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주: 카를로 안첼로티는 AC밀란, 첼시, 파리생제르망, 레알마드리드의 감독을 모두 맡아본 톱레벨 감독이지만 유럽 축구팬이 아니면 그의 이름을 잘 모를거다. 첼시 시절 TV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전임자인 무리뉴의 세련되고 카리스마있는 모습과 대조됐다. 멍해보이고 억울해보이는 표정. 통통한 배. 추리닝 차림 등등.
근데 저게 다 계산일 수도 있다. 안첼로티야말로 감독계의 능구렁이라는 얘기다. FT의 사이먼쿠퍼가 지난 1월 안첼로티를 인터뷰하고 냈던 기사다. 보통 유능한 감독이라도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팀에 가면 결과가 좋지 않기 마련인데 안첼로티는 어딜 가도 평균 이상은 한다. 팀을 옮겨다닐 때마다 귀신같이 그 팀과 스타 플레이어들, 그리고 팀 소유주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능글능글하게 대처한다.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의 실천자이면서 또 처세의 달인이다. 짤리면 짤리는 거지 뭐, 우승하면 하는 거지 뭐,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한다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번역해서 소개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이제야 짬이 좀 나서 글을 올린다. 자기 사업을 하는 사업가가 아니라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라면 이런 마인드도 필요해보인다. 회사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파악하고 그걸 전달해주려 노력하되,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월급장이는 월급이 아무리 많아도 자리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일 그 자체를 즐긴다면 하루 하루 하는 일의 성공과 실패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January 17, 2014 12:01 pm / Interview: Carlo Ancelotti
By Simon Kuper
“난 파워가 세요.” 레알 마드리드 감독, 카를로 안첼로티는 웃었다.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침 여섯시에 훈련! 밤 열한 시에 훈련! 이런 것도 가능하죠. 하지만 난 억지로 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선수들이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를 이해시키려는 스타일이에요. 대신 시간이 좀 더 걸리죠.”
우리는 마드리드 북쪽에 있는 깔끔한 새 훈련장 감독 사무실에 앉아있다. 그는 하늘색 마드리드 추리닝 밖으로 배가 볼록 나와있고,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다. 안첼로티는 작년 여름에 이 팀을 맡았다. 4년 동안 4개국을 거친 셈이다. 이전엔 AC밀란(이탈리아), 첼시(영국), 그리고 파리 생제르망(프랑스)에 있었다. 안첼로티는 무리뉴나 아르센 뱅거같은 동급 감독들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상복은 좋았다. 현재 그의 임무는 레알마드리드를 열번 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것이다.
안첼로티는 글로벌 위기 관리 전문가라고 불러도 좋다. 그보다 슈퍼스타들을 잘 다루는 사람도 없고 까다로운 클럽 회장, 구단주를 잘 다루는 사람도 없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로만 아브라모비치까지 겪었다. 또 그는 히스테리칼한 언론도 잘 다룬다. 그만의 ‘나이스가이’식 경영 비법을 알아보자.
……
세계 최고의 부자 축구클럽. 훈련장 안쪽은 조용하다. 시끄러운 일들은 게이트 바깥쪽에서만 벌어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본관 건물은 거의 비어있다. 감독 사무실에는 안첼로티의 아들이자 사무직원인 다비드가 핑크색 이탈리아 신문을 읽고 있다. 주변을 둘러싼 산과 언덕은 겨울답게 갈색을 띄고 있지만 창문 바로 앞에는 십 수명의 직원들이 연습장의 푸른 잔디를 가꾸고 있다. 내가 방문한 전날, 안첼로티는 50명의 직원들을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밥을 샀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줄 아는 남자다.
안첼로티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돌리고는 자리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핸드폰이 수도 없이 울리지만 받지 않는다. 유창하진 않지만 대화엔 지장없는 정도의 영어실력으로 천천히 얘기하면서, 또 가끔씩 녹색 펜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침착하게 대화를 한다.
안첼로티는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지방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 ‘카를레또’라고 불렸던 그는 성인이 된 이후 항상 긴장감 가득찬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는 이탈리아식으로 영리한 미드필더였다. 또 1980년대 AS로마에서 그를 지도했던 스웨덴인, 닐스 리드홈을 비롯한 여러 코치들로부터 리더십을 배웠다.
