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극히 평범한 34살 남성 회사원이다. 내 연애 상대가 남자인 것만 빼면 말이다. 물론 난 지금 싱글이지만. 흑흑. 아무튼 다시 말하면 난 매우 평범한 게이이다. 앞으로 이 공간을 빌려서 나의 이야기, 그리고 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성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라든가, 일부 이 사회의 무례한 이성애자들을 꾸짖으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난 그렇게나 이타적이고 적극적인 게이는 아니니까. 이성애자 부부들처럼 신혼 주택 자금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상당히 안타깝지만,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지금도 어디선가 인권 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맡겨 두고자 한다.
난 그냥 내가,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게이들의 대표로서 게이들은 다 이렇다며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그냥 나와 내 주변에 한정된 얘기다.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인지 물어 볼지도 모르겠다. 굳이 답하자면, 난 게이에 대한 여러 가지 스테레오 타입들 중에서도 여러 매체를 통해 가공되어 온 우울하고 어두운 이미지가 싫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행복해지는 요소들 중, 연애는 상당히 중요한 항목이다. 하지만 그 항목을 충족하는 조건이 좀 다르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게이가 우울하다면 적어도 그냥 게이라서 우울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당신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어쩌면 당신과 매우 가까울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당신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겠는가. 나도 매일 아침에 출근을 하고 점심은 뭐 먹을까 고민하고 월급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에 한탄하고, 복권을 사면서 허황된 기대를 하는 그런 인간이다.
내가 게이라고? 언제, 어떻게, 왜 게이가 되는가.
따지고 들자면 된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내 경우, 어떠한 인과관계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랬던 것을 알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언제일까. 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는 시기가 온다. 개인 차는 있지만 빠르던 늦던 분명히 온다.
일반적으로 연애 감정에 눈 뜨는 사춘기에 알게 되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생각보다 꽤 나이가 들어야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다. 한국 남자로서 군대라는 특별한 시공간에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결혼 이후 처자식이 딸린 상황에서 깨닫는 사람들도 있다.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는 감히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난 늦을수록 나쁘다고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이성애자들의 세계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은 그 나이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빨리 끝내는 편이 행복하다. 이걸 다른 게이들보다 늦게 시작하면 그 세계에 신속하게 흡수되지 못한다는 걸 뜻한다. 그럼 그만큼 내 소중한 게이 라이프의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게이인 것을 알았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운 게이 라이프를 만들어 가야 하는가가 남았다. 이건 역시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직접 습득해 나가야 한다. 역시 한 살이라도 어린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잘 팔리고 어른이 되어 다시 겪는 성장통은 더 아프기 때문이다. 이미 가치관이 굳어져 버린 나이에, 그간 믿어왔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적응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의 연애 메커니즘은 남녀간의 연애이며, 결국 결혼이라는 사회적이고 법적인 제도 안으로 귀결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게이들은 학습해 본 적이 없는 연애를 해야 한다. 연애의 최종 목표이자 또 다른 행복의 시작점이라고 주입되는, 제도 안에서는 답이 없는 연애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연애의 목표가 다르니 당연히 과정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성애자들의 이론을 실전에 대입하다가는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 아, 이건 어느 정도는 이성애자들도 마찬가진가. 여하튼 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이 세계에서의 어른이 된다. 그렇게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진짜로 게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트로만 하고 끝내려니 뭔가 아쉽다. 그래서 뭔가 우리 세계의 특징이라도 하나 써야지 싶다.
게이들의 쩌는 인맥
나는 크게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자들이 보는 나는 문어발식 인맥 경영자다. 나의 지인 성분 스펙트럼은 감히 그들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란다. 내 친구들은 각종 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며, 전문직부터 예술가까지 다양하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성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한 곳에 모이기 때문이다.
