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년으로 열혈만화의 공식을 바꾼 슬램덩크
우리나라의 90년대를 풍미한 소년 만화잡지가 있었다. 바로 서울문화사의 <아이큐점프>, 대원씨아이의 <소년챔프>다. 라이벌 같은 두 만화잡지에는 각각 일본의 학원 스포츠 만화가 연재되고 있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4번타자 왕종훈>(원제: 4P 다나카군)과 <슬램덩크>이다.
<슬램덩크>는 익히 알다시피, 타고난 신체조건을 가진 천재 ‘강백호’가 주인공으로,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가입했던 농구부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농구로 열혈 청춘을 불태운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반대로, <4번타자 왕종훈>의 ‘왕종훈’은 야구는 해본적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주인공이 고교 야구 강팀에 들어가 99%의 노력을 외치며 후에는 열혈적으로 팀을 이끄는 존재가 되는 내용이다.
두 만화의 공통점은 바로 ‘열혈’이다. 그럼에도 두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왕종훈은 <캡틴 츠바사> 등 이전 스포츠 만화의 영향을 이어 받아 마구를 사용하지만, 강백호는 NBA급 운동능력을 보여주지만(…) 어쨌든 마구 등 비현실적 요소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독자층이 달랐다. <4번타자 왕종훈>은 실제 야구선수들이 좋아하는 만화일 정도로 매니아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키가 작고 못생겼던 ‘왕종훈’에 비해 <슬램덩크>에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하면서 남자독자들 뿐 아니라 여자 독자들의 관심까지 끌게 된다. 그동안 순정만화에서나 보아오던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미소년’과는 전혀 다른, 땀내 나고 튼튼한 ‘미남자’들을 소년만화에서 발견한 것이다.
여자들은 알 것이다, 열심히 운동한 남자가 얼마나 섹시한지! 목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과 다부진 팔뚝, 그리고 살짝 풍기는 체취… 그리고 금녀의 구역인 ‘운동부’에서 남자들이 직접 살을 맞부딪히며 쌓는 우정은 여자들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가끔 묘한 판타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후후후.
지금은 최고의 순정만화가로 추앙받는 ‘요시나가 후미’ (대표작: <서양골동양과자점>, <어제 뭐 먹었어?>) 도 아마추어 시절에는 정대만과 권준호를 커플로 엮는 동인지를 만들어서 유명해졌다. 요컨대, 남자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거기서 싹트는 우정이 남자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마음도 울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슬램덩크>는 미소년들을 내세운 소년만화의 효시를 알린다.
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는 거야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여자에게 인기 있는 스포츠만화’가 생겼으니- 바로, <테니스의 왕자>다. 이 무렵 스포츠 장르 이외에도 <윙건담>이나 <최유기> 등 본격적으로 여성독자들을 노리고 만든 여성향 작품들이 소년만화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고스트 바둑왕>이나 <디그레이맨> 등, 점점 소년 만화 잡지에서 연재되지만 소년보다 소녀들에게 더 많이 읽히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게임이라는 장르가 성장하면서 소년들이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소년만화는 생존을 위해 ‘먹히는 장르’를 만들어 소녀들을 노렸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든 먹혀들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근성을 외치는 열혈 남자 주인공보다는 ‘그냥 원래부터 대박 잘난 남자 주인공’을 원했다. 원래 같았으면 끝판왕 스테이지에 있거나, ‘서태웅’처럼 주인공의 엄친아 라이벌쯤 돼야 하는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니즈(needs)에 따라, 쿨 미남 천재들은 소년 만화를 지배하게 된다. ‘데스노트’의 라이토나 ‘코드기어스’의 루루슈도 그런 맥락의 라이벌형 쿨미남계 주인공이다.
<테니스의 왕자>의 작가 ‘코노미 타케시’도 연재 전에는 날 때부터 엄친아인 ‘에치젠 료마’가 아니라 ‘토오야마 킨타로’ 같이 야생적이고 즐거운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세에 편승해서 쿨 가이계 주인공과(오죽 쿨했으면 주인공 기술이름도 COOL 드라이브겠어?) 아예 천재라고 이름 붙은 주조연들을 내세웠고, 결론적으로는 성공했다.
주인공 세이슌 학원만해도 천재 딱지를 붙이고 나온 에치젠 료마, 데즈카 쿠니미츠, 후지 슈스케 등의 인기는 언제나 상위권이었고 오히려 전형적인 점프 열혈계인 카이도 카오루, 모모시로 타케시 등의 인기는 바닥을 쳤었다. 같은 의미로 열혈라인이었던 후도미네-성루돌프-야마부키 중학교까지는 그 흥행이 저조했지만 어느날 갑자기 ‘호스트’ 이미지를 내세운 천재 귀족 집단 효테이 학원을 등장시키면서 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테니스 치라고 했더니 전쟁터를 만드는 중학생들
이런 대세로 인해 <테니스의 왕자> 뿐만 아니라, <쿠로코의 농구>도, <Free>도, 지난 몇년간 등장했던 스포츠만화치고 쿨한 천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만화는 없었다. (예외를 찾자면 <아이실드 21>이나 <크게 휘두르며> 정도일까) 초반에는 전형적인 소년만화로 시작했을지라도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훈련, 성장, 대결 같은 스포츠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는 캐릭터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다.
