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회를 위해 그 안의 악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제거되어야 한다.
- 아돌프 히틀러
어느 날, 대한민국 한복판에 인간이길 포기한 악마가 튀어나왔다. 그것(사람도 아니다)은 하늘이 노할 죄를 지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약한 여성, 어린 소녀, 자기 자식, 이름도 모를 사람을 때리고, 훔치고, 강간하고, 굶기고, 토막을 냈다. 하루가 멀다고 들리는 이야기다. 나는 보호받고 싶다. 나는 범죄가 싫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도대체 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은 어디서 튀어나왔다는 말인가?
통탄할 일이다. 저번에 잡힌 그 범죄자의 형량이 고작 몇 년이란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죄인이다. 사방에서 그 죄인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다. 이해한다. 화나는 일이 분명하다. 내가 당한 일이라고 여긴다면, 난 그 죄인에 선고된 낮은 형량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참지 못할 것이다. 검은 복면을 쓰고 스스로 자경단이 되어 그 개자식을 찾아가 심판을 내리겠지, 사형 말이다. 배트맨처럼! (생각해보니 배트맨은 살생하지 않는다…)
굳이 저 예를 들지 않아도 세월호 참사를 보면 정말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다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형제는 집행되지 않는 것이 좋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형제야말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정의의 몽둥이를 내려놓고 잠깐 생각해보자.
첫째, ‘눈에는 눈’은 정의가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한 대 맞으면 두 대로 갚아줘라’는 말을 줄곧 듣고 자랐다. 많은 사람이 같은 말을 듣고 자랐을 것이다. 과연 우리 형법이 받은 대로 돌려주는 소위 ‘탈리오 법칙’에 따라 작동해야 할까? 확실한 것은 이런 논리에 의하면 과거의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광장에서 죄인의 목을 매달거나 머리를 칼로 댕강 자르던 그 옛날 말이다.
바지를 벗겨 곤장을 때리고, 불로 지지고, 물에 쑤셔 박고, 사지를 찢어버리는 것에 통쾌함을 느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나는 저런 형벌이 잔인하고 야만적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사형을 포함한 잔인한 형벌을 줄이는 쪽을 택했다고 믿는다. 이제 잔인한 형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사형제조차 192개 UN 회원국 중 140국이 폐지했거나 사실상 폐지했다.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저지른 죄에 걸맞은 벌’이야말로 절대 지켜질 수 없는 정의이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 사형이라면, 한 명을 죽인 살인자와 수십 명을 죽인 살인자에게 집행될 동일한 사형을 ‘정의구현’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십 명을 죽인 살인자의 죄가 더 무거우니 더 큰 벌을 받는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당사자만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처럼 사돈에 친척까지 멸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잔인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분명하게 사형으로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지 알 수 있다. 사형제를 찬성하는 정의에 불타는 기독교인들이 특히나 새겨들었으면 한다. 명심하라. 예수도 사형당했다.
둘째, 가해자의 인권을 박탈한다고 피해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건 아니다
피해를 본 사람과 가족의 입장에서, 범죄를 저지른 악한이 두 다리 뻗고 편히 지낸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다. 그들의 분노를 위해 복수하고, 슬픔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물어보고 싶다. 그것으로 정말 위로가 되는가? 속이 시원한 감정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복수는 결코 다친 마음의 치유제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범죄자의 인권만 챙겨주고 피해자의 인권은 무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을 대결구도 속에 몰아넣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언동이다. 어느 한쪽에 집중한다고 다른 한쪽이 피해를 보는 것은 인권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무지이다. 인권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이다.
