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운명을 알고 싶어 하는가?
연말 이때쯤 되면, 내년의 운명을 점쳐준다는 게시물이 인스타에 페북을 점령한다. 여기서 보이는 세 단어가 내년의 내 운명이라느니, 별자리에 따라 운명이 이렇게 저렇게 바뀐다느니…
우리는 왜 우리의 운명을 알고자 하는가? 심리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삶을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삶에는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운명적인 요소’가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을수록 삶은 불확실해진다. 심리학적으로 불확실성은 스트레스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불확실성이 늘어날수록 사람은 불안과 무력, 우울감에 빠진다.
그래서 사람은 피할 수 없어 보이는 운명조차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틀’을 원한다. 우리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건 인간의 본능이다. 이건 괜한 본능이 아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현실이 닥쳤을 때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운명에 더 자신감 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주팔자, ‘시간’을 설명하는 운명론
인간의 본능이라 했으니, 이건 요즘 얘기만은 아니다. 수천 년 전부터 계속되어온 인간의 고집스런(?) 본능인 것이다.
10년 전,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기 전만 해도 스포츠신문은 출퇴근길 대중교통의 친구였다… 고 한다. 삼촌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기 코너는 ‘오늘의 운세’. 원래 신문은 맨 뒷장부터 펴서 운세부터 확인하는 게 국룰이었다 카더라. 정말로 삼촌한테 들은 거지 제 얘기 아닙니다…
어쨌든 거기에는 쥐띠부터 돼지띠까지, 띠별·연도별로 오늘의 운세가 설명돼 있는데, 북쪽에서 길운이 온다는 식의 뜬구름 잡는 얘기부터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하라는 디테일한 지시까지 흥미로운 썰이 가득하다. 그럼 이런 운세는 어떻게 계산하는 걸까? 그냥 역술가가 아무 말이나 맘 내키는 대로 대충 쓰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 사주팔자다. 생년연월시를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등 십간,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까지 십이지로 나누고, 이를 조합해서 육십갑자를 만든다.
이 육십갑자는 각기 음양과 오행으로 배속되는데, 이 요소 간의 서로 돕고, 다스리고, 통제하고, 변화하는 ‘생극제화’의 관계를 따져 운세를 계산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의 상생관계. 일단 이것만으로도 수십만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고.
왜 10개와 12개를 조합하는데 60개밖에 안 나오느냐면, 60이 10과 12의 최소공배수이기 때문. 갑자년에서 시작해 다음 해는 을축년, 그 다음 해는 병인년… 하는 식으로 계산하다 보면, 60번째 해는 계해년이 되고 다시 61번째 해는 갑자년으로 돌아온다. 수포자도 이 정도는 안다!
이렇게 년, 월, 일, 시까지 네 개의 기둥이 있으니 사주요, 각 기둥마다 간/지 두 글자씩, 네 기둥을 합쳐 모두 여덟 글자가 배속되니 팔자라 불리는 것이다.
한 나라의 운세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사주가 있다면, 역시 지도자의 사주일 것이다. 사짜 쓰니가 하는 얘긴 그만 듣고, 찐 풍수학자의 말씀을 몰래 베껴와 보자.
