생각이란 것을 하다 보면 단순히 유명한 사람 찍는 일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교육감 선거, 언제까지 ‘꼽사리’로 둬야 하나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의 일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 학부모가 문제가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어찌됐든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유명하다고 지지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미개한 국민들이 많다는 것 아닌가. 그들을 탓하는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당연히 문제가 있다. 유권자의 수준을 문제 삼는 이런 류의 비난은, 전국민이 정치와 공공 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지닌 고대 그리스식 시민이 돼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먹고 살기에 여유가 없어서 뉴스도 못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한다.
도시국가 아테네처럼 시민이라면 누구나 생계를 위한 노동을 대신해줄 노예를 거느리는 세상이 아니라면,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게다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소위 ‘의식 있는’ 시민인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경향마저 있는데, 감정적 반발을 사기에 딱 좋은 어리석은 태도다.
필요한 것은 전국민을 정치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균적인 관심만을 갖는 유권자들조차도 숙고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유권자의 잘못된 판단을 탓하기 전에 그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유권자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는 선거란, 무엇보다도 후보간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선거를 뜻한다. 예컨대 부동산 개발에 적극적인 후보, 비판적인 후보. 반값등록금에 찬성하는 후보, 반대하는 후보 같은 구분이 명확하게 갈리는 선거 같은 거다. 이런 구분선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유권자가 인지하는 단계까지 가야 제대로 알고 찍는다.
문제는, 현재의 교육감 선거는 그런 선거가 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를 같이 치르게 되면 교육감 선거가 관심에서 소외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다. 예컨대 선거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의 경우, 지면과 기자 수가 한정되어 있다. 이 한정된 자원을 더 중요한 선거 중심으로 할당하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다.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 같은 메이저급 선거를 중심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런 구조에선 유권자가 교육감 선거에 대한 깊이 있고 폭넓은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
교육감 선거를 제대로 치르려면 지방선거와 분리해서 다른 날짜에 선거해야 해야 한다는 주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 제안,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무상급식 같은 메이저 의제는 반복되지 않는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르는 교육감 선거의 문제점이 이제야 드러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으로 지방선거+교육감선거를 패키지로 묶었던 2010년 선거가 너무 기이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구조적인 문제점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교육감 선거에 황당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갖게 만드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무상급식’의 등장이었다.
무상급식은 원래 경기도교육감 후보였던 김상곤이 들고 나온 의제였다. 그런데 너무 인기가 좋다 보니 교육감 선거 쟁점이 아예 전체 지방선거판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후보냐, 반대하는 후보냐 하나로 전체 지방선거판이 갈려버린 것이다. 바로 이 의제의 힘 때문에, 현직도 아니라 인지도도 낮고 별 관심도 못 받던 진보교육감 후보들이 곽노현 포함 전국 6명이나 당선돼 버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안 유명해도 ‘무상급식 찬성하는 후보’라는 타이틀 하나로 당선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주 예외적인 사례라고 봐야 한다. 교육감 선거 의제가 광역단체장 선거를 좌우하는 일이 벌어졌던 건, 그냥 2010년의 김상곤이 수퍼맨이었기 때문이다. 수퍼맨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지 않는다. 수퍼맨이 없는 올 교육감 선거는, 시스템상 응당 그렇게 됐어야 할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강조하지만, 현재 같은 선거제도로는 유명한 사람이 교육감 당선되는 게 자연스러운 결과에 가깝다. 유권자가 특별히 멍청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서울 교육감 선거에 대해서는, 진보교육감 후보인 조희연 캠프의 한심한 선거운동도 좀 짚을 필요가 있다. 인지도에서 불리함을 먹고 들어가는 후보는 어떻게든 선거판을 흔들 만한 쟁점을 만들어내야 이길 수가 있는데, 어째 조희연 캠프에선 그런 노력을 찾기가 힘들다. 예컨대 서울시장 선거에서 뒤지고 있는 정몽준이 부동산 개발 이슈를 띄우려 하고 각종 네거티브를 던져대는 것과 비교해 보자. 저렇게 쟁점을 어떻게든 만들고자 하는 게 쫓아가는 캠프의 일반적인 선거운동이다.
그런데 조희연 캠프는 선거판을 흔들 독자적인 의제를 던지기는커녕, 자사고 폐지나 혁신학교 확대 여부, 국제중 존폐 문제 등 이미 교육계에 존재하는 쟁점조차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에 조희연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알리는 것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한다. 이건 캠프가 선거 할 줄 모른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애초에 인물 대결 구도가 됐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된 건데 인물을 부각시켜서 이기려 들면 난감해진다. 김상곤 같은 초능력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요약
결론은 이렇다. 고승덕이 이기고 있는 게 화난다고 엉뚱하게 ‘탐욕스러운 학부모’에 화살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되려 그분들이 제일 ‘숙고된 판단’을 하고 계신다.
유명한 사람 찍는 관심 없는 유권자가 많은 현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지방선거를 교육감 선거와 묶어서 치르는 현실에선 불가피한 문제다. 아쉽다면 교육감 선거 제도 개선에 관심을 가져보자.
그리고 진보적 교육운동 진영은 선거를 좀 더 제대로 할 줄 아는 후보와 캠프를 배출해 줬으면 좋겠다. 지지자들 중 답답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 밝혀두자면, 세대별 교육감 후보 지지율은 여론조사 업체에 따라 다르게 나오며 편차도 제법 큰 편이다. 20대의 고승덕 지지율이 30~40대와 별 차이가 없거나, 1~2% 낮다고 나오는 다른 조사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여론조사들조차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결과는, 30~40대에서 조희연 지지율이 가장 높으며 20대나 50대 이상과는 뚜렷하게 구분될 정도로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
- 이 비율은 다른 선거, 이를테면 서울시장과 같은 광역단체장 선거보다 훨씬 높다. 위에 인용한 방송 3사 조사에서 서울 교육감 후보 지지에 대한 모름/무응답의 비율은 34.4%였는데, 같은 조사에서 서울시장 후보자에 대한 모름/무응답 비율은 8.6%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교육감 선거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
- 진보진영의 단일화 효과를 변수로 꼽는 주장도 있다. 물론 단일화가 감안해야 할 요소인 건 맞는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긴 어렵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조희연도 단일화했지만 3위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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