“북부 지방에서 경기가 있을 때도 비행기를 못탔어요. 감독님이 비행기를 무서워했거든. 로마에서 밀란까지 기차를 타야 하는데 기차 출발 시간이 자정이에요. 근데 리드홈은 일찍 자러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9시30분에 기차를 타서 10시부터 잠을 자요. 선수들은 자정에 딱 맞춰 기차를 타고 잠은 아예 안 자죠. 경기준비로는 최악인거죠.” 경기당일엔 킥오프 몇 시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해 락커룸에서 시간을 때웠다.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리드홈은 팀닥터들에게 농담 좀 해주라고 시키곤 했다. 이제 본인이 감독이 된 안첼로티는 직접 농담을 건내는 역할을 맡는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직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탑 레벨 축구의 비밀 하나를 알고 있다. 이런 레벨의 선수들은 열심히 뛰라고 따로 동기부여해 줄 필요가 없다. 반대로 진정시켜줘야할 필요가 있다.
리드홈은 안첼로티에게 선수들을 성인으로 대하라고 가르쳤다. 그 반대였던 감독들도 있었다. “내가 겪어본 감독 중에는 ‘내가 하라고 했으니까 그냥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난 그게 이해가 안 됐어요. 나는… 아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아, 권위주의적이 될 수는 없어요”
1987년, 안첼로티는 28세였지만 이미 무릎이 망가진 상태였다. 밀란의 감독이었던 아리고 사치는 안첼로티를 로마에서 데려왔다. 사치는 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달리기도 느리고 뛰어난 기술도 없지만 축구 지능만은 높은 미드필더의 역할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지능적인 선수는 미드필더에요.” 안첼로티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지도한 선수 중에서 예를 든다. “피를로, 사비 알론소, 티아고 모타, 디디에 데샹. 다 미드필더잖아요.”
안첼로티의 두뇌를 통해 밀란은 오케스트라같은 공격 축구를 구사하며 두 번의 유러피언컵을 들어올렸다. ‘Grande Milan’이라고 불리던 시절이다. 그는 1992년에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처음엔 사치에게 배운 4-4-2 전법만을 썼다. “내 경험에 따르면 4-4-2는 축구를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사치가 이탈리아 대표팀을 맡자 안첼로티는 그의 수석코치가 됐다. 그 다음은 고향팀인 레지아나를 맡았다. 작은 클럽이었지만, 처음 감독직을 맡은 안첼로티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느꼈다. “3, 4년만 하고 쉬자 싶었죠.” 그는 웃으면서 리드홈이 했다는 말을 알려준다. “축구감독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에요. 경기 있는 날만 빼면.” 그래도 안첼로티는 스트레스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갔다. 이제 그는 “지진이 와도 내 엉덩이는 꿈쩍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할 정도가 됐다. 감독을 하다보면 언제 쫓겨날 지 모르지만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이젠 경기 자체도 즐기면서 본다.
레지아나 다음엔 파르마를 맡았다. 당시 그는 ‘신성한 포니테일’로 불리던 로베르토 바지오와 계약할 기회를 잡았다(역자 주: 중학교 때 내 우상이었다). 바지오는 10번, 즉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길 원했다. 사치 식 4-4-2 축구엔 없는 포지션이었다. 안첼로티는 회상한다. “난 이렇게 말했어요. ‘안돼. 자네는 스트라이커를 맡아야돼.” 결국 바지오는 다른 클럽, 볼로냐와 사인했죠. 그 해 바지오는 22골을 넣었어요. 난 그 22골을 잃어버린 거죠. 큰 실수였어요.” 이 사건은 안첼로티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어떤 시스템도 선수들보다 중요하진 않다. 변화야말로 그의 신념이 됐다.
그는 유벤투스를 거쳐 AC밀란의 감독도 맡게 됐다. AC밀란은 이탈리아 총리이자 재벌총수인 베를루스코니의 소유였다.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클럽의 감독이 된다는 건 베를루스코니를 감독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안첼로티는 자서전에서 베를루스코니를 묘사할 때면 항상 대문자 H를 써서 He라고 썼다. 그는 그만큼 독특한 인물이었다. 안첼로티는 핵심을 파악했다. 베를루스코니가 밀란을 소유했으니 감독의 임무는 베를루스코니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잘 했다. “밀란의 전통은 멋진 축구를 하자는 거에요. 유벤투스와 다르게 하는거죠. 유벤투스에서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승리거든요.” 이런 상황에 맞게 안첼로티는 아주 공격적인 라인업을 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피를로, 시도로프, 루이 코스타, 카카, 셰브첸코를 한꺼번에 기용한 거에요.” 또 하나의 발견이었다. 어떤 시스템도 클럽 회장보단 중요하지 않다는 것.
