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다변화 생존 위해 꼭 필요
국가 간 무역은 일상적이라지만, 평범한 한국인 중 누가 알았겠는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서의 삼성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공정 핵심소재의 일본 의존도가 그렇게까지 높을 줄. 이쯤 되면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라인이 정말 멈출까. 그럼으로써 한국 경제에 큰 악영향이 있을까. 정치 문제를 경제 분야에 끌어들여 시장의 안정성을 교란한 일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염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태풍처럼 커지는 이때, 때늦은 시베리아 기단이 북서쪽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러시아가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에게 일본산보다 순도가 높은 불화수소를 공급할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관련 업계 일각에서는 신중론이 나온다.
러시아산 불화수소를 ‘써본 적 없어서’ 품질과 양산 능력을 확인해야 하고, 일본산 불화수소의 스펙에 최적화된 공정 및 장비를 러시아산에 맞추려면 여러 달이 소요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써본 적 없다’는 말로 무마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한국은 의외로 지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의 기술력을 놀라울 만큼 고려대상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에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인력부터가 적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인력은 많다. 국내와 더불어 주로 미국, 중국, 일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러시아어 가능자는 아예 채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영업, 홍보, 혹은 파견직 형태의 통·번역 쪽에 채용공고가 집중돼 왔다.
러시아어권 국가들은 큰 시장이다. 한국 기업은 이들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인력을 뽑아왔지만, 소재부품을 다각화해서 ‘사들이기 위해’ 인력을 키워본 경험은 별로 없다. 데이터가 부족하고 확보할 생각도 못 한다면, 결정적 위기가 닥쳤을 때 러시아산과 일본산을 비교할 능력도 없다. 양심 있는 전문가들이라면 ‘모른다’ ‘의문이다’보다 더 나은 답은 ‘알아보겠다’고 ‘알아보겠다’보다 더 나은 답은 ‘이미 데이터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기술적 차원의 판단은 최종적으로 업계 전문가들에 달린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기술 차원이 아니어도,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믿는 구석도 없이 그냥 던져본 수준의 제안을 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섣불러 보인다. 러시아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러시아가 국가적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신동방정책에 관한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러시아가 한국과 자꾸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큰 혼란과 충격을 경험해본 러시아는, 뿌찐의 장기집권기에 돌입하고부터 ‘강한 러시아’라는 국가 이미지 재건에 집착한다(이것에는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 지면이 부족한 다소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러시아 국민의 정서적 배경이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 첫째, 유럽의 세계 지배 권력 약화와 중국의 부상으로 중심축이 유럽-대서양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이 지역 국가들에게 강대국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 둘째,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가 있지만 유럽에 인접해있고 인프라가 발달한 우랄산맥 서쪽과 동쪽의 낙후된 시베리아-극동 지역 간 격차가 심하다. 균형 개발을 해야 강해질 수 있고, 이를 위해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협력 강화가 필수적이다.
- 셋째,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국이지만 서방의 경제제재를 겪어 수출시장을 유럽 대신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생산지를 시베리아-극동 지역으로 다변화하고 싶어 한다.
러시아의 수도로 우랄산맥 서쪽에 위치한 마스끄바와
러시아의 제3 도시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나바시비르스끄의 발전상을 비교해보자.
러시아도 시장 다변화 원해
러시아는 자신들의 미래를 이제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보는 상황이다. 능력을 보여주고 싶고, 협력을 강화하고 싶고, 시장을 다변화하고 싶어서 몸이 잔뜩 달아 있다. 그런데 한국이 마중을 나오지 않으니,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는 한국과 파트너십을 강화할 천재일우와 같은 기회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정부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고, 러시아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시장 다변화는 21세기 총성 없는 무역전쟁에서 생존하려면 불가피하게 구축해야 할 환경이다. 뿌찐도 아베도 각자의 방식대로 이점을 깨닫고 각자의 방식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도 위험을 분산하려면 지금 어느 정도의 부담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늦을수록 부담이 커질 것이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거둬들이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규제의 부당함은 주장하되 이면에서는 러시아산 등으로 수입선 다변화가 가능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기업이 당장은 익숙한 길,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제품 재고가 소진되고 생산 라인이 멈추는 시점부터 일정 기간 손실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대비책 없이 일본만 바라보다가 일본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을 때 아무런 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손실은 더 클 것이다. 러시아산 불화수소의 품질과 양산능력이 좋아도 생산 공정을 실제로 돌리려면 여러 달이 소요돼 손실을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러시아산의 품질과 양산능력이 기대보다 안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조차도 러시아의 제안은 일본과의 협상에서 조커로 쓰일 수 있다.
