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 씨의 미래는 표면적으로는 그리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경제 사정도 나쁘지 않고, 육아에도 비교적 충실한 남편이 있고, 경력 단절이 일어났지만 재취업할 일자리도 있다. 그렇다면 김지영 씨의 인생은 다시 날개를 달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여성들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전히 주 양육자를 여성으로 가정하는 현실에서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경력단절이 된 기간을 만회하기 위해 남자 동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하지만, ‘유리천장’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할지도 모른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애 키우는 엄마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라는 무언의 멸시를 모두 견뎌야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워킹맘이 지금도 겪는 고통을 김지영 씨라고 피해갈 리 만무하다. 10년 후 김지영 씨는, 정말 괜찮을까?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또 고민을 해결해줄 ‘언어’
콘텐츠 제작 사업체를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민혜영 씨는 ‘김지영’ 씨의 미래를 사는 여성이다. 10년 전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했을 때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어려웠고, ‘아이에 대한 심적 부채감’이 커지자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전업주부로 3년을 살던 그는 창업하면서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답답하기만 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회사 업무와 집안일을 모조리 도맡아 하면서,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뒤죽박죽’ ‘우왕좌왕’인 삶을 버텨내던 상황이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그가 찾은 것은 ‘책’이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그는 페미니즘을 ‘돌파구’로 삼게 된다. ‘페미니즘 교과서’라고 평가받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고 나서다.
상처의 치유는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춰내어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렇게 민혜영 씨는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또 고민을 해결해줄 ‘언어’로 페미니즘을 선택한다. 이후 만 3년 동안 꾸준히 페미니즘 책을 읽던 그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하며 공부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 공부의 중간 결과물로 낸 책이 바로 『여자 공부하는 여자』다.
이름처럼 이 책은 고전부터 신간까지, 다양하고도 넓은 범주의 ‘페미니즘 책’을 저자가 소개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책 소개가 특정한 이론이나 혹은 학자의 권위에 기반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친근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저자는 고전들을 읽고 난 뒤의 의문과 혼란스러움을 솔직하게 밝히기도 한다. 자신을 둘러싼 ‘여성혐오’에 온몸으로 맞서온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직관적인 통찰이 인상적이다. 그는 학자들의 전복적인 사유가 실제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185쪽)고 고백하기도 한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책의 내용을 자신의 경험에 엮어서 사유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쓴 『보이지 않는 가슴』은 돌봄의 비가시화를 이야기하며 ‘돌봄 불이익’과 ‘아이는 (사회적) 공공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언어의 레퍼런스를 따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
이 책의 내용을 저자는 자신의 ‘녹색 어머니회’ 경험을 통해 풀어낸다.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만 보더라도 아이는 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인적 자원이자 공공재다, 그런데 정작 사회는 ‘아이는 네가 낳고 싶어서 낳았다’는 식으로 치부하며, ‘녹색 어머니회’처럼 어머니에게만 아이에게 책임을 다하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1년에 한두 번인데 그것도 못 하냐고. […] 그렇다면 묻겠다. 왜 그 좋은 일을, 1년에 한두 번밖에 하지 않는 일은 당신은 하지 않느냐고. ‘선생님도’ 하지 않고, ‘아버지’도 하지 않고 동네 ‘어르신’도 하지 않는데 왜 ‘어머니’만 해야 하냐고. 그리고 ‘하는’ 이들이 왜 ‘하지 않는’ 이들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하냐고.
- 215쪽
또한 기혼여성이 겪고 있는 ‘시간 부족’ 현상에 저자는 앨리 러셀 혹실드의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 세 권을 엮어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워킹맘이라면 앞의 세 권에 나오는 모든 사례를 자신의 사례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과 같이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면서 시간을 쪼개 책을 썼던 『타임 푸어』의 저자에 연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타임 푸어’ 생활을 증언한다.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에 모두 할 일이 있고 그것들을 처리하면서 갈가리 찢기는 감각에 시달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했다. 가끔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라도 만나면 정신줄 놓고 푸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내가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 42쪽
이어 페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소개하면서 그는 “여성들은 언어가 없다고 말하는데, 네가 말하는 것이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한 교수의 말에 반박한다. 자신을 ‘맘충’이라고 부르거나 ‘일차 돌봄 노동자’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대항하고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과거에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서 ‘지배자의 언어’를 내면화하려 했다고 고백한다. 여성 동료가 아이 때문에 연차를 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육아 휴직으로 승진이 누락된 여성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들이 언어로 말하지 않는 이상 재단되고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을 알게 되면서 페미니즘이 그에게도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그 언어의 레퍼런스를 따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상대성의 차원을 언어로 로직화하고, 교차성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가지며, 교차성을 횡단하면서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이렇듯 저자는 페미니즘 책을 꼭꼭 씹는다. 잘 넘어간다고 빨리 먹지도 않고, 몸에 좋다고 꿀꺽 삼키지도 않는다. 자신만의 시각과 경험으로 책을 소화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책을 두 번 세 번 더 들여다본다. 그런 점에서 그의 ‘페미니즘 공부법’이 담긴 이 책은 10년 후의 김지영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다. 읽고 쓰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꿔내고, 자신의 아픈 몸(정희진의 표현)에서 우러나온 인식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그의 모습은 페미니즘이 ‘자유’를 줄 수 있다는 명확한 근거다.
아마 『82년생 김지영』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당시 전업주부였던 그들이 ‘워킹맘’이 되고, 틈을 내어 페미니즘 스터디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까. 아마 집에도 수학책(방문한 집의 엄마가 스트레스받으면 푼다던)이 아닌 페미니즘 책이 가득 꽂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도 이미 ‘부너미’나 ‘정치하는 엄마들’ 등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기혼여성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한다. 책 제목처럼 ‘여자 공부하는 여자’들이 곳곳에서 세력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유다.
저자는 “내가 읽은 책의 레퍼런스로 내가 지을 집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믿는다”며 “나는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읽는다면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라고 책 말미에 밝힌다. 멋진 선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10년 후 모습은 아마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함께 집을 지어가는 페미니스트’였으면 좋겠다.
덧
그렇다면 착하지만, 실제로 김지영 씨의 인생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하던 정대현 씨의 10년 후 모습은 어떨까. 적어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김지영 씨가 받던 ‘돌봄 불이익’을 통해 되레 ‘반사이익’을 얻으며 살던 날들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들도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배워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정대현들’이 여성들과 함께 집을 쌓을 것인지, 아니면 외롭게 고립될 것인지 부디 잘 결정하시길 바란다.
※ 해당 기사는 웨일북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