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동네를 지나다니는 마을버스 01번 기사님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구로구 콜센터 직원의 가족이라고 한다.
01번 버스는 전부 방역소독을 실시했고, 해당 노선을 운전하는 57명의 기사님들도 자가격리 조치됐다. 마을버스 대신 파란색, 초록색 시내버스가 01번 표지판을 붙이고 대체 운행을 했다. 물론 노선이 단축됐고, 배차 간격도 길어졌다. 채널A는 위의 사실을 보도하면서 주민들의 코멘트를 덧붙였다.
“내가 그 버스를 탔는데 그분이 만약 확진자라고 생각하면 저 같아도 무서울 것 같아요.”
“떨리죠. 무섭고 겁나죠. 페렴이라는 게 치료를 받아도 바로 낫는 게 아니고.”
별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주민 반응을 전하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주민 반응을 덧대는 보도 방식에 속이 쓰렸다. 한 사람을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타인을 무섭고 겁나게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느낌이었다. 확진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임에도, 그저 ‘한 명의 바이러스’처럼 이야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도처에서 힘내라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감염이 된 이들에 대한 위로나 배려는 없다. 처음에는 주의 차원에서 이뤄졌던 동선 공개가 현재는 일종의 ‘데스노트’인양 여겨진다. 확진자가 지나간 가게는 일시적으로 폐쇄되고, 매출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확진자는 이동 경로가 복잡할 경우 많이 돌아다녔다고 비난받는다. 증상을 자각한 상태에서 이동을 한 경우에는 거의 ‘역적’이 된다.
우리집 근처에 사는 콜센터 직원 한 분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까. 콜센터 직원들을 떠올리면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그리고 확진자를 ‘바이러스’ 취급하는 지금의 분위기가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아픈 것도 문제지만, 누군가를 전염시켰을까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랬다면 ‘내가 부주의해서’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 상황 아닌가.
현재 정부는 방역과 치료에 온 힘을 다 쏟고 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확진자들이 ‘사회적 낙인’까지 경험하는 것에 대해선 신경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치료해주고 응원해줘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폐를 끼치고 원망하게 만드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마을버스를 통해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한 노동자가 버스의 배차간격이 길어져서 초조해하다가, 확진자 판정을 받은 기사를 원망하게 만드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일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런 세밀한 부분, ‘인권적인 측면’에 대해 한국 사회는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지금 한국에서 코로나가 ‘공포’인 이유는, 감염이 한 사람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무너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을 누군들 견딜 수 있겠는가.
2.
이번 콜센터 감염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생업에 종사하다가 집단감염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느껴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콜센터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된 공간에서, 마스크 없이 일해야만 하는 사업장은 지금도 수없이 많다. 공장, 콜센터, 학원, 음식점 등 좁고 환기가 잘 안되는 곳이라면 전부 코로나에 취약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있던 일자리도 잃는 상황에서, 코로나가 무섭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일매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을 해야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하라’거나 ‘개인위생’을 강조하는 말은 별다른 힘이 없다. 방역 당국이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결국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현재는 대규모 모임이나 예배 등은 자제하고 있는 분위기이므로 앞으로 방역의 ‘약한 고리’는 콜센터처럼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일지도 모르겠다.(혹은 요양시설, 장애인 시설 등)
현실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 어려운 이들이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단체생활을 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약자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을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코로나19로 삶이 위협받는 이들의 입장에 서서 말하고 생각하는 목소리가 외면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