문재인 대통령의 사주는 ‘바닷가에서 늦겨울 화초가 진눈깨비를 맞는 형상’으로 풀이되는데, 평소에는 매우 교양 있게 행동하나 소위 ‘스위치’가 눌리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주라고. 평소엔 젠틀하기로 이름 높지만 종종 국정에 난맥이 발생할 때 서슬 퍼렇게 노한다는 문 대통령의 모습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물론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니만큼 개인의 사주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는 건 아니다. 주변 환경이 어떤가에 따라 똑같은 사주를 가지고 운이 펴기도 하고 영 기를 못 쓰기도 하는데, 이를 설명하는 게 ‘대운’과 ‘세운’이다. 대운은 10년 단위로, 세운은 1년 단위로 바뀌는 운의 흐름을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문재인 대통령은 임오년 오화(午火) 대운이랄지, 정유년 경신(庚申) 대운이랄지, 불의 기운(火)이 강한 해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늦겨울의 화초’와도 같은 문 대통령의 사주가 따뜻한 불을 만나 비로소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는 셈이랄까. 그는 임오년에는 노무현 정부의 실세로 활동했고, 정유년에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반면 2019년 기해년은 물이 많은 흙의 기운이 강한 해였는데, 이런 세운은 문재인 대통령의 사주와는 맞지 않다고. ‘늦겨울의 화초’가 축축한 땅을 만나니 계속 움츠려 있어야 하는 세운인 셈이다. 다행히 내년은 금의 기운이 강한 해인데, 문재인 대통령의 사주와는 잘 맞는다고. 올해 난망했던 대북 관계나 외교 관계 등이 잘 풀리길 기대해본다.
사주팔자, 미신과 철학의 경계에서
이처럼, 사주는 ‘시간’에 따른 운명을 논한다. 시간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우주 탄생의 그 시점부터 고정된 가장 확고한 운명이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지극히 미시적인 수준이 아니고서는, 그 흐름을 늦추거나 빠르게 할 수도 없다.
명(命)이란 곧 순리이고, 그 순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성현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주 명리의 철학은 신기할 정도로 ‘시간’의 개념을 그대로 빼닮은 것이다. 시간이 최초의 운명이라면, 운명을 풀고자 했던 사람들이 이를 깊이 들여다본 건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명(命)과 순리에 대한 철학이 발아한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고.
‘높은 재주와 후덕한 행실을 지녀도 반드시 그가 부귀해지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고, 지혜가 모자라고 덕이 천박해도 반드시 비천해지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노력과 재능은 빼어났지만 ‘빽’이 없어 가난에 허덕여야 했던, 후한의 천재 지식인 왕충의 책 ‘논형’의 일구다. 어쩐지 시대를 거슬러 밀레니얼 세대에게 무척 와닿는 문장 같다(…)
물론 이것이 ‘세상 모든 것은 운명이며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팔자를 아예 바꿀 수는 없지만, 팔자를 이용할 수는 있다. 왕충처럼 ‘빽’이 없다면 물론 금수저처럼은 안 되겠지만, 인맥을 쌓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이용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고위직, 연장자와의 교류를 원한다면, 최고 경영자 과정이나 북한대학원대학교에 등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대학원대학교가 좀 뜬금없어 보이는데, 최근 남북관계가 외교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북한학’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북한대학원대학교 등에 고위 공무원 등이 많이 등록한다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주변인들이 필요하다면 문화센터나 독서 모임 등을 알아봐도 좋겠다.
물론 어떤 인맥이, 어떤 관계가 내게 진짜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주팔자는 여기에 살짝 양념을 친다.
2020년의 경우, 00년생, 90년생, 80년생, 70년생, 60년생, 50년생은 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게 좋다. 03년생, 93년생, 83년생, 73년생, 63년생, 53년생은 웃어른의 조언을 잘 수용하는 게 이롭다. 98년생, 88년생, 78년생, 68년생, 58년생, 48년생이라면 오히려 아랫사람의 충언이 내 운을 높인다. 이거 대충 갖다 붙인 게 아니라 진짜 교수님 말씀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할 게 재물운일 것이다. 살짝 스포일러하자면, X4년생은 횡재운이 있으나 그만큼 낭비를 조심해야 하며, X5년생은 노력이 보상받는 해이니 저금을 쌓아두는 게 좋단다. X8년생은 인기를 통해 풍요를 누리게 되고, X4년생은 취직이나 승진운이 있으며, X9년생은 말이 곧 운이 되는 해란다. 이것도 교수님 말씀이다.
