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와 가짜뉴스의 시대
가짜뉴스의 시대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가짜뉴스를) 정부가 단호한 의지로 대처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가짜뉴스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선정적인 섬네일과 제목을 달고 유튜브에 유통되는 허무맹랑한 영상들이다. 하지만 ‘대통령 치매설’이나 ‘5.18 북한 특수군 개입’ 같은 노골적인 가짜 뉴스만이 문제는 아니다.
가짜뉴스란 처음에는 언론사가 보도하지 않은 뉴스를 언론사 보도로 위장해 유통되는, 말 그대로 ‘가짜’뉴스를 뜻했다. 그러던 게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서, 노골적인 허위 정보는 물론 기자의 오보, 검증이 부족한 기사, 부실한 기사까지 정말 온갖 양태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다.
언론이 세상을 보는 렌즈는 실제로도 좁다. 7억짜리 아파트를 샀다가 대출 부담에 괴로워하는 31세 직장인, 종부세 부담에 괴로워하는 대기업 출신 은퇴자 부부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다 보면, ‘대체 이 이야기를 내가 왜 보고 있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특정 이슈가 모든 언론의 1면을 지배하고, 심지어 경쟁언론이 똑같은 제목의 1면 기사를 쓰고 똑같은 가족의 사진을 1면에 내거는 걸 보면 어딘가 기이한 기분마저 든다. 언론이라는 이 렌즈가 정말 세상을 똑바로 보여주는 걸까 하는.
아니, 사실은 그냥 그게 뉴스의 본령
유시민과 진중권의 신년 토론을 되새겨보자. 유시민은 기성 미디어를두고 “보도 품질이 너무 낮다”고 말했다. 진중권은 오히려 유시민의 ‘알릴레오’야 말로 ‘판타지’ ‘음모론’ ‘선동’이라 강하게 꾸짖으며 대중들의 윤리를 마비시켰다고 맹공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사방에서 ‘기레기’들의 ‘가짜뉴스’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오는, 그게 언론의 속성일지 않을까? 기성 미디어냐 뉴 미디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시끄러운 이슈를 만드는 게 모든 언론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
이럴 거면 차라리 뉴스를 끊어라!
세계적 지식 커뮤니티 ‘월드마인즈’ 대표이자 세계 최대 전자도서관 ‘겟앱스트랙트’의 공동 설립자인 롤프 도벨리는 ‘가디언’지의 초대로 수십 명의 저널리스트 앞에서 이런 강연을 했다.
뉴스는 해롭다, 뉴스를 끊어라!
가짜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허위보도, 선정적인 뉴스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 모든 ‘뉴스’를 끊으라는 얘기다. 이 강연을 제안한 ‘가디언’의 편집국장 러스브리저는 그 자리에서 즉시, 그 내용으로 책을 낼 것을 제안했다. (‘가디언’은 영국의 가장 대표적인 ‘뉴스’ 언론 이다.)
그리고 정말로 나왔다. 『뉴스 다이어트: 뉴스 중독의 시대, 올바른 뉴스 소비법』이란 제목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성 매체고 뉴미디어고 할 거 없이 모든 뉴스를 극딜한다(…). 대부분의 뉴스는 편향적이고, 쓸모없는 정보를 나열하며, 진짜 중요한 정보를 가린다. 뉴스 자체가 편향된 것은 물론이고, 쏟아져 나오는 뉴스 알고리즘은 우리의 인지 편향을 가속화한다.
뉴스는 우리를 정말로 어리석게 만든다.
뉴스가 필요로 하는 건 깊이가 아닌 선정성
앞서 유시민과 진중권을 예로 들었지만,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담에는 엉뚱하게도 논객과 변호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들이 의료 이슈에 전문가는 아니다. 말을 재밌게, 또 선정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비단 뉴스뿐이랴, 사실 인기 많은 유튜버, 스트리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그게 뉴스의 어떤 본질일지도 모른다.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유명하고 시끄러운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 정보는 사실 우리의 지식, 통찰, 창의적인 사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뉴스 다이어트』의 저자 롤프 도벨리는 ‘도널드 헨더슨’이란 인물의 예를 든다. 그는 WHO에서 천연두 박멸 프로젝트를 이끌어 이를 성공시켰으며, 2002년 미국 최고 훈장을 받았고, 그 이후 대학의 학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놀라운 업적에도 그의 이름은 뉴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전문가였고, 훌륭한 업적이 있었지만, 거기에 그쳤다. 말솜씨가 현란하지도 않고, 스타일이 멋지지도 않았다. 언론이 주목하는 ‘셀럽’의 조건을 만족하진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유튜브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연예인처럼 잘생겨야 했겠지만.)