많은 감독들은 구단주의 참견을 싫어한다. 그러나 안첼로티는 베를루스코니가 락커룸까지 들어오도록 내버려뒀다. 2003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유벤투스와 붙었을 때는 심지어 경기직전 작전회의까지 참여하도록 허락했다.
“포메이션하고 작전을 적은 종이를 선수들에게 나눠줬더니 베를루스코니도 한 장 달라 했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보니 베를루스코니는 그게 자기 작전이라고 했다더라.” 안첼로티의 자서전에 나오는 얘기다. 이젠 웃으며 하는 얘기지만 실제로 베를루스코니를 즐겁게 해주는 건 자신의 경력 관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다행히 그날 밀란은 유벤투스를 승부차기끝에 이겼다. 안첼로티는 챔피언스리그를 선수와 감독 자격으로 모두 우승해본 여섯 명 중 한 명이 됐다.
……
2005년 이스탄불에 있었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리버풀에게 잊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한다. 하프타임까지 3대 0으로 이기던 밀란은 후반 세 골을 내주고 승부차기에서 졌다. 하지만 그날 밤 안첼로티는 호텔 바에 나와 친구들과 활기차게 수다를 떨었다. 그는 그의 할 일을 완수했다. 이제는 쉴 시간이다. “돌아보면 우리 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러니 화를 낼 수가 없었어요.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축구는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만 가장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는 이스탄불의 뼈아픈 패배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다 말한다. “상대팀이 6분 동안 세 골을 넣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너무 빨리 일어난일이라 뭘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감독일을 하게 된 이후 800 경기를 치뤘어요. 그 중에서 우리 팀이 진짜 진짜 잘 한 경기를 두 개만 꼽아보라 한다면 그날의 경기가 들어갈거에요.”
2007년 밀란은 다시 결승에 올랐다. 먼저 결승에 친출한 밀란 선수들은 훈련장 한 편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모여서 다른 조 준결승에서 첼시와 맞붙은 리버풀을 응원했다. “우리 선수들은 첼시에 대고 소리지르고 야유했어요. 리버풀 모자와 리버풀 뿔피리까지 가져왔어요.”
응원빨은 먹혔다. 리버풀은 첼시를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그래서 아테네에서 있었던 결승전에서 밀란은 이스탄불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리버풀을 2대1로 이기고 우승한 것이다. 그날 밤 안첼로티와 선수들은 밤새도록 농담을 하며 놀았다. 그 날의 승리를 영원히 그들의 마음 속에 새겨놓기 위해서였다.
밀란은 다국적 팀이었다. 안첼로티는 세계 곳곳에서 온 선수들을 지도하는 법을 배웠다. 선수들과 농담을 나눠야 할 때는 이렇게 했다. “우선 이탈리아인 선수들에게 이탈리아말로 농담을 하구요, 그 다음엔 브라질 선수들에게 포르투갈어 비슷한 이탈리어로 같은 내용을 설명하구요, 그 다음엔 베컴 차례에요. 손짓발짓으로 베컴에게 설명해주다 보면 짜증이 납디다.”
안첼로티는 밀란에 영원히 남고 싶었지만 베를루스코니가 팀의 예산을 줄였다. 성적은 하락했다. 2009년 금융위기가 이탈리아를 강타하자 안첼로티는 전문직종 종사자들의 엑소더스에 가담했다. 첼시의 소유주인 아브라모비치가 안첼로티의 용병술과 전략을 높게 산 것이다.
안첼로티는 기억한다.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이러더군요. ‘첼시 경기를 보면 첼시인지 뭔지 모르겠소. 정체성도 없고 스타일도 없소.'” 다시 말해 안첼로티의 임무는 첼시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란 얘기였다.
런던 생활의 유일한 단점은 언어였다. “말하기도 어렵고, 감정을 담기도 힘들어요. 그래도 팀은 구성이 잘 됐어요.” 첼시는 2010년에 프리미어리그를 우승했고 바로 포츠머스와의 FA컵 결승전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기면 이전까지 첼시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더블’ 우승을 달성하는 거였다.
