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마세요. 기다리십시오. 구조하러 옵니다”
안내데스크의 방송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구명조끼를 나누어 입고 선실안에서 기다렸다. 방송과 달리 배는 10여분 만에 급격히 기울어 탈출할 수 없게 됐고 마지막 순간,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기울어진 갑판을 기어오른 몇몇의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세월호의 침몰. 어이없는 초기대응의 미숙함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른 채 보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피해자 가족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정부는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며 구조노력은 여전히 서툴고 더디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정확히 위와 같은 상황이 대구 중앙로역에서 벌어진 것을 기억하는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날 대구에서도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열차가 곧 출발하오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승객들은 최소 10분이 넘는 시간을 연기 자욱한 열차 안에서 침착하게 기다렸고, 결정적인 탈출 타이밍을 놓쳐 탈출하지 못한다. 초기대응의 실패로 총 사망자 192명 부상자 148명을 낸 대구지하철 참사였다.
위험에 빠질 때의 집단 행동
두 사고에는 거울을 댄 듯 공통점이 있다. 손쓸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결정적인 초기 탈출시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대구지하철사고 생존자들은 최소 10분, 탈출할 시간은 충분했다고 증언했다. 세월호 역시 배가 가라앉기 전 20분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너도나도 밖으로 뛰쳐나올 만도 한데 사람들은 배가 침몰할 때까지 배안에서 나올 줄 몰랐다. 왜일까? 여기에는 ‘부정확한 정보’를 처리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판단 체계가 숨어있다.
EBS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 에서는 2009년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20대 대학생 5명에게 10분간 문제를 풀게 하고 감독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출입문 틈새로 연기를 들여 보내 방안 가득 자욱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 실험의 피험자는 한명, 나머지 4명은 실험을 돕는 조교이다. 조교들은 상황에 대해 동요하지 않도록 미리 행동을 맞추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실험을 4번이나 반복했지만 놀랍게도 매번 피험자들 누구도 방을 뛰쳐나오지 않았다. 앞조차 보이지 않는 자욱한 연기 속에 기침을 하면서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그대로 10분간 자리를 지켰다.
더 재미있는 것은 후속실험이다. 4명의 조교들 없이 피험자 1명만 문제를 풀게 하고 같은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번에도 피험자는 방을 뛰쳐나오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을까? 후속실험의 모든 피험자들은 본 실험과 대조적으로 불과 18초 만에 모두 방을 뛰쳐나왔다. 10분과 18초. 두 실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집단’의 유무였다.
‘집단’의 힘
“연기가 들어오는데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불이 난 것 같은데 내가 타고 있는 열차는 아닌 것 같아”
“곧 출발하겠지 뭐, 걱정 마 엄마”
대구지하철사고 당시 피해자들이 지인들과 대화한 내용이다. 부정확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심리적 체계는 외부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판단할까? 밖에서 자욱한 연기가 들어오고 파도가 몰아치거나 배가 기울고 있다. 만약 이 불안한 개인이 집단 속에 있다면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중 하나는 ‘주위 사람들’이다. 즉,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현재 상황에 대해 판단 내리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은 기본적으로 타인이 늘 나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속에서 영향 받는 개인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약 ‘기다리라’는 안내방송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다면, 개인들은 ‘위험한 상황인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서로를 살피면서 ‘내가 틀렸구나. 별거 아닌가보다’ 하고 이내 자기 생각을 바꾼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한 안정제가 되는 셈이다.
대구지하철사고의 생존자들은 방송을 믿지 않고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번 사고 역시 생존한 사람들은 방송을 신뢰하지 않고 집단을 깨고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상황이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이 상황을 통제한다!
상황은 인간을 압도할 만큼 강력하다. 관찰자로서 밖에서 들여다볼 때와 달리 누구나 상황 속에 들어가면 옳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상황 속의 집단은 늘 무기력한가? 그렇지않다. 집단이 힘을 합칠 때 개인이라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도 있다. 2005년 10월 지하철 2호선 열차와 선로 사이에 낀 노인을 발견한 시민들 백여 명이 다같이 “하나, 둘, 셋” 구호를 외치며 열차에 매달린 일이 있었다.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열차가 기울고 노인은 구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위의 경우 3명 이상의 누군가 행동을 촉발했을 때 일어났고 3명은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이다. 즉, 한 사람의 영웅이 짊어진 책임감이 아니라 잘 짜인 재난시스템과 대피 메뉴얼, 그리고 상시적인 훈련이 있을 때에야 위와 같은 집단의 힘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사고의 화살을 ‘선원들의 무책임한 탈출’로 돌리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선원들의 행동은 물론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결코 핵심은 아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아버린 국가의 총체적 안전 시스템에 있다.
대구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침몰사고에는 초기대응의 실패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통제되지 않은 여러 구멍들이다. 철도공사의 인력감축으로 인한 1인 승무제와 비정규용역으로 채워진 세월호 선원들은 마치 데자뷰 현상을 보듯 무관하지 않은 구멍이요, 안전보다 수익을 택한 기업들의 고삐를 풀어준 정부의 규제완화 역시 놔두면 곧 다른 누군가를 집어삼킬 구멍이다. 선박연령제한 완화, 직원안전교육규정 완화, 수익과 연결된 비정규직 고용…
이런 크고 작은 구멍들이 모여 결국 세월호에 큰 구멍을 만들었고 끝내 침몰시키고 말았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된 선박완화규제에 이어, 이번 세월호 사고를 겪고도 해양수산부는 또 다른 규제완화법안을 추가로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소를 한번 잃으면 외양간을 고치기 마련인데 우리 정부는 소를 여러 번 잃고도 외양간에 더 큰 구멍 낼 궁리만 하는 것 같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든 법의 근본인 헌법은 안전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고 여기에는 수익이나 효율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우리는 늘 희생자들을 숫자로 접한다. 허나 차마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백 명의 ‘세계’가 가족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미 허술한 외양간에 또 다른 구멍을 만들지 말고 지금이라도 튼튼하고 안전한 공간을 보장하라. 상황은 인간을 지배하지만, 인식되고 대비된 상황은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
* 이 글은 2009년에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원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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