뉴스의 순위는 얼마나 중요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선정적인가 하는 것
기후변화는 현재 과학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이슈 중 하나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데, 그건 아마 기후변화가 그리 강력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는 테러리즘이나 사고와 같은 강렬한 충격은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환경 문제는 잘 모르지만 살인범에 관해서는 잘 안다. 범람하는 뉴스는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끔 그러다 보면 “게임에 중독돼서” 같은 뜬금없는 이유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뉴스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뉴스는 ‘세상을 이해한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툴’에 가깝다.
뉴스는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그뿐 아니라, 뉴스는 우리의 정신에도 해롭다. 대부분의 뉴스가 부정적인 소식을 전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뉴스가 우리의 정신 건강에 딱히 좋을 이유가 없다. 당장 스포츠 뉴스만 해도 한화와 롯데 팬들이 얼마나 고통받는가.
뉴스는 거의 모든 사건에 대해, 우리에게 판단을 내리기를 사실상 강요한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 “최저임금 1만 원” 운동이다. 지난 대선 당시에는 무려 85%의 응답자가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까지 올리는 데 찬성했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당시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최저임금을 1만 원까지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2018년에는 단 20.3%만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까지 올리는 데 찬성했다. 특별히 변한 건 없었다. 대통령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까지 올리기 위해 드라이브를 걸자,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뉴스’가 잇따랐고, 그게 사람들의 ‘판단’을 이렇게나 급격하게 뒤흔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판단을 급격하게 뒤집는 데 뉴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뉴스는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선정적으로 포장해 보도했다. 고급 한정식집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망한다거나, 30년 근속한 직원을 최저임금 때문에 해고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뉴스를 끊는다는 건 정말 가능한가
이젠 벌써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촛불집회, 탄핵으로 이어졌던 한국 정치의 역동성은 어쨌든 그럼에도 뉴스의 덕이 컸다. 뉴스를 포기하자는 말은 이런 역동성을 포기하고, 정치에 대한 시민의 권리까지 포기하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실 한 개인에게는, 뉴스란 정말 독이고 불량식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뉴스는 그다지 유의미한 통찰과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최순실의 태블릿 같은 게 또 나타난다면 아마 뉴스 중독자에 오지라퍼를 벗어나지 못한 옆 사람이 이야기를 전해줄 테니, 소외될 걱정은 접어 둬도 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뉴스는 중요하다. 특히나 우리가 뉴스를 끊어버린다면 정말 선정적인 뉴스들이 함께 죽게 될까. 오히려 탐사보도가 먼저 고사하지 않을까. 결국 살아남는 건, 인터넷의 선정적인 이야기를 베껴 쓰는 선정적인 미디어들 뿐이지 않을까.
『뉴스 다이어트』의 저자 롤프 도벨리의 주장은 ‘가짜뉴스와의 전쟁’에 골몰하는 미디어계에 가장 논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가짜뉴스를 몰아낼 수 있을까, 저널리즘을 다시 복구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그냥 그게 언론이라고 말하는 게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일 리 없다.
하지만 모두가 ‘가짜뉴스’를 이야기하며, 서로가 서로를 ‘가짜뉴스’라 공격하는 지금 – ‘그냥 너네 전부 다 문제’라는 도벨리의 전복적인 메시지는 꽤나 흥미롭고 가치가 있다. 언론은 과연 도벨리의 지적을 얼마나 부정할 수 있을까.
솔직히 오래전부터, TV 뉴스가 일종의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이나 식당에서 억지로 어쩔 수 없이 TV 뉴스를 볼 때면 보통 괴로운 게 아니었다. 그 이유를 도벨리가 너무 완벽하게 설명한 것 같다.
※ 해당 기사는 갤리온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