……
결승전 직전. 안첼로티는 희한한 일을 했다. 11명의 라인업 이름을 불러준 다음, 그들에게 경기 전략을 알아서 짜라고 내버려둔 것이다. “각자 한 가지씩 말하더군요. 예를 들어 골키퍼 체흐는 ‘역습을 주지 말아야 돼. 뒷 공간을 조심들 해’라고 말했어요. 그 시즌에 우리는 60경기를 뛰었었고 그 말은 내가 60번의 작전 지시를 했었단 애기죠. 내 생각에 그 정도면 선수들이 뭘 어떻게 해야할 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이해했을 거에요.”
그래도 왜 하필 그런 중요한 경기에서 모험을 했을까? “선수들이 직접 전략을 짜니까 자기들이 짠 전략을 잘 따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전략을 짜주면 선수들이 진짜로 그걸 이해했는지 모를 때도 있거든요. 내가 한 말을 따라해 보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첼시는 포츠머스를 1대 0으로 누르고 더블을 달성했다.
안첼로티는 전략적으로 유연하다. 자존심도 크지 않고 소박하다. 그는 자신을 무리뇨와 대비하는 걸 좋아한다. 2010년 안첼로티가 이끄는 첼시는 무리뉴가 이끄는 인터밀란(인테르)와 맞붙었다. 안첼로티의 회고록에 나오는 얘기다. “우린 산시로 경기장 복도에서 만났다. 그리고 합의했다. 이제 싸우지 말고 논란도 만들지 말자고. 딱 여섯 마디, 그리고 악수 한 번으로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첼시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했을 때 무리뉴는 안첼로티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샴페인.” 인테르가 이탈리아 리그를 이겼을 땐 안첼로티가 문메를 보냈다. “샴페인, 적당히.”
그렇긴 해도 안첼로티는 자서전에서 무리뇨를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놀린다. “위대한 소통가, 모든 걸 아는 남자, 기자회견의 제왕, 딴지걸기의 달인, 더 스페셜 코치” 등등. 반면 자기 스스로는 다음과 같이 소박하게 묘사한다. “만두처럼 생긴 뚱보가 온다!”
첼시는 감독이 오래 갈 수 잇는 팀이 아니다. 2011년 파리 생제르망을 사들인 카타르 구단주가 안첼로티를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여기서 또 그는 새로운 유형의 국민성을 발견한다. “영국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어려운 점은 훈련할 때마다 항상 100%의 힘을 쏟지는 않아도 된다는 걸 이해시키는 거였어요. 어떤 훈련 세션의 경우는 그렇게 힘을 다 빼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프랑스 애들은 100%를 해야하는 날에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 못하더라구요.”
프로답지 않은 팀이었다. “생제르망은 좋은 경험이었어요. 무에서부터 팀을 만드는 일은 내 경력에서 처음이었거든요. 첼시나 레알 마드리드처럼 이미 좋은 조직과 좋은 선수들을 갖고 있는 클럽에 오는 것과는 다르죠. 생제르망에서는 아주 낮은 레벨에서부터 모든 걸 만들어나가야 했어요.” 그는 ‘낮은’ 이라는 말을 하면서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문질렀다. 바닥이란 뜻이다. 과거에 거쳐온 몇몇 클럽에서는 그는 너무 선수들을 풀어준다고 비난받곤 했을 정도다. 하지만 생제르망에선 그는 모든 일에 간섭했다.
인종적으로 파가 갈리는 게 문제였다. “남미 출신들, 프랑스 애들, 이탈리아 애들 등이 있었죠. 관계가 쉽지 않았어요. 남미 애들은 자기들끼리 플레이하길 좋아하고 이탈리아 애들도 마찬가지죠. 승자의 멘탈을 가져본 적도 없었어요. 훈련은 오전 11시에 시작했죠. 선수들은 10시 30분이 되어서야 도착하는데 그러고 있다가 12시 30분이나 1시가 되면 집에 가요. 이런 분위기를 바꾸는 건 쉽지 않죠. 또 ‘훈련이 끝난 다음에도 잘 먹고, 잘 마시고, 푹 쉬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것도 어려웠어요. 다행스럽게 즐라탄 이브라모비치가 있었어요. 최고의 프로정신을 갖고 있는 선수죠. 항상 집중력을 보이는 선수라 훈련장에서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됐어요. 결과를 내는데 까지는 6개월이 걸렸죠.” 2013년 생제르망은 프랑스리그를 제패했다. 1994년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고나서 바로 안첼로티는 마드리드로 떠났다.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인 페레즈가 수 년 동안 그를 꼬셔왔던 거다. “카를로, 언젠간 우리 팀 감독이 되어줄꺼지?” 2006년에도 계약까지 했었지만 밀란이 놓아주지 못해서 마드리드에 가질 못했다. 드디어 작년 여름에서야 때가 왔다. 마드리드는 무리뇨의 해독제가 필요했다. 포르투갈인 무리뇨는 이전 3년간 레알을 맡으면서 자신의 스타일인 수비형 축구를 강요해왔다. 또 자존심 센 선수들을 억눌러왔다.
