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강장동물이다. 몸 자체가 입이며 곧 항문이며 여론을 먹고 싼다.
비록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밉상이긴 하지만, 그런 악역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언론이 사회를 거리낌없이 비판하는 건 그들이 한점 티끌이 없어서가 아니다. 왕을 비판하는 사간원이라고 정말 털어서 먼지가 안 났겠는가. 비판을 통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언론은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섬세함 없이 싸움을 부추기는 언론의 모습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들은 그런 섬세함이 없다. 타블로이드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른바 ‘정론지’라는 언론도 그렇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말리는 척 하며 이것저것 말을 건네지만 속마음은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 이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너를 위해서 말해주는 건데..’ 하면서 전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하고, 저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이런거 웬만하면 말 안하려고 했는데..’ 하면서 싸움을 붙인다.
그렇게 국민들의 화를 더욱 부추긴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오해를 풀고 화합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란을 더 조성한다. 싸움을 말리는것 같은데 이상하게 분위기는 더 험악해진다. 기자들은 미처 논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조차 ‘논란이 예상된다’고 올리면서 욕해주길 바란다. 여러분, 여기에 똥 좀 보세요. 빨리 와서 욕좀 해주세요! 광고도 클릭해주시고요.
국민은 물론 가족들의 아픔을 부추기는 언론
큰 사고를 당한 피해자 가족이나 지인들이야 당연히 사석에서 못할 말이 없을 것이다. 딱히 가해자가 없는 자연재해에서조차도 분노를 받아줄 대상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쌍욕과 고성이 오갈수도 있다. 선진국과 비교해 아쉬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들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은 아니다. 누가 감히 그 슬픔을 가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성을 잃은 유가족의 통곡을 그대로 기록하고 글자 그대로 전하는 것이 언론의 최선인가. 신원을 확인한 어머니의 비명 소리를 녹음해서 24시간 틀어주는 것이 특보인가. 그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두 번 다시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말라는 통곡을 전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할 말 못할 말 가릴 정신이 없는 피해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울부짖음을 받아적고,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으면 속을 슬슬 긁어서라도 반응을 받아내고야 마는 것이 우리네 언론이다. 말의 찌꺼기들을 싹싹 긁어모아 자기가 의도한 틀에 부어넣고 벽돌처럼 찍어낸다.
언론은 예술이 아니다
편지에 굳이 신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오려붙이는 이유는, 필적이 들키면 켕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콜라주도 예술의 범주인데 뭐가 문제냐는 말은 비겁한 변명이다. 슬픔에 울부짖는 소리를 입맛대로 오려붙이는 언론의 의도와 방법 모두가 잘못됐다.
지금 국민에게 필요한 건 알 권리가 아닌 모를 권리다.
원문: 무권해석 /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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