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를 몰아낸 지난 리비아 혁명을 보면 여러모로 5.18 광주 민주화 항쟁과 비슷한 면이 많다. 혁명이 일어난 벵가지란 도시 역시 여러모로 광주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호남도 곡창지대로 옛 백제 이후 한반도에서 제일 잘사는 지역이었듯, 벵가지도 원래 리비아에서 매우 번영한 도시였다. 하지만 카다피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은 반골 동네로 찍혀서, 경제개발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또 그간 사람들이 감히 카다피에게 저항할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대형 시위가 없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너무 무서워서 다들 알아서 기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그랬듯 리비아 사람들도 별 불만 없이 지내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아랍의 봄’을 통해 시위로 정권을 쓰러트려본 전례가 이웃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생기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몇십년 동안 꼼짝 못하던 사람들을 저항하게 만들었다.
무척이나 잔인했던 카다피 정권의 유혈 진압
그러나 그 결과는 탱크와 공군 전투기를 동원한 유혈 진압이었다. 리비아군 공군 파일럿 한 명이 시위대 머리 위로 폭탄을 떨어뜨리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지중해 말타 섬으로 비행기를 돌려서 망명한 사건마저 있었을 정도의 강경 진압이었다. 그래서 UN에서 군사개입이 논의되는 시점에서 이미 유혈진압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육박했다.
런던정경대에서 시민사회론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는 “시위 하는 놈들은 다들 테러리스트, 이슬람 원리주의자, 알카에다입니다! 다들 쥐새끼들이니까 죽여없애야해요! 이들은 미국과 서방의 적이기도 합니다! 서방은 우리 편을 들어야 해요!” 라고 인터뷰를 했다. (참고로 그는 영국에서 돈 씀씀이가 후해서 인기가 많았다. 카다피 가문의 재산이 빌 게이츠 재산의 4배가 넘는다고 하니 그럴 수 밖에.)
그렇게 시민군과 카다피군과의 전투가 몇달이 계속되었는데, 사실 리비아군의 상당수는 여기에 개입하지 않거나 이탈해서 시민군에 합류했다. 카다피가 마치 하나회 같이 군대 안에 옥상옥 조직을 만들고, 모든 지원을 이들에게 몰아줘서 나머지 군대를 완전히 찬밥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미스 여단 등 카다피 친위 부대를 제외한 정규군 조직은 그냥 흩어져서 증발해버리거나 아니면 시민군쪽으로 붙어서 정부군과 시민군의 대결이라기보단 카다피 친위대 vs 시민군+비주류 정규군의 대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자원을 독점해온 카다피 친위부대들의 전투력이 압도적이어서, 리비아 전역을 휩쓸 기세였던 시민군은 곧 하나하나 도시들을 카다피군에게 내어주고 혁명이 시작한 본거지였던 벵가지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의 고민: 자국 국민 탄압에 군사개입의 논리가 있는가
그 와중에 몇 달이 흘렀는데, 그 동안 국제사회는 카다피를 멈추는데 전혀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석유 금수 조치를 내려서 리비아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지만, 카다피가 거기에 까딱할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경제제재만으론 카다피를 멈출 수가 없었고, 결국 군사개입이 아니면 도저히 벵가지를 향한 카다피군의 진격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다들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역으로 세계경제에의 타격이 군사개입의 동기 중 하나가 된다. 경제제재는 리비아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커다란 타격이었다. 리비아 석유 수출 금수 조치로 석유 수입국들도 다들 괴로운데, 금수 조치를 해제할 명분이 없었다. 카다피는 계속해서 시민들을 학살했고, 선진국은 최대한 신속하게 카다피를 제거해야 석유 금수 조치 해제가 가능하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기존에 UN에서 국가의 자위권을 위해 여러차례 군사적 개입을 한 선례가 있다. 그런데 이건,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일 때 해당이 되었지, 어느 나라가 자기 나라 국민들을 공격해서 죽일 때 자위권을 위한 군사개입이 정당화된 경우가 없었다.
즉, 기존의 자위권은 국가주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외침으로 국가주권이 위협받지 않는다면 그 나라 국민들이 자기 나라 정부에 의해 위협 받더라도 그건 외부에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즉, “국가의 주권은 심지어 그 주권이 자기 나라 국민을 죽이는데 사용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논리가 강했다.