사실 이건 모두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다. 뉜들 낭비를 조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뉜들 저금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인가. 뉜들 인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인가. 다만 팔자에 따라,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차원이 있을 따름이다.
궁합도 마찬가지다. 역시 교수님 말씀을 빌리자면, 결혼해 살 운명이면 궁합이 무슨 필요겠느냐는 것이다. 운이 좋은 때인지 나쁜 때인지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그냥 그 사람이 지금 잘 사냐, 못 사냐를 보면 그만이다. 다만 궁합은 어떤 가이드라인 같은 것을 제공할 뿐이다. 갑(甲)으로 태어난 사람이 무(戊)로 태어난 사람을 만나면, 큰 나무가 높은 산을 만난 격이라 뿌리내리기가 힘들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사주라는 건 단순히 명에 순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명에 ‘어떻게’ 순응할 것인가가 오히려 사주의 핵심이다. 유리한 운세와 불리한 운세를 미리 알고 상황에 맞춰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기회와 위기의 순간을 살짝살짝 ‘스포일러’ 해 주는 셈이다. 그 스포일러를 받아들일지 말지, 공격적으로 활용할지 방어적으로 받아들일지 등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풍수, ‘시간’을 넘어 ‘공간’으로
‘시간’이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우주가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라면, ‘공간’은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동, 서, 남, 북, 하늘과 바닷속까지 사람은 어쨌든 공간을 어느 정도 선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 ‘시간’이 정한 운명을 바꾸기 위해 ‘공간’의 운명론이 발생한 것도, 어쩌면 마찬가지로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풍수’는 바로 ‘공간’을 바꾸어 운세를 뒤트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애정운을 높이기 위해선 혼자 차를 마실 때도 찻잔을 두 개 준비하고, 홀로 잘 때도 베개 두 개를 둘 것. 썸이든 뭐든 상대를 만날 때는 마주 보지 말고 ㄱ자로 앉을 것. 이런 사소한 습관도 모두 풍수의 일종이다. 운의 흐름을 바꾸는 기술이다.
삶에 사소한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행동하는 방식이 바뀌고, 운명의 길이 완전히 바뀐다. 대표적인 것이 속옷이다. 사람과 늘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재물을 원하면 빨간색, 명예를 원하면 노란색, 냉철함이 필요하다면 흰색이 어울린다고 한다. 역시 교수님 말씀이다.
사람과 밀착해 있는 것이라면 침대도 있다. 침대 머리는 창문을 바라보는 게 좋다. 관운이 필요하다면 산을, 재물이 필요하다면 강이나 호수를 보게 하는 게 좋다. 강이 없다면 도로나 광장도 괜찮다고 한다. 풍수에서는 도로를 ‘가수(假水)’라 해서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런 게 미신처럼 보인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운명을 바꾸는 풍수도 있다. 운동도 풍수에 따라 하면 좋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태어난 고향, 내가 사는 동네를 걷는 것이다. 사주에 따라 피해야 할 운동도 있는데, 예를 들어 흙의 기운이 많은 사람은 한 손을 주로 쓰는 운동은 삼가는 게 좋다고 한다.
가고 싶은 곳, 아름다운 곳을 그린 산수화를 두는 것도 좋다. 더 좋은 것은 여행이다. 궁궐과 왕릉을 탐방하며 명예운을 높일 수 있고, 승진을 원한다며 산을, 재물을 원한다면 물을 찾아 여행하는 것이 좋다. 꼭 풍수를 100% 믿지 않더라도, 이런 움직임이 내 주위의 에너지를 바꿀 수 있단 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되면 개이득, 안 돼도 어쨌든 최소한 이득 아닌가?
운명은 바꿀 수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역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자들이다. 물리학에 따르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같은 거시적인 차원뿐 아니라, 저녁에 치킨을 먹을지 족발을 먹을지 하는 극도로 미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건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는 결정되어 있다. 우주는 사건과 그에 따른 사건, 그에 따르는 또 다른 사건의 연속으로써 이미 짜여 있다.
