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매일 두 시간씩 공들여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불교 전통에 입각한 ‘위빠사나 명상’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불교의 명상법 중 하나로, 편견과 욕구를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 중점을 둔다. 그는 명상을 통해 얻은 집중과 내적 균형이 없었더라면 『호모 데우스』와 같은 책은 쓸 수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이는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와 같은 물음에 명상이 든든한 도우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잉 정보와 소음에 휩쓸리기 쉬운 현대 시대에 핸드폰, 컴퓨터 등의 전자기기를 끄고 ‘신경 끄기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태국 방콕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스님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불교문화와 수행에 관심을 많이 가져왔다. 그래서 미얀마에 가기 전부터 ‘마하시 명상센터(Mahasi Sasana Yeiktha Meditation Centre)’에 호기심이 있었다.
2012년 5월, 미얀마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태국 방콕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다. 줄을 서 있는데 우리나라 스님이 보였다. 그때는 ‘오! 우리나라 스님이 계시네?’라고 속으로만 반가워했다. 그런데 미얀마 양곤 행 에어아시아 셔틀버스를 탈 때 그 스님을 또 보게 되었다.
엇! 또 그 스님이시네!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인사를 드렸다. 스님은 마하시에 수행을 하러 가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하시에 대한 관심이 더 증폭되었고, 언젠가는 꼭 가 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2015년 9월, 나는 마하시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관찰’할 뿐이다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처음 배운 것은 위빠사나 명상의 기본인 사띠(sati)다. 사띠는 ‘모든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배가 들어가고 나오는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해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행선을 할 때에는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해서 ‘듦’, ‘놓음’을 관찰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할 때도 ‘숟가락을 듦’, ‘음식을 넣음’, ‘씹음’과 같은 움직임을 알아차리며 식사를 해야 했다. 맛이 있거나 없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모든 행위가 관찰의 대상이 되기에, 나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이 모든 가르침이 신선했다.
처음에는 10분 동안 좌선하는 것도 쥐가 나서 고통스러웠다. 최소 수행 기간인 10일을 채울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마음은 지극히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좌선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결국 수행 기간을 늘려 3주 동안 지내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부터 이어지던 수행
칠흑 같은 어둠이 무엇인지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시간에 일어났다. 스님과 수행자들과 함께 공양 행렬에 참여했고, 새벽부터 밤까지 정진했다. 아마 앞으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사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되면 잔걱정 많고 소심한 나의 성격이 ‘휘둘리지 않는 마음 상태’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3주라는 기간은 터무니없이 짧고 경험의 깊이는 얕았다. 나는 여전히 자그마한 것에도 중심을 잃고 흔들리곤 한다.
하지만 마하시에서의 시간은 미얀마인들의 지극한 불심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가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지 깨닫게 되는 기회도 되었다.
시끌벅적한 파티가 없을지라도, 생일은 충분히 빛날 수 있다
9월 30일, 수행기간 중에 생일을 맞았다. 내 생일을 알게 되신 베트남 비구니께서는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을 꽃피우기를(blossom) 바란다’라고 적은 쪽지를 내 수행 방석에 놓아 주었다. 어떠한 케이크나 촛불도 없었지만, 그 쪽지 하나로 그날은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일이 되었다.
이 오염된 세상에서 그처럼 맑은 기운으로 가득 찬 공간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생활했다는 사실이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큰 축복 중 하나였다고 느낀다.
세계적인 명상 지도자, ‘우 자띨라 사야도’가 입적하기 직전 받은 가르침
운이 좋아서, 오랫동안 수행을 지속하는 현지 수행자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기회를 자주 누렸다. 일주일에 두 번씩 우 자틸라 사야도(U Jathila Sayadaw) 스님과 함께 담마 토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우 자틸라 사야도 스님은 위빠사나의 대가로,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내외국인을 지도하는 수행자이자 스승이셨다. 수행과 교학을 두루 겸비한 지도자로 이름이 높으신 분이셨는데, 한국 수행자들을 특히 아끼셔서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한국 수행자들만 지도하셨다. 나도 그 수혜를 받은 수행자 중 한 명이었다.
사야도께서 굉장히 이름난 분이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곳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 들어온 후에야 사야도께서 어떤 위치에 계신 분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을 직접 만나 뵙고, 그분의 입적 직전까지 수행 지도를 받았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2015년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3주간 수행을 하고, 한 달간 미얀마를 여행한 뒤 다시 마하시를 찾았다. 한 달 만에 다시 뵌 사야도께 무릎을 꿇고 삼배를 하는데 여행을 무사히 잘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런 나를 보시던 사야도께서는 당신이 시주받으신 과일을 나누어 주셨다.
당시에도 스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싱가포르 내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으셨다. 결국 2016년 1월, 내가 한국에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결국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게도 무척 큰 슬픔이었다.
천국 같던 마하시 명상 센터로, 다시
2018년 8월, 3년 만에 마하시 명상 센터를 다시 찾았다. 수행을 하던 당시에는 여행 중이라 많은 액수를 기부하지 못했다. 당시의 부채 의식을 갚고, 다시 방문하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갔다.
마하시는 남성과 여성이 수행하는 공간이 나누어져 있는데, 여성 수행자 공간에는 ‘마 삐용’이라는 분이 계신다. 평생 사야도를 헌신적으로 모시며 살아오신 분이고, 지금도 매일같이 스님을 위한 추도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자, 손으로 내 가슴을 쓸어 주셨다. 나중에 다시 와서 수행하라는 말과 함께. 여러 의미에서 마하시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이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 하기를
수행하던 때, 여성 수행자분들이 빨리 어(Pali language)로 기도하는 소리가 방송으로 울려 퍼지곤 했다. 그 기도 소리가 참으로 좋아서 녹음하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며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보낸 시간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오늘 밤 자기 전, 마하시 명상센터에 계시는 수행자분들과 승려분들, 그리고 미얀마에 계신 모든 분을 위해, 그곳에서 마주한 청명한 달빛을 떠올리며 내가 녹음했던 기도를 드리고 싶다.
amh-ya, amh-ya, amh-ya
yuto mu kyo pa kun lo
Sadhu, Sadhu, Sadhu아마야, 아마야, 아마야 유또
무 쪼 빠 꾼 로
사뚜, 사뚜, 사뚜
We share meritorious deeds to all beings and relatives.
이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 하기를.
원문: 달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