딱히 사교 활동에 열을 올리지 않는 나 정도의 게이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고 하는데, 실제로 매우 사교적인 게이들, 또는 인기 있는 게이들의 인맥은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바야흐로 21세기,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발전한 현재의 소셜네트워크 시대에선 이 발 넓음이 국내에 그치지 않는다. 글로벌 게트워크! 이성애자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내가 얻은 새로운 인간관계는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수 많은 관계들이 딱히 어떤 동질감에서 오는 가슴 뭉클한 동지애인 것은 아니란 것만 말해 두겠다.
그럼, 일단 나를 통해 게이들의 하루를 재구성해 보자.
러시아워 때 전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연다. 조금 전까지 단체 채팅방에서 조잘대던 내용들이 시각정보로 재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저녁 식사의 메뉴, 그 다음 유명한 홍대 스위츠 까페의 커피와 디저트, 그리고 거기 모인 게이들의 작위적으로 연출된 표정들이다. 아마도 모두를 만족시킨 A컷을 얻기 위해 버려진 수많은 B컷들이 있었을 것이다. 야! 나 눈 감았잖아! 잠깐만, 이건 나만 못 생기게 나왔어! 등등의 말들로 검열되었겠지.
다 큰 남자들이 모여서 각도 잡고 표정 만드는 모습들은, 까페 안의 다른 사람들에겐 낯설어 보일 수도 있겠다. 요즘은 이성애자 남성들도 그렇던가? 여튼, 그런 고민 쯤은 시급한 당면 문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 줍고 앉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페이스북에 올라간다는 것은 나도 모를 다른 게이들의 눈에 띌 수 있다는 뜻이다.
나 역시 사진 속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낯선 얼굴이 있다. 페이스북의 태그된 이름을 살펴본다. 분명히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꽤 귀엽다. 페이스북의 친구 사이가 아니어도 볼 수 있도록 오픈되어 있는 사진이 좀 있다. 다행이다. 찬찬히 훑어보자. 짧은 머리, 아래로 살짝 쳐져 순해보이는 눈매를 만드는 눈꼬리, 쌍커풀이 없는 적당한 크기의 눈, 진한 눈썹,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대, 구렛나루에서 턱으로 내려오는 수염. 얼굴 뿐인가. 역시 자랑하고 싶었던 듯, 몸매가 드러나는 사진들 속에서 얇은 티셔츠 안을 꽉 채우는 두꺼운 가슴과 팔의 윤곽이 제대로 어필하고 있다. 개로 말하자면 대회 나가는 그레이트 피레니즈라던가 골든 리트리버라던가 그런 느낌이다.
댓글을 본다. 댓글의 내용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팬들이 찬양에 가까운 칭찬을 늘어놓고 있다. 게이스북은 원래 그렇다. 이제 신상명세를 좀 털어보자. 다시 메신저로 돌아간다. 언제나 피곤하다고 찡찡대는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묻자, 역시나 폭포수처럼 진술이 쏟아진다. 지방 게이란다. 서울에 놀러 왔다고 한다. 나이, 직업, 현재의 연애 상태, 전 애인 등등. 나도 다른 게이에게 털리고 있겠지만 괜찮다. 좀 더 털어 줘.
그 와중에 대화 참여인 A가 화제를 바꾼다. 화장품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그는 우리를 위해 챙겨 둔 화장품 샘플을 하사하겠다며 티 타임을 제안한다. 물론 각각의 피부 타입을 체크하는 것은 필수다. 공짜로 받는 샘플이라도 아무거나 들이밀면 욕 먹으니까. 우린 그렇다. 가차없다.
피부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화제는 피부 트러블과 노화에 대한 걱정으로 넘어간다. 여행을 앞둔 대화 참여인 B는 지인인 ‘이쪽’ 의사 형님에게 보톡스 시술을 받기로 했다며 걱정 반 자랑 반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물론 아는 사이니까 디스카운트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마 돈은 받지 않겠지. 왜냐하면 그 의사 형님은 B를 꽤 귀여워하니까. 화제는 이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피부 관리에서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텔 예약은 잘 했는지, 항공사는 어떤 회사를 이용하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자세히 물어본다. B는 현지에서 호텔 관련 일을 하는 ‘이쪽’ 지인을 통해서, 괜찮은 방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잡을 수 있었다며 자랑하고 있는 중이다. 다들 가까운 미래에 자신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추궁해 본다.
