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소개꾼’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배봉기 할머니는 소녀상이 대표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될 수 없다.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소녀가 아니었던 배봉기 할머니의 피해 사례는 예외 사례 또는 주변 서사로 취급받기 일쑤다. 배봉기 할머니가 설령 자발적으로 몸을 팔았던 이력이 있다 하더라도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피해는 함부로 부정돼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기간 내내 신변이 구속됐을 뿐 아니라 성 노동에 대한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해방 후에는 일본과 조선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졸지에 무국적자 신세가 된 배봉기 할머니는 미군 관할이었던 오키나와에서 어려운 생계를 이어갔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재편입되면서 추방당할 뻔한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이 한때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돌아갈 곳이 없던 배봉기 할머니를 지켜준 건 한국 정부나 시민단체가 아니었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웃 주민들이었다.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을 귀담아듣고 꼼꼼히 기록한 이는 저널리스트 가와다 후미코였다. 배봉기 할머니의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배봉기 할머니와 처음으로 밥을 같이 먹었던 손님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야마타니 데쓰오였다.
그 무렵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지 못했다. 여성지의 수기 기사와 신문의 광복절 특집 기사 형태로 이남님·박순단·노수복·배옥수 할머니의 피해 사례가 소개됐을 뿐이다. 그때까지 한국 사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피해 호소를 그저 불운한 개인사 정도로 여겼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1년이면 당시 직장 여성이 직장 내 ‘미스’ 호칭을 문제 삼던 시기다. 말하자면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한국 사회의 오랜 성차별과 만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셈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 배봉기 할머니는 세상을 서둘러 떠났다. 배봉기 할머니의 시신은 며칠 뒤에야 발견됐다.
마침 어제는 정의기억연대에서 주관하는 수요집회가 있었다. 밤늦게 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때우는데 TV 뉴스에서는 수요집회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의 소녀상 철거 사태로 제법 많은 인파가 모였던 모양이다. 일본 우익의 비열한 조치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마땅하다. 그런데 수요집회 관계자는 그 분노를 부추기듯 말했다.
일본은 한 번도 공식 사죄하지 않았고, 법적 배상도 하지 않았다.
그 수요집회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담화나 편지를 통해 피해당사자에게 몇 차례 사죄했다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았다. 일본 국회 결의가 없었으니 법적 배상이 아닌 건 맞지만, 일본 정부가 에둘러 관여한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피해당사자가 있다는 사실도 얘기하지 않았다. 뉴스 화면에 ‘오늘이 마지막 수요일이길’이란 팻말이 클로즈업될 때는 그 팻말의 진정성이 감히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뉴스는 관계자의 말을 아무 검증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피해당사자의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공식 사죄든 비공식 사죄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받아내야 한다. 배상금과 청구권도 제한을 둬서는 안 된다. 다만 『혐오와 수치심』 저자 마사 누스바움의 지적처럼, 상대방을 내 발아래로 굴복시키기 위한 사죄 요구라면 상대방이 사죄를 아무리 반복하고 억만금을 배상하더라도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죄 요구는 피해자 지위를 극복하려는 피해당사자의 의지를 가로막기도 한다.
무엇보다 배봉기 할머니처럼 자신의 피해 사례가 주변 서사로 밀려난 피해당사자는 이처럼 소녀상이 주목받을 때마다 매번 소외당한다. 그렇다고 소녀상을 없애자는 얘기는 아니다. 소녀상이 국제 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환기했다는 성과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 성과에도 소녀상의 반페미니즘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여러 식자의 지적처럼 수많은 피해당사자를 순결한 소녀 이미지에 박제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의를 소녀상이 세워지기 전으로 후퇴시킨 경향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놓고 보자면 앞서 말한 1991년이 오히려 더 다양한 논의가 활발하게 오갔다는 얘기다.
물론 운동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건 일본 정부가 사죄를 안 했고 법적 배상을 안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있는 그대로의 과거사를 물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와다 후미코와 야마타니 데쓰오가 운동 대신 선택했던 일, 그러니까 낱낱의 개인사를 복원하려던 시도는 그 어떤 운동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그 낱낱의 개인사가 주변 서사로 밀려나지 않고 야만적인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상징으로 거듭날 때, 불손한 생각이지만 굳이 소녀상이 필요할까 싶다.
아버지 최부기 씨는 56세에 타계했다는 것, 봉기 씨가 가장 보고 싶어 하던 남동생 용갑 씨는 강원도로 간다며 마을을 떠난 뒤 행방불명이라는 것, 합덕이라는 마을에서 봉선 씨를 만났다는 것 등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마주 앉은 내가 불안해질 만큼 아무 질문도 없이 깊이 체념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봉선 씨가 지금도 여전히 남의 농가에 들어가 살면서 아무 보수도 없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전했을 때 딱 한 마디를 했다.
“가련한 태생이라는 게 이런 것이지요.”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자신들의 계급은 변하지 않는다고, 빈곤이라는 저주에 묶인 자신의 반생을 돌아보기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 가와다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빨간 기와집』, 꿈교출판사
가와다 후미코가 배봉기 할머니의 생애를 추적하려고 배봉기 할머니 고향인 충청남도 신례원(예산군)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의 이야기 중 일부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이었던 배봉기 할머니는 여섯 살 무렵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배봉기 할머니뿐 아니라 온 가족이 남의 집 머슴살이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성이 배 씨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결혼하면서 당시 남편 성을 따라 바뀌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자신과 비슷한 형편의 남편과는 일찌감치 헤어졌다.
배봉기 할머니는 가와다 후미코의 나름 끈질긴 권유에도 신례원 방문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 땅은 끝내 두 번 다시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가셨다.
고향 강가의 빨래터 돌을 꿈에서밖에 다시 보지 못한, 배봉기 할머니의 지독하게 외로웠을 생애에 애도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