그 옛날 산시로 경기장에서 맺었던 신사협정 대로, 안첼로티는 무리뇨를 비판하진 않는다. 대신 자신의 임무를 얘기한다. “목표는 약간 다른 축구를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 클럽의 문화라는 게….”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잠시 망설이다 말한다. “폼나는 축구거든요. 여기 서포터들은 아주 욕심이 많아요. 역습이나 하는 축구는 보기 싫어해요. 이 사람들은 팀이 완전히 경기의 주도권을 갖고 지배하는 걸 좋아해요. 나는 이런 클럽의 전통과 역사를 따르고 싶어요.”
유명 클럽들 사이에서 안첼로티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일반적으로 빅 클럽 감독들은 자기 에고도 강하지만 안첼로티는 주변 환경에 스스로를 맞추는 데 스스럼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나라에 갈 때마다 그는 약간식 스타일을 바꿨다. “영국의 팀들은 일반적으로 수비 전술 능력이 떨어져요. 프랑스 팀들은 육체적으론 강인한데 아프리카 선수들이 많죠. 스페인 팀들은 즐기면서 축구를 하구요. 이런 차이점들에 대해서 방법론을 달리 가져갈 필요가 있어요.”
나라가 바뀌면 그에 맞게 전술도 바꾸란 얘기는 뻔하게 들린다. 하지만 많은 선수들과 감독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쉽지 않아요. 잉글랜드를 떠났던 선수들을 보세요. 이안 러시, 마이클 오웬.” 웨일즈 출신의 스트라이커 이안 러시는 1988년 이탈리아로 진출했다가 1년 만에 돌아오면서 “마치 다른 나라 같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마이클 오웬 역시 레알 마드리드에 왔지만 영국 음식과 영국 날씨에 대한 향수병을 앓다가(ㅋ) 1년 만에 돌아갔다.
그렇다면 가레스 베일은 마드리드에 얼마나 적응하고 있을까? “베일은 별 문제가 없어요. 워낙 겸손한 친구에요. 요구하는 것도 많지 않아요.” 스페인어 문제는? “조금씩 말을 트고 있어요. 그 친구가 경기장에서 편안하게 느끼도록, 팀 동료들과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는 게 내 일이에요. 영어를 할 줄 아는 선수들이 많아요.”
베일을 돕는 사람 중 하나가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다. 마드리드 최고의 선수지만 쉬운 타입은 아니다. 호날두는 마드리드가 자기 방식대로 경기하길 원한다. 안첼로티는 호날두같은 빅 스타를 어떻게 지도할까? “내게 있어서 이건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문제에요. 호날두를 다루는 건 카르바얄이나 모라타 같은 주니어 선수들을 다루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사실 슈퍼스타들은 다루기가 더 편해요. 왜냐면 다른 선수들보다 더 프로답거든요. 호날두는 진짜 프로에요.” 안첼로티는 볼을 빵빵하게 하면서 이 말을 강조한다. 일일히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고맙단다. “난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감독하고 싶진 않아요. 난 선수들의 아버지도 형제도 아니에요.”
사실 현대의 축구 선수들은 예전보다 훨씬 프로답게 행동한다. 안첼로티가 뒤던 1980년과 비교해보면 현대의 선수들은 좀 더 자신의 사생활 관리를 잘 한다. 파스타도 적게 먹는다. 80년대엔 어땠을까? “경기 전날 호텔에 도착하면 우린 원하는 거 아무거나 메뉴에서 골라 먹을 수 있었다니까요! 식단 조절이란 개념이 없었어요. 내가 선수하던 시절엔 최고의 훈련이란 다음날 일어났을 때 다리가 쑤시는 훈련이었어요. 계단을 못 올라갈 정도로 고통스러우면 바로 그게 환상적인 훈련이었구나!라 생각했었죠.” 그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웃는다. 현대의 축구선수들은 훈련장에서 GPS 장비를 달고 뛴다. 피지컬 트레이너들은 각 선수에게 매일 매일의 훈련량을 조절해준다.