따라서, 리비아 같이 “외국을 침략해서 외국 국민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나라 정부가 자기나라 국민을 죽이는 경우에도 과연 자위권 행사를 위한 군사개입이 정당화되느냐? 이게 2차대전 이후 확립된 국가주권에 대한 국제적 원칙에 부합하는 거냐?” 라는 논쟁이 치열했다. 영국에서는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에서 리비아 군사개입의 정당화를 두고 양쪽으로 팽팽히 갈려서 논쟁을 벌였다.
이때 보면 “이라크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 리비아의 내정문제에 무력으로 개입하면 안된다!”라는 의견과 “가만히 내버려두면 벵가지가 함락되게 되고, 그러면 카다피가 대대적인 숙청을 벌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거다!”라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시청 점령 직전 국제사회의 고민: 카다피를 무너뜨려도 실익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카다피군이 벵가지를 조여오고, 매일 벵가지 시내가 폭격받는 데다가 이미 카다피 탱크가 벵가지 시청까지(마치 광주 도청 전투마냥!) 육박해왔다. 카다피 아들이 “쥐새끼 폭도 놈들을 다 없애버릴거다!”라고 한 말이 곧 현실로 다가올 거란 불안감이 점점 더 여론을 군사개입에 호의적인 쪽으로 바뀌게 했다. 그래도 끝까지 군사개입 지지여론이 확고한 다수가 되지는 못한 이유는 이라크에서의 트라우마가 워낙에 컸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도 벌이고 막 그랬는데, 좀 반미성향인 유럽 친구가 “미국은 언제나 탐욕스러워! 미국과 서방이 정말 순수하게 인도적인 동기로 군사개입하자 그러는 거 같아? 그건 다 핑계고 이건 다 위선이야! 그래서 난 반대야!”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반대한다고 하는 사람들 꽤 있었다.
난 이런 논리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개입하는 동기가 위선적이든 아니든, 진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하든 속이 시커먼 능구렁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 어쨌든 카다피군이 벵가지를 점령하고 나면 대숙청이 벌어질 텐데 그걸 막기 위해서라면 석유이권이든 뭐든 그 어떤 불순한 동기를 가졌든 어쨌든 미국 등이 군사개입을 하는 걸 반대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반대가 아니라 “아무리 좋은 목적으로라도, 심지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군사개입이라는 잘못된 수단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런 식의 반대 논리에는 나도 공감한다. 그런데 단순히 미국이 나쁘니까 미국 개입에 반대한다는 논리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미국과 서방이 정말 위선적인 거 맞다! 근데, 그래서 어쨌단 건가?
사실 당시에도 카다피는 계속 서방에 러브콜을 보냈다. 카다피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는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의 진정한 친구인데 서방이 자기를 오해해서 이런 파국이 생긴 것이며, 서방은 자기들의 진정한 친구를 무너뜨린걸 후회할거라 말했다.
어차피 서구는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려도 별로 실익이 없는데다, 잘못하면 이라크전의 수렁이 재현될 거란 공포 때문에 미국도 영국도 군사개입을 매우 꺼려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다피는 그 동안 과거 반미.반서방에서 친미.친서방으로 전향한 모범적인 사례로 칭송을 받아 왔다. 그동안 미국 등은 “너희들 카다피 반만 본받아라!”라고 하고 다녔고, 북한한테도 “카다피 좀 닮아봐!”라고 해왔었기 때문에 매우 곤욕스러운 상황이었다.
사르코지의 역습: 순식간에 이뤄진 군사개입
이렇게 어느 쪽으로도 다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가끔 미친 무대포인 놈이 나타나서 확 결정을 내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바로 그 무대포역이었다. 당시 사르코지는 사회당의 대선주자인 스트라우스 칸에게 차기 대선 여론조사에서 두 자리수로 뒤지고 있어서 재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상황이었다. 사르코지가 사회당의 스트라우스 칸 (당시 IMF 총재)를 꺾기 위해선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했다.
물론 이유가 단지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 외교기조 자체가 과거 자국 식민지였던 튀니지 등의 아랍 독재정권과 과거 유착했었다는 흑역사 때문에, 아랍 대중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대한 민중의 편으로 보이도록 모든 일을 다 해야한다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절박한 상황인 사르코지는 “군사개입 Go!”를 외치고, 프랑스의 모든 외교력을 총동원해서 UN의 리비아 결의안에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해석될 수 있는 문구를 삽입시키는데 성공한다. 물론 군사력을 사용한다고 명시한 게 아닌데, 군사력을 배제한다는 말은 빠지게 해놨다. 이걸 최대한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군사개입이 이뤄지게 된다.