이때 대화 참여인 C가 자신의 회사에서 현재 외주 작업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헬프를 친다. 모두들 신속하게 해당 작업이 가능한 몇몇 후보들을 거론한다. C도 그 자리에서 적임자를 선별한다. 상황을 보니 미모 레벨로 적임자를 결정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직권을 남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대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화장품 샘플 하사를 위한 저녁 식사가 결정되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분위기 좋고 가격도 합리적이고 맛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린다. 아마 투덜대기 올림픽이 있다면 맛 없는 것을 비싸게 먹은 게이가 우승을 할 것이다. 이때 대화 참여인 D가 자신의 지인이 쉐프로 일하는 레스토랑에 갈 것을 제안해 왔다. 쉐프 권한으로 한 두 가지의 메뉴도 서비스로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레스토랑이 얼마 전 TV 맛집 프로에도 소개되었다는 말을 전하는 D는 반쯤 호들갑이다. 우린 모두 잊지 않고 같은 질문을 해 준다. “그래서 그 쉐프님은 잘 생겼어?”
대화방에 지금 들어온 E는 새로운 여성 의류 사업을 런칭했다고 말문을 열며, 이러저러한 여성 모델이 필요하다고 한다. 게이에겐 여성 인맥도 많다. 누군가가 나서서 “나 거기에 딱 맞는 레즈비언 한 명 아는데.” 이렇게 E도 해피해진다. 여성 인맥이라고 하면, 게이 프렌드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일반 여성들이 귀찮게 굴 거라고들 예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 귀찮은 일을 당한 적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한들 그게 뭐 대순가 싶다. 친구가 되고자 하는 동기만 놓고 보자면 나도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거든.
A가 나에게 무엇인가 부탁을 하려는 것 같다. 이번 주말에 외국 친구가 여행을 온다며 자신보다 영어 실력이 나은 나에게 함께 주말에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요청한다. 이 바닥에서 꽤 인기 있는 A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해외에서도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복 받은 친구다. 이 친구에게 들러붙는 해외 게이들도 역시 다양하다. 두바이에 호텔을 가진 백만장자에서부터 전 세계를 걸어다니는 오지 여행자까지… 여튼, 흔쾌히 퀘스트를 수락하자. 평소에 안 쓰는 영어도 다시금 체크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다, 이런 기회로 외국인 친구들을 만들어 두면 나도 해외 여행 중에 분명히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될 테니까. 그러고보니 A는 예전에 틈만 나면 해외 여행을 갔었다. 이 A의 해외 여행기는 꽤나 스펙타클한 게이 판타지이므로 나중에 또 다룰 예정이다.
대충 이렇게 하루의 페북과 메신저는 흘러간다.
여기 나오는 지인들의 지인들은, 근미래에 곧 나의 지인이 될 것이다. 내가 그 의사 형님에게 필러 시술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쉐프의 서비스를 단독으로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며, 어떤 레즈비언 모델과 친해져서 술을 마시는 날도 올 것이다. 이렇게 게이들의 네트워크는 계속 넓어진다. 친구도 많고 지인도 많다. 그런데 난 현재 애인이 없다 ㅠㅠ
참. 인맥 넓다고 자랑질만 하다가 끝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게이로서의 나한테 좋은 점이 뭘까 생각하다보니 처음 떠오르는 것이 ‘다양한 인맥’이었다. 단점들은 이 글을 굳이 찾아 읽는 여러분들이 더 잘 짐작할 테니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음 화부터는 본격적으로 생생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줄 예정이니 심각하지 않게,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
[1] 피처이미지 출처: http://www.sizedoesntmatter.com/factoids/gay-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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