자칫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로 이성을 잃은 인간이 추가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잡아주는 안전벨트로 작동하는 것이 인권이다. 가해자의 인권을 박탈하고 가차없는 응징을 가한다고 반대로 피해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의 사형을 주장하는 사람도 피해자의 인권을 신경써야 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살해당했다. 이 사람이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면 유족들이 겪는 실질적인 고통은 충격과 슬픔 뒤에 찾아오는 ‘현실의 문제’다. 아무리 살만한 가정이라도 이런 일을 겪는다면 하루아침에 경제적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사회 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에서는 더욱 위험하다. 정신적 고통이 배가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원해줘도 모자랄 판에 가해자만 사형시키면 다 해결될 일처럼 난리니 나로서는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피해자의 인권을 운운하며 분노하지만 정작 가해자에 대한 복수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들. 내 생각에 이 사람들은 진정 피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소리치고 있는게 아닐까?
셋째, 사형제는 예비 범죄자들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
즉 범죄예방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처벌받을 것을 계산해가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특히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소위 ‘사이코패스’가 처벌받는게 무서워 죽일 사람을 안 죽인다는게 상상이 가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이렇게 잠깐 자신의 이성을 작동시켜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는 것 외에도 수많은 연구결과와 통계가 사형의 범죄예방에 회의적이다.
UN 인권위원회는 1988년과 2002년 두차례에 걸쳐 사형제의 강력범죄 예방 효과에 대해 조사하였고, 결국 사형제가 범죄의 억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의 경우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던 2001년부터 2010년까지의 살인범죄 증가율은 18%였지만, 사형이 수시로 집행되었던 1988년부터 1997년까지의 살인범죄 증가율은 무려 31%가 넘는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시기에 오히려 살인범죄율이 낮아진 것이다.
사형을 도구로 사용해 잠재적 범죄자들을 협박한 적 없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 “이렇게 나오면 진짜 사형한다?”던 이명박 정부에서 들어서는 다시 범죄율이 증가하였다. 또다른 예로 미국이 있다. 세계에서 사형집행을 가장 많이 하는 미국에서 재미있게도 가장 많은 범죄가 발생한다. 이러한 통계는 강력한 처벌이 범죄예방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리의 직감적 판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회초리에 의한 예방’이란 없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비단 사형뿐만 아니다. 거의 모든 ‘처벌’이라는 것의 범죄 예방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감옥에 갔다 오거나 전자발찌를 채우거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회적 생존에 얼마나 치명적일지 우리는 알고 있다. 취직, 결혼 어느 하나 쉽게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범죄는 일어난다. 결국, 일이 터지고 가해지는 벌은 그 일을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넷째, 범죄는 사회에도 일정 책임이 있다
범죄자는 사회적 낙오자가 되지만 반대로 사회적 낙오자도 범죄자가 된다. 우리는 전자만 알고 후자는 모른다. 사회적 낙오자는 루저로 취급하고 하대하지만 그 사람이 그 때문에 범죄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위험한 사람, 즉 제거해야 할 사람으로 타자화한다.
‘선량한 시민’인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애써 외면하는지, 혹은 범죄자의 얼굴에서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너무나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묻지마 범죄’라는게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이유가 있더라. 왜 묻지 말라는 건가? 조금만 스텝이 꼬여도 낙오하는 사회에서 각박하게 살고 있다.
내 삶에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질겁할 수밖에 없다. 위험요인을 제거하고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과 분노를 엄한 곳에 과도하게 배출하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좋은 사회정책이 좋은 형사정책이라는 말을 들었다. 범죄자를 손가락질하는 건 쉽지만 범죄자를 만든 사회를 돌아보는 건 어렵다. 유영철, 신창원은 우리 사회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을 몽둥이로 후려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유아가 구타를 당한다고 질색하는 것이 우습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측은히 여기는 그 구타당한 아이가, 사랑받지 못하고 울고 있어서 손잡아주고 싶은 바로 그 아이가, 우리가 사형시켜야 한다고 소리치는 고개 숙인 범죄자로 자란 것이 아닐까 돌아봐야 할 때다. 당신이 사랑한 그 소년은 당신이 무서워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쌍놈의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와, 빨리 꺼져’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 『신창원 907일의 고백』 중
원문: 재욱님의 대모험 /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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