게다가 기존의 ‘아다치 미츠루’ 계열 히로인. 즉, 남자캐릭터들 간의 다각관계 러브라인을 형성하며 소년들의 대결에 경쟁동기를 부여하던 히로인이 사라진다. 스포츠만화의 꽃이었던 어장녀가 매장당한 것이다! 여자들이 미워할만한 청순가련형 히로인은 사라지고, 대신 섹시한 매력을 가졌지만 남자 캐릭터들의 관계에 끼어들지 않고 해설자로 머무는 여자캐릭터들이 홍일점으로 자리잡았다. (쉽게 말해 채소연은 사라지고 한나만 남았다)
여자 히로인이 사라짐에 따라 남자캐릭터들은 점점 예쁘고 잘생겨진다. 심지어는 아예 대놓고 여성향을 노려서 <쿠로코의 농구>는 농구게이, <Free>는 수영게이라고 불릴 정도다. 하지만 정작 여성독자를 너무 노골적으로 ‘노리고’ 만든 것은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모두 속으로는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정면으로 부딪혀 오는 ‘열혈’이.
전통 열혈 스포츠 만화의 귀환 <겁쟁이 페달>
<진격의 거인>, <킬라킬>- 최근 크게 히트친 일본 애니메이션은 모두 열혈을 외친다.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유지하는 꽃미남 주인공들의 홍수 속에서 사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더러워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땀에 범벅이 되는 솔직한 소년들을! 그리고 드디어… 지난 십년간… 쿨한 천재 미남 주인공의 시대가 끝나고, 미숙하지만 바보 같을 정도로 피 끓는 소년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그런 니즈에 꼭 맞게 등장한 것이 바로 <겁쟁이 페달> 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만화 자체는 2008년도 발매였는데, 2013년에 넘어와서야 확 뜬 이유는 2013년의 애니메이션화와 실사 2012년의 무대화의 영향이 큰 것일까? <테니스의 왕자>가 그러하였듯이.
그렇지만 <겁쟁이 페달>은 기존의 열혈 스포츠물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다. 상식적으로 열혈과 함께 따라오는 가치는 근성이다. 그렇지만 겁쟁이 페달은 ‘즐거움’을 근성보다 앞서는 가치로 꼽는다.
요즈음의 무기력한 20대, 소위 88만원 세대들이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이 있다. “우린 안될거야 아마.”
한때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던 이 짤방의 유래는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영화에서는 대표적인 점프계 소년만화 <나루토> 가 언급된다.
“내가 요즘에 나루토를 보고 있는데, 느낀게… 존나 열심히 안하면 안될것 같애. 근데 우린 열심히 안하잖아. 우린 안될거야. 아마.”
이 서글픈 삼단논법은 20대 젊은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슬프지만 ‘우정, 노력, 승리’라는 점프계 소년만화의 3대 테마는 더이상 요즈음의 소년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만화로 도망친 오타쿠들의 상당수는 친구도 없고, 노력할만한 에너지도 없고, 당연히 승리 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루토>나 <원피스>의 루피처럼 동료가 있고, 굴하지 않는 에너지를 가진 승리자들은 그런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지만 <겁쟁이 페달>이 말하는 열혈은 좀 다르다. 네가 강백호 같은 천재가 아니어도, 왕종훈 같은 근성이 아니어도, 단지 즐길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얘기한다. 겁쟁이 페달의 등장인물, 호탕한 성격을 가진 열혈소년 ‘나루코 쇼키치’는 소심한 오타쿠이자 스포츠포비아인 주인공 ‘오노다 사카미치’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려면 진짜로 끝까지 하는겨! 하지만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그만두면 되는겨.”
“서는 것도 나가는 것도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 그게 자전거야!”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그만두면 된다'”니! 세상에 이런 스포츠만화는 본적도 없다! 이렇게 주인공 오노다는 페달을 밟으면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자전거의 세계에 희열을 느끼며 빠져든다. 그 진심이, 심금을 울리는 신파는 하나도 없는데 남자들의 땀과 근육과 우정과 눈물에 감동해서 독자를 울게 만든다.
<겁쟁이 페달>을 다 볼 때쯤이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꼭 자전거를 사고 싶어진다는데, 그 말이 참말이었다. 바둑만화를 본다고 바둑 두고 싶어지는 게 아니고, 테니스만화를 본다고 테니스 치고 싶어지는 게 아니지만, 이 만화는 다르다. <겁쟁이 페달>을 읽으면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고 싶어진다.
여성독자가 남성독자에게, 이 ‘소년만화’는 안심하고 봐도 된다고 추천하는 상황은 정말 아이러니 하지만, 쿨몽댕이로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쿨한 스포츠만화에 질렸다면 꼭 <겁쟁이 페달>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느끼기를 바란다, 언제나 갈망했던 ‘열혈’을.
도움 주신 분: 전진석 /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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