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견이 다르고, 시시각각 말이 달라지는 것 같은가? 마스크만 해도 그렇다. ‘KF마스크를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할 때 ‘~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제와 상황을 이해한 다음에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보릿고개. 굶는 사람에게 죽지 않으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마나한 소리다. 거식증 걸린 사람이라면 충고가 될 수 있지만 말이다. 거식증 환자에게 충고가 가능하다는 말도 맹점이 있다. 거식증 환자가 먹어야 안 죽는다는 걸 모를까? 다 안다. 알지만 안 되는 거니, ‘먹어야 한다’는 말을 해주는 게 아니고 먹을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할 상황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면 마스크를 써도 된다’는 문장의 안쪽에서
면 마스크보다 KF마스크가 코로나19바이러스를 막는 효과가 더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스크 제조 원가가 많이 차이가 난다면야 모르겠는데, 면 마스크가 더 비쌀 수도 있다.
‘면 마스크를 써도 된다.’ 이 문장에는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전제와 사회적 상황이 있다. 이래서 사람들은 헷갈려한다. 면 마스크를 써도 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 말이다.
일반적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 학생들 지도해보는 교사들은 잘 안다. 10일까지 내야 하는 거라면 8일까지 내라고 닦달을 하고 안 내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해도 10일까지 다 들어오지 않는다.
기침을 하는 사람은 코로나19든 일반 감기 바이러스건 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어디 그러던가? 그러니 안 하면 죽을 것처럼 겁을 줘야 들을둥말둥이었다. 담배를 생각하면 쉽다. 경고문구로도 안 되니깐 새까만 폐 사진까지 박아놓는다. 그래도 담배 안 끊는 사람은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 말을 잘 들은 것이다. 과도하게(?) 겁이 난 것이다. ‘과도하다’에도 여러 가지 맥락이 개입된다. 독감 예방주사를 그렇게 맞아라 맞아라 해도 안 맞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KF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니 수요가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요즘은 애들이 많이 커서 응급실 갈 일이 별로 없는데, 애기 때 아이가 열나면 응급실 달려가고 했다. 실은 나는 열이 나도 해열제로 응급처치하고 낮이 되기를 기다리자는 의견인데, 아내를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막 뭐라 해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본다면 그냥 응급실로 직행하는 게 맞다. 문제는 내가 병원 응급실이 과도하게 이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개인적으로야 가는 게 안심도 되고 어떻게 해서든 검사를 다 해주니 정말 만에 하나도 방지할 수 있으니 손해 볼 것 없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구성의 모순이 작용한다는 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생각한다면 KF마스크를 써야 한다. 완벽하진 않아도 마스크 중에서는 비말 전파를 막는 가장 좋은 제품이다. 문제는 경제적 선택에서 가장 성능 좋은 게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것.
개인적인 선택에서 구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면 KF마스크를 쓸 것이다. 가령 내가 KF마스크 생산 공장 사장님이라고 해보자. 하루 몇 만장씩 생산하는 KF마스크 몇 장씩은 빼서 가족들 매일 쓰라고 실컷 줄 것이다. 이 정도는 비리도 아니고 그냥 그러는 거다.
KF마스크를 사기 위하여 약국에서 줄을 선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마스크 산다고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 틈에 들어가는 것이 나에겐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줄 선 사람들을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또 아니다. 왜냐면 심신이 약한 사람,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이 부재한 경우에는 이 세상은 바이러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마스크, 그것도 KF마스크를 사서 써야만 안심이 된다. 단순한 안심 문제가 아닌 사람도 있다. 다중 시설에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마스크 구매 대열에 서야 한다.
나야 다행히 자가용도 있으니 대중교통 안 타도 되고, 집과 학교는 걸어서 5분 거리, 그나마 하루에 만나는 사람의 숫자가 가족과 옆자리 선생님들 빼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손씻기와 기본적인 생활수칙으로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한지 평균적인 지식의 양이 더 높은 편. 어쩌다 만나는 공사 관계자도 면 마스크 쓰고 만나는 정도면 커버 가능하다는 판단.
여기에 더해서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사가면 되지, 하는 일반사회과 교사로서 갖는 사회적 시선. 이래서 나는 KF마스크를 사는 대열에 서지 않는 것. 그냥 면 마스크 사서 버틴다.
정답은 없으나, 바이러스 없이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맥락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 수많은 맥락에서 단일한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무슨 수능 시험 5지선다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공직자의 맥락은 또 다르다. 그들은 1일 생산량 1천만 장이라는 국가적 한계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때그때 새로운 지침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와 전쟁 중인데, 명령이 일관된 메시지로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기대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사람들은 수많은 맥락 속에서 자신의 맥락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가정하는 습관이 있다. 상대방의 결론을 흡집 내긴 쉽다. 상대방 선택이 가져올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면 된다. 그렇다면 내 결정의 우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극단적 케이스가 발생하면 ‘내 그럴 줄 알았어’ 현상이 발생한다. 사람은 일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나 모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예측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면 아마도 지금 위치하고 있는 정치, 경제적 지위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적중률이 조금만 높아도 부자 되기가 매우 쉬운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다를 고만고만하게 산다. 왜냐하면 예측 능력이 다들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23일에 우리는 개학을 할 수 있을까? 정답의 문제가 아니고 합의의 문제이고, 정치적 결단의 문제이다.
교회 폐쇄, 학원 폐쇄, 노래방 폐쇄, 나이트클럽 폐쇄 등등 왜 강하게 정부가 행정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다. 한계 상황에 부딪힌 자영업자의 시선에서 맥락을 보자.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풀로 받고 있고, 그날그날 벌어서 식료품 사고, 월세 내는 자영업자에게는 청천벽력일 것이다.
그들이라고 자신의 목숨값이 소중하지 않은 거 아닐 거다. 그냥 문을 닫고 손님 안 만나면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건장한 사람의 치사율이 1%만 되어도 아마도 자발적으로 문을 닫아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치사율이 그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선택들이 나온다.
정부가 문 닫아걸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래도 먹고살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주장에는 반드시 상황과 맥락이 있기에 그게 반드시 정답인 건 아니라는 것.
닫아걸면 방역은 되는 건가? 혹여 그로 인한 경제적 폐해가 사람을 더 죽일 수는 없는 건가? 이런 질문이 필연적으로 나온다. 한계 상황에 부딪힌 자영업자의 정답은 또 다를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그 모든 맥락과 정보를 수합한 정부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뾰족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이 글도 정답을 내놓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서운 게 아니라, 매출액 제로의 장부가 더 무서울 수 있다는 면은 생각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서다.
원문: 전대원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