안첼로티에 따르면 프로정신이 투철한 선수들은 감독과 잘 다투지도않는다. 같이 일하기 어려웠던 선수가 있느냐, 같이 일하기 싫었던 선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담배를 뻐끔 피면서 ‘아니요’라고 답한다. 마드리드 선수들은 순종적이고, 또 경기 도중에 포메이션을 바꿔도 쉽게 적응할 정도로 똑똑하다. “톱 클라스 선수들은 이해력도 빨라요.” 사비 알론소는 특히 필드 위의 코치 역할을 한다.
마드리드는 이런 환상적인 선수들을 갖고 있다. 스포츠 역사상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클럽이기도 하다. 작년 매출은 7000억 원을 넘겼다. 그런데 왜 2002년 이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못해봤을까? 안첼로티는 웃으며 대답을 피한다. “나도 몰라요. 우리도 궁금해요. 10년 동안 결승전에 못 올라갔어요. 좀 이상한 일이죠. 그래도 3년 연속 준결승에는 갔어요. 그 정도면 나쁘진 않죠.”
10번째 우승, ‘라 데시마’를 노린다는 점에서 이런 기다림은 더욱 길게 느껴진다. 아, 그리고 레알은 스페인 리그도 우승해야 한다. 현재 순위는 고작 3위다. 이런 매일 매일의 스트레스를 안첼로티는 어떻게 이겨낼까? “난 이쪽 세계에서 경험이 많아요. 결가가 좋지 않을 때도 그렇게 기가 죽지 않고, 반대로 결과가 좋을 때도 아주 기쁘지도 않아요. 내 어깨 위에 그다지 많은 압력을 느끼진 않아요. 이 일을 좋아하니까 그래요. 감독에게 압력이란 당연한 거죠.”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안내데스크로 나를 안내한 후 택시를 불러줬다.
신체 사이즈나 조용한 성격 면에서 안첼로티는 마드리드의 전 감독이었던 히딩크와 많이 닮았다. 히딩크는 스페인에서 감독이 쫓겨나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여기선 쫓겨나는 게 수치가 아니에요. 이런 식입니다. 클럽 회장이 불러서 들어가면 그가 ‘선생님, 이제 그만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는 한 번 꽉 껴안아 줍니다. 다음날 총무팀에 가면 수표를 끊어주죠. 수표를 갖고 은행에 가면 슈트케이스에 빵빵하게 현금을 채울 수 있죠. 한 방에 대박! 스페인에선 죽는 것도 로맨틱해요.”
안첼로티도 결국엔 그렇게 쫓겨날 것이 확실하다. ‘라 데시마’를 달성한 후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러기 전일 것이다. 그래도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을 거다. 그저 나중에 고향 친구들과 이태리식 만두를 먹으면서 나눌 수 있는 얘깃거리가 될 뿐이다. 그리고는 또다른 탑 클럽에서 감독직을 맡을 거다. 일류 감독중에 이렇게 국제적이면서 성격 좋은, 호날두서부터 베를루스코니까지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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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첼시 임원이 보는 안첼로티 리더십의 특징
● 서번트 리더십. 전략과 비전을 세우는 과정에 모두가 참여하도록 한다. 따라서 모두가 책임감을 갖게 되고 감독을 따르게 된다.
● 남의 얘기를 잘 듣는다. 중간에 말을 막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는다. 침착하고 사려깊다. 선수들은 안첼로티와 얘기하길 즐기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안첼로티는 이 정보를 갖고 좀 더 효율적으로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다.
● 심각한 상황이더라도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다. 다른 이들마저 스트레스 받는 걸 막기 위해서다.
● 성공한 감독들은 대부분 자신들만의 팀 운영 모델이 있다. 과거에 성공한 경험이 있으므로 변화를 싫어하는 게 당연한다. 하지만 안첼로티는 항상 겸손하며 호기심이 많다. 새로운 걸 배우고 거기 맞춰가는 걸 즐긴다.
원문: indi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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