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진실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 멜린다 게이츠, 「1장: 중요한 생각이 떠오르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 49쪽
멜린다는 어린이들을 위한 백신을 나누어 주러 갔던 말라위에서 만난 젊은 어머니에게서 피임약의 필요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 피임약을 보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가족계획을 적극적 의제로 삼아 일하면서 다시 여성의 권한 강화에 더 깊은 이해를 얻었다.
이렇게 재단의 사업 범위는 차근차근 폭넓게 확대되어 간다. 소녀들과 소외된 계층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보이지 않는 무급 노동의 문제와 가정 내 평등한 파트너십의 문제, 조혼의 관습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 농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일, 직장 여성들이 성장하기 위한 조직 문화와 기회를 만드는 일, 여성이 창업한 사업에 투자하는 펀드까지.
사업 대상이 다양한 사회, 경제, 문화적 맥락에 걸쳐 있어 모두 각각 다른 사업인 것 같지만, 이 모두는 하나의 ‘중대한 아이디어’에 기반 둔다. 여성의 권한 강화.
“여성의 권한 강화와 사회의 부 및 건강 사이의 연결성을 이해하는 것이 인류에게는 더없이 중요하다. 이는 우리 재단이 과거 20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얻은 통찰이면서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놓치고 있던 중대한 아이디어였다. 인류를 고양하고 싶다면, 여성 권한을 강화하라. 이것이 인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이고 파급력이 큰, 고효율 투자다.
- 멜린다 게이츠, 「1장: 중요한 생각이 떠오르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 48쪽
‘자선’사업이 아닌 자선’사업’을 위한 멜린다 게이츠의 해법
멜린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 딱 한 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야 해요.
- 멜린다 게이츠, 「9장: 가장 고통스러운 곳을 향하여」, 『누구도 멈출 수 없다』, 350쪽
멜린다 게이츠가 여성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많은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변부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을 원 안으로 불러와 앉힐 때 평등이, 더 합리적인 규범의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게이츠 부부의 친구이자 멘토,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한스 로슬링 박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과도 연결된다.
재단이 지원하는 하나하나의 사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다음 사업으로 이어졌는가에 대한 내용은 흥미롭고, 각 사업의 현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멜린다 게이츠, 또는 게이츠 재단은) 어떻게 일하는가’의 원칙이었다. 따로 챕터를 들여 원칙을 직접 기술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전달 시스템과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
전달 시스템 :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이 스스로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학도 필요하다. 그리고 과학을 전달하는 방식은 과학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 멜린다 게이츠, 「2장: 어머니에게 힘을 나누어 줄 때 변하는 것들」, 『누구도 멈출 수 없다』, 73쪽
가장 놀라운 교훈은 기술 발전이 관건이 아니라는 사실 이었다. 산모와 신생아를 위한 프로그램은 단순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만으로 얼마나 큰 성취를 얻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달 시스템(delivery system)이었다. 새로운 도구나 방법을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쥐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전달 시스템이다.
- 멜린다 게이츠, 「2장: 어머니에게 힘을 나누어 줄 때 변하는 것들」, 『누구도 멈출 수 없다』, 70–71쪽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부로 만들어진 재단이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한 발짝 물러날 수 있다는 것, 현장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그것이 대단한 혁신이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가슴에 안아 주는 아주 단순한 일일지라도) 받아들이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은 ‘이 일을 제대로 해내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상식’에 맞춰 가설을 세우고 자원을 쏟아붓는 것은 또 한 번의 비효율을 만든다.
전달 시스템은 다양한 것이 될 수 있다. 대화가 될 수도, 사람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일일 수도, 새로운 방법으로 생명을 구한 아이를 보여주는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가장 필요한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모으고 목소리를 듣는다
빌이 대화에 데이터를 끌어온다면, 나는 내가 들은 이야기를, 인간적인 측면을 가져오죠.
- ‘인사이드 빌 게이츠’, 넷플릭스
전달 시스템을 만드는 전략은 데이터와 목소리에 기반한다. 데이터가 수집 가능한, 엑셀과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라면, 목소리는 데이터를 건져내기 위해 만든 체가 얼마나 촘촘하든 그 사이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 또는 그 체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체를 만드는 사람이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 것. 문제의 핵심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모두 포함한다.