프랑스는 미친 듯 총력 외교로 이라크 트라우마로 머뭇거리던 미국과 영국을 부추기고 러시아와 중국도 설득해서 러시아와 중국도 안보리 표결에서 기권하게 유도하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리비아 군사개입이 “사르코지의 전쟁”, 또는 “사르코지 재선 작전”으로 불리게 됐다.
이 와중에 유럽에서 간을 제일 잘 보는 걸로 유명한 메르켈은 “기권한다는 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면서 결의안에서 기권했다. 독일 친구 말로는 이런 애매한 말을 하면서 유불리를 따져서 간보는 걸 보고 독일에선 메르켈리즘이라고 한다고 한다.
벵가지 시청이 함락되기 직전의 절묘한 상황에 초스피드로 모든 게 처리 돼서 군사개입이 시작됐다. 그런데 처음에는 다들 비행금지구역만 설정되는 걸로 생각하고 UN결의안에 폭격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리비아 시민군들은 “외세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 모두 우리 스스로 할 거다.”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행금지 구역 만들어서 공군만 막아주면 우리가 외국 도움 없이 할 수 있다!”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제발 카다피 탱크도 좀 막아줘요!”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과연 UN결의안에 지상공격이 포함되는지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미국과 영국 공군은 아직 카디피군 지상군을 폭격할지는 결정을 못 내린 상황인데, 프랑스 공군이 닥치고 카다피군 탱크를 폭격해버렸다. 도심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폭약을 빼고 시멘트를 대신 부어넣은 콘크리트 폭탄으로 폭격을 가했다. 당시 프랑스측 논리는 “비행금지 구역이 딱 비행만 금지한단 뜻은 아니지 않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벵가지 시청이 함락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영국도 따라서 카다피 지상군 공격을 하게 되었다.
혁명의 성공, 계속되는 혼란
그리고는, 시민군들의 반격과 함께 카다피군이 이미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소식에 리비아 각지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면서 결국 카다피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까지 확대된 시민봉기로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게 되었다. 결국, 시민들에게 들켜서 곧바로 현장에서 수십 명에게 구타당하고 죽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카다피는 돈을 꺼내면서 “나를 도망가게 해주면 당신들 전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주겠다!” 고 설득했으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그 말 그냥 무시하고 계속 구타했고, 시민군 장교가 와서 죽이지 말고 생포해야 한다며 말리려고 했으나 도대체 사람들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카다피는 그대로 맞아 죽었다.
카다피를 죽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르코지는 카다피에게 정치자금을 받았던 사실이 폭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뤘다. 당시 리비아 개입을 다들 망설인 이유가 카다피가 자기한테 돈 받은 서방측 정치인들 리스트 폭로하겠다고 카다피 리스트로 협박해서란 카더라도 있었다.
참고로 사르코지는 전쟁까지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실정을 만회하는데는 역부족…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도 스트라우스 칸을 앞지르는데는 결국 실패했다. 나중에 소피텔 호텔 사건으로 스트라우스 칸 제거에 드디어 성공하나, 아무도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올랑드한테 져버렸다. 결국 사르코지 재선 작전은 실패.
리비아에는 새로 정부가 들어섰으나, 아직 각지에서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정부는 바뀌었으나 카다피 정권 시절의 고위 관료가 대부분 그대로 자리를 계속 차지했고, 반면 시민군으로 싸웠던 사람들은 치열한 전투 와중에 집도 직장도 파괴되어버려서 원래 일하던 생업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혁명 전에는 군인이 아니었으나 원래 일자리가 다 파괴돼 버려서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가기가 힘들게 돼버린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과거 카다피 정권하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은 계속 잘 살고, 하던 일 접고 목숨을 걸고 시민군으로 싸웠던 사람은 생업 터전이 파괴돼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더욱 어렵게 산다!”라고 사람들이 분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거 시민군으로 싸웠던 사람들이 “순교자들을 모독하지 말라!”라면서 무기를 들고 정부 청사 앞으로 몰려와서 “카다피 정권 시절 사람들 다 몰아내라! 시민군으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게 보상하라!”라고 구호를 외친 사건도 있었다.
어쨌거나 광주에서도 도청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지만, 외부의 개입은 풍문으로 끝났다. 리비아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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