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기사 「친구 초대는 2평, 요리는 3평부터…1평은 잠만 자는 방이죠」는 그래도 나름 괜찮은 르포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굳이 5평 청년주택을 까면서 들어가는 도입부 때문에 메시지가 오히려 해이해지는 느낌이다.
특히 기사의 말미. “마음만 먹으면 적당한 가격에 양질의 주택을 많이 지을 수 있는데”라는 부분. 땅은 무한정 공급되는 자원이 아니다. “적당한 가격에 양질의 주택을 많이”는 불가능하다. 기사를 한순간 공허한 몽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공간 제약은 ‘삶과 생활’을 제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나 취향도 생기지 않는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5평 미만 원룸이 그 사람의 가능성, 희망 자체를 제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사에 등장하는 ‘청년’들이, 정말 그런 삶과 취향과 희망을 빼앗긴 세대를 대변할 수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서울 성북구 대학원 준비생, 서울 관악구 대학생 2명, 인천 용현동 대학생 1명, 서울 성북구 프리랜서 1명. 5명 중 4명이 ‘인서울’이고, 나머지 한 사람도 용현동이면… 아마 인서울급 학교에 다닐 걸로 보인다. 결국 서울 얘기란 소리다. 지방은 여기에도 없다.
뭐 사실 서울 외 지방으로 가면… 서울의 협소 원룸 값이면 투룸급의 쾌적한 주거환경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기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맥락과 거리가 백 광년 떨어져 버리겠지. 하지만 정말 삶의 취향, 희망을 빼앗기는 게 서울 외 지방 대학생일지, 아니면 인서울 대학생일지는…
그나마 프리랜서는 삶이 집에 제약될 수 있다 쳐도, 정말 대학생의 삶이 집에 갇힌다고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대학생의 삶은 집보다는 차라리 대학에 연동되지 않나. 만일 ‘집이 삶을, 취향을 제한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면, 차라리 원룸살이 노동자나, 아예 주거 빈곤 노년층이 그 메시지에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이게 굉장히 보수적인, “대학생은 좁은 데 살아도 돼” 같은 목소리로 들릴 수 있음을 안다.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땅이란 한정된 자원을 나눔에 있어, 이 기사가 무슨 정책적 함의를 품었냐는 것이다. ‘모두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는 건 외치기 쉬운 당위지만… 그걸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는 훨씬 어려운 과제다.
이 기사는 그 당위를 실컷 외쳐놓고는, “마음만 먹으면”을 그 과제의 답이라 던져버린다. 대신 “5평 청년주택”을 오답으로 낙인찍어버린다. 이게 대체 무슨… 정책에 대체 무슨 참고사항이 되겠냐는 것이다.
개인 화장실조차 없는 1평 고시원 같은 환경은, 아무리 ‘거쳐 가는’ 집이라도 이제 정말 개선해야 한다. “5평 청년주택”은 최고는 아닐지라도, 그나마 현실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상당히 수준 높은 답안지 중 하나다. 그마저도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기껏해야 단지 하나당 열 몇 채 겨우 짓는 수준이다.
모두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 누군가의 공상 속 세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 기사는 공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가.
원문: 임예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