물론 모든 것을 낱낱이 포착할 수 있는 시스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더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그리하여 우리가 돕는 사람들의 삶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멜린다 게이츠, 「3장. 좋은 것이라면 뭐든 너에게 주고 싶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 119쪽
데이터의 중요성은 점점 강조된다. 하지만 데이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데이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이사회의 의장이자 최고 의사결정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대한 재단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균형추 역할을 할 것이다.
좋은 환경과 성공을 동시에 잡은 부부의 선택: 미치도록 사회공헌에 몰두하기
모든 게임은 운에 좌우되죠. 사업과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 ‘인사이드 빌 게이츠’, 넷플릭스
빌과 멜린다 게이츠는 세상의 많은 운을 타고 난 사람들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의 유복한 가정, 지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가정과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격려해 주는 어른들을 만났다. 멜린다는 여학생에게 어떻게든 컴퓨터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한 선생님 덕분에 일찍 코딩을 접했고, 빌은 지적 자극 충만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훗날 공동창업자가 된 친구를 만났다.
젊은 빌 게이츠는 기술이 새로운 세상을 열던 무렵 기업을 세웠고, 공학 학위와 MBA를 가진 젊은 멜린다 게이츠는 그 기업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성공의 결과, 그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장이 가져다준 막대한 부와 자원을 활용할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한다.
이 대단히 운 좋은 사람들,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보고 책으로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특히 어떻게 부를 쌓아 올렸는가, 그래서 어떻게 사업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힌트를 기대할 법한 책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돈을 쓰는가’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인 멜린다 게이츠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이 책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대하는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기회, 많은 것을 이루고 가진 만큼 견고할 수 있는 편견이나 자만심이나 지적 나태함을 내려놓고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기회로 다가왔다.
가진 것, 이룬 것의 스케일은 비교할 수 없지만 편견과 자만심의 크기는 과연 가진 것의 크기에 비례할까. 내가 가진 편견을 들여다본다. 이 정도면, 하는 마음을 본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가로막는 것은 없는가.
비영리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일을 하는 나에겐 전달 시스템의 중요성, 데이터와 목소리의 균형 모두 깊이 와 닿는 원칙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며, 시간을 들여야만 얻어낼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간결하고 단순한 것은 반대로 깊은 통찰과 고민에서 곁가지를 쳐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누구보다도 큰 성공을 누려 본 사람이 새로운 일을 대할 때 기존의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대신 ‘왜’를 끝까지 이해하려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과연 쉬운 일일까.
기술과 시장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부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잘 쓰인 보고서 대신 맥락이 전혀 다른 세상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일은 얼마나 많은 의지와 신념을 필요로 하는 일일까 생각한다. 일하는 사람이 누구든, 일을 잘하기 위한 원칙은 결국 같다.
우리 모두에게 고양의 순간을
인류 최고의 목표는 평등이 아니라 연결이어야 한다.
- 멜린다 게이츠, 「에필로그」, 『누구도 멈출 수 없다』, 381쪽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책에 소개된 웹사이트를 찾아보았다. Momentoflift.com은 “Evoke(자아내다, 떠올려주다)”라는 제목을 가진 낙관주의자들의 커뮤니티(A community of optimists hosted by Melinda Gates) 사이트가 되어 있었다. 이 플랫폼에는 세계 곳곳의 여성을 고양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프로젝트, 사람, 자원이 모일 것이다.
고양의 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무리 거대한 자원을 가진 재단이라 해도 하나의 재단이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개인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 그리고 서로를 이어 주는 일이야말로 자원을 가진 재단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일 것이다.
현장에서 끈질기게 ‘왜’를 찾아내고, 필요한 곳에 힘을 싣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재단의 이야기를 책 한 권 분량으로 찬찬히 만났다. 내가 내 자리에서 해볼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게 하고, 그 일을 할 때 지키고 싶은 원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 준 책. 새해의 첫 책으로 만난 것이 반가운 책이다.
재단의 일이나 비영리 섹터에서 멀리 있는 독자들에게도 머리와 마음에 건강한 자극을 주는 책일 것이라 믿는다. 매일의 일로 접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가장 간결한 단어로 가장 깊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다 보면, 먼 나라에서 학교에 가고 싶은 소녀의 목소리와 지금 내가 직장에서 겪으며 고민하는 문제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고양의 순간을.
※ 해당 기사는 부키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