사실 결정되어 있다는 말조차 좀 어색한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물리학자는 우주를 3차원의 공간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4차원 개념으로 인식한다. 우주란 시간과 공간이 복잡하게 얽힌, 정적인 시공간의 블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우주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다만 우리가 느끼는 일종의 환상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그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물론 어제와 오늘, 내일이란 개념이 환상에 불과하며, 우주는 시공간 블록으로서 그저 존재할 뿐이고, 따라서 우리는 내일을 개척할 수 없다고 한다면 – 이건 참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리라.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아이디어에 반대한다. 시간이란 존재하며, 우리는 자유의지를 통해 어떤 가능성이 실제로 일어날지 결정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의 존재를 밝혀내기에 현대 물리학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을 뿐이다.
뭐,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는 지적 논쟁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놓고, 다만 우리는 그저 살아나갈 뿐이다. 운명이란 결정되어 있고 내가 청경채를 몇 번 씹어 먹을지조차 모두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시간이란 다만 환상이며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어쨌든 우리는 청경채를 씹어 먹어야 하고 살아나가야 하지 않겠나. 운명이 정해져 있기에 포기한다면, 그렇게 포기하는 것조차 운명일 테니, 어찌해도 결국 운명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사주는 우리의 명이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순리에 따름으로써 성현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단순히 순응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해진 가능성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능동적인 개념에 가깝다. 현대 물리학이 제시하는 시간의 개념처럼 말이다. 풍수는 그보다 더 나아가, 정해진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공간을 변화해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세를 담았다.
사주, 풍수와 현대 물리학의 정수가 맥을 같이한다고 말하고자 함은 물론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뿌리를 두고, 그다지 밀접한 관계에 있지도 않다. 다만 운명을 받아들이고 또한 개척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어쨌거나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운명은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작정 받아들여 체념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주와 풍수에는 서로 낳고, 다스리고, 억제하며, 변화하는 생극제화의 원리가 담겨 있다. 그건 무척 흥미롭고 다채로운, 운명과 삶을 바라보는 색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어떤 사람은 그 독특한 관점의 매력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사주와 풍수를 단순한 미신으로 여기고, 다만 심심풀이로 찾아보는 신문 뒷면 운세란 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간에 중요한 건, 운명에 단순히 포섭되지 않는 것. 사주와 풍수뿐 아니라 어떤 운명론을 접하든 마찬가지지만 그걸 단순히 신봉하는 게 아니라, 다만 내 앞에 펼쳐진 다양한 가능성 중 최선의 것을 찾기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삼는 것이다.
탈신공개천명(奪神功改天命), ‘하늘이 하는 바를 빼앗아,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을 바꾼다’. 운명을 바꾼다는 건 그리 거창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 언제든 닥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사건에 맞설 수 있는 긍정적인 힘, 정신, 마음가짐을 부여하는 것. 그게 결국 사주와 풍수, 명리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열심히 베껴왔던(…) 김두규 교수의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풍수를 변화시킨다고 사람의 운명이 바뀔 것인가. 먹을거리가 달라지면 체질에 변화가 생기고,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면 새로운 인맥이 형성된다. 문화와 각종 제도가 달라지고 행동 양식도 달라진다. 운명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왕 베껴오는 김에, 책 후반부에 열다섯(2006년생)부터 일흔여섯(1945년생)까지의 운세가 나이별로 5페이지 정도로 비교적 상세히 정리되어 있으니, 쓰니의 운세도 한 번 찾아보기로 한다. 재산 상속이나 부동산 매입이 가능한 해라 한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이름을 빛낼 사주란다. 강인한 정신으로 특수한 직책을 맡게 될 거라고도 한다. 재물운을 위해서는 황색 계통을 즐겨 패용하라고. 좋아, 웹 소설 대박 내서 집 사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