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페미니스트란 어떤 존재일까? 많은 남성에게는 전투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다. 때로는 여성에게도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반응이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빌 게이츠의 아내이자 세계 최대 자선사업을 이끄는 멜린다 게이츠가 페미니스트라면 어떨까?
아이를 낳은 지 2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열렬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모든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하며, 여성과 남성 모두가 여전히 여성을 억누르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편견을 없애기 위해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는 것이다.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어째서 빌과 멜린다 게이츠는 99%의 재산을 포기했을까?
멜린다 게이츠는 아프리카 여행 중 아프리카인의 비참한 생활에 충격을 받고 빌 게이츠를 설득한다. 그렇게 설립된 것이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이다. 나중에는 워런 버핏도 이들에게 동참한다. 세상에서 돈이 가장 많은 두 사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꾼 여성이 멜린다 게이츠다.
빌 게이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 재단의 설립과 운영에는 멜린다의 비전과 시각이 깊숙이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빌 게이츠는 “내가 자선사업을 하게 된 것은 멜린다의 영향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세상 다 가진 그녀는 왜 페미니스트가 됐을까?
오해는 버리자.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여성운동 단체가 아니다. 다만 사회 구호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여성이 받고 있는 차별을 인식하고, 여기에 힘을 쏟게 된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면 가난과 여성 문제는 절대 끊기 힘든 문제다.
- 다산: 가난한 곳에는 피임 도구가 없어서 아이를 많이 낳게 된다.
- 산모 사망: 제대로 된 병원이 없으니 엄마가 사망할 확률이 높다.
- 조혼: 여자아이를 키울 돈이 없으니 초등학생을 결혼 시켜 식솔을 줄인다.
- 미교육: 어릴 때 결혼해서 학교에 다닐 리 없으니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 저숙련 노동: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집안일과 농사에 시달린다.
사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어릴 때 성기 절단을 당하거나 살아남을 길이 몸을 파는 것뿐인 여성도 적지 않다. 몸 파는 여성을 쉬이 욕하지 말자. 살자고 하는 짓인데 콘돔을 끼자고 할 때 폭력을 당하고도, 호소할 수 없는 여성투성이다.
일상을 바꾸는 페미니즘: MS의 조직문화에 기여한 멜린다의 페미니즘
멜린다 게이츠의 페미니즘이 다이아몬드 수저가 가지는 여유라고 생각하진 말자. 그녀의 페미니즘은 일상이다. 그녀는 듀크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MBA를 거쳐 MS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작은 기업일 때 입사하여 임원까지 된 그녀는 끊임없이 MS의 문화를 걱정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명과 비전을 사랑하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입사한 이후 나는 나답게 행동하기보다 내가 보기에 회사에서 잘하고 있는 남성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그녀는 MS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다른 여성 직원들을 찾았다. 그중 한 동료는 MS의 사내 문화를 이렇게 비판했다.
여성들이 직장에서 우는 것은 괜찮지 않고, 남성들이 직장에서 소리 지르는 것은 괜찮다고 하죠. 어느 쪽이 더 성숙한 감정적인 반응이지요?
그리고 멜린다는 MS의 조직 문화를 바꿔나갔다. 그리고 그 문화는 MS를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우리가 역점을 두었던 건, 바로 ‘내가 틀렸어’라고 말하는 능력이었다. 타인이 그 점을 이용해서 우리를 불리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과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내가 오랜 기간 경력을 쌓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회사 곳곳에서 끌어모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어떻게 그런 스타들을 데려와 밑에서 일하게 했던 겁니까?” 비결은 간단했다. 내가 그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가 했던 방식으로 일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한국에도 여성을 배려하는 조직문화 이야기가 커진다. 이것이 여성에게 우위를 준다고 생각하지 말자. 절반을 차지하는 직원이 더 많은 가능성을 펼 수 있다면 이는 당연히 회사를 위한 것이다. 또한 멜린다의 페미니즘은 여성 우위가 아닌, 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남성들도 직장에서 자기답게 만드는 문화적 장애물에 직면한다. 여성들이 일터에서 자기다움에 충실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남녀 모두를 위해 문화를 개선하는 것과 같았다.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정치와 교회와의 충돌: 두려움을 넘어 양심과 마주하기
멜린다 게이츠가 비판에 직면하지 않고 편하게 구호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피임약 보급에 힘썼고 이는 가톨릭교회의 큰 비판에 직면했다. 많은 종교단체가 그녀를 비난했지만, 이에 굽히지 않았다.
나는 내 행동이 가톨릭교회와 대립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가톨릭교회의 한층 높은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내 행동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이며,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사랑은 교리에 우선한다.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또한 그녀는 정치문화도 비판한다. 너무나 많은 여성 관련 법안이 남성에 의해 등장한다. 이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문화 차이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저임금 여성들에 대한 피임약 보급이 정치권에 의해 중단되고 있다. 그녀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독려한다.
여성들에 대한 결정이 남성들에 의해 내려지는 현실은 퇴보하는 사회, 즉 뒷걸음치는 사회의 표식이다. 여성들이 직접 자신을 위해 결정을 내렸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정책들이다. 공직에 출마해 닫힌 문을 두드리고, 가족계획을 지지하고,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시간을 쏟는 여성 활동가들이 전국적으로 급증하는 모습을 볼 때 내가 힘이 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이래도 과연 페미니즘이 그저 거부감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물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이들은 ‘착한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멜린다 게이츠의 다양한 주장들은, 그런 구분에 앞서 남녀 차별의 현실에 눈을 돌리는 게 좀 더 현명함을 알려준다. 그녀는 여성 차별의 현실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두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괴롭히는 입장이었든 피해자였든 괴롭힘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결국 세 집단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아웃사이더를 만들어내는 사람, 아웃사이더가 되는 사람, 방관하며 말리지 않는 사람.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남자들이 해야 할 일: 빌 게이츠 같은 사업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런 남자는 될 수 있다
물론 뭇 남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여성들의 목소리에 모두 귀 기울일 수는 없다. 당사자가 아니라 잘 느끼기도 힘들뿐더러, 학생도 직장인도 참 바쁘지 않나. 하지만 우리보다 더 바쁜 빌 게이츠에게서 변화의 시작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빌 게이츠처럼 위대한 결정을 할 수 없다. 직장 내 여성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일반인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빌은 일주일에 2번씩 나를 대신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로 출근했다. 3주가 지난 뒤 꽤 많은 아버지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줬다. 한 어머니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빠들이 정말 많네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빌이 데려다주는 걸 보고 우리도 집에 가서 남편들에게 말했어요. 빌 게이츠도 하던데? 당신도 할 수 있어.”
- 멜린다 게이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중
이 책은 페미니즘 입문서가 아니다. 정교하거나 화려한 이론이 있지도 않다. 워낙 모범적으로 자라온 멜린다 게이츠라 아주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지도 않다. 하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정말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을 위해 남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이토록 부드럽게 설득할 책은 없으리라 확신한다.
주변에 부담스럽지 않은 남자와 젠더 이야기를 하기 피곤하다면 한 권 선물해 주길 권한다. 혹시라도 남성이 직접 이 책을 보고 변화하고자 한다면 더욱 멋진 일이다.
※ 해당 기사는 부키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