지금은 러시아산을 고려할 때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먼저라는 경제지 일각의 주장은 허튼소리며,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러시아산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일본은 한국에게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내주지 않음으로써 굴복시킬 것이라고 계산하고 규제를 한 것인데, 실은 그것이 ‘대체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그 절대적인 효과의 크기와 별개로 일본제품이 얼마든지 국내산 등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임을 상기함으로써, 일본 언론의 논조를 미묘하게 수출규제에 대한 우려 쪽으로 자극한다.
한편 미국은 한일 간 중재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 ‘대화의 판만 깔겠다’는 입장인데, 내심 삼성과 하이닉스가 주춤하면 업계 3위인 마이크론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고 계산기를 두들기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러시아가 움직인다면 미국이 계속 소극적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은 러시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달갑지 않은 이해관계 역시 있다. 정말로 러시아가 한국에 불화수소를 공급할 분위기로 나아간다면 미국은 마지못해서라도 한일 관계를 중재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미국은 다년간의 양적 완화로 인해 생긴 무역적자를 해소하고자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데, 우선 러시아라는 또 다른 경쟁자의 손발은 당분간 경제제재로 묶어둬야 하는 처지다.
러시아가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해 숨통이 트인다면 제재의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제안은 일본만큼이나 미국을 움직이게 하는 카드가 될 수 있다. 한국은 공식적으로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에 참여하지 않고(반면에 일본은 참여하며 이것이 러시아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불화수소는 대러 제재대상 3대 분야인 에너지, 군수, 금융에 들지 않는다.
한국이 러시아와 거래를 틀더라도, 미국의 심기는 내심 불편하겠지만 드러내놓고 국가 간 자유무역을 방해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이러한 결과가 미국이 한일 관계 중재에 소극적이어서 초래된 결과라면 더욱 그렇다.
러시아 ‘조커 카드’로 활용해야
마지막으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러시아의 제안이 갖는 리스크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번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로 일본의 졸렬함이 욕을 많이 먹지만, 러시아도 비슷한 행동을 유럽에서 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뿌찐의 ‘그럼 오늘부터 끊으세요’라는 유명한 짤방이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이것이란 에너지 무기화 전략을 말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유럽으로 가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는 대부분 우크라이나를 관통하는 파이프라인인 브라더후드를 지나간다), 대러 경제제재에 참여하는 유럽연합 국가들과의 외교적 갈등에 맞물린 것이 바로 이 에너지 무기화 전략이다.
유럽연합이 카스피해-중앙아시아 등에서 에너지 공급원 다변화를 꾀하는 것도, 러시아가 카스피해-중앙아시아 산유국들과 갈등하고 중동정세에 개입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따라서 한국이 불화수소를 러시아산을 통해 다각화를 한다면, 장기적으로 국산화도 함께 진행하면서 러시아산과 국내산의 스펙을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나중에 무슨 이유에서든 러시아와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러시아산에 맞춘 공정을 다시 국내산으로 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추가적인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라는 황금률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당장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미리부터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는 역시 일일이 상술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적 배경이 있지만,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러시아는 일본과 다른 특성이 있어서 아무리 ‘수틀려도’ 한국의 영토를 탐낼 가능성은 매우 낮은 국가라는 점이 단적인 예다(러시아는 주변국에 능력을 인정받고는 싶은 욕구는 대단하지만 땅은 충분히 많은 나라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를 포함한 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교류 협력에 있어서 가장 양적인 성과를 본 시절은 군사정권인 노태우 정부(1988~1992) 시절이었다. 이 시절 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대거 수교하면서 새로이 열린 경제시장은 한국이 돈을 쓸어 담으며 경제 호황을 누리는 데 기여했다. 세월이 흘러 촛불 정부가 들어선 지금, 현 정부는 3년 차임에도 아직 러시아와 접점을 찾을만한 명확한 비전이나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무능력하고 반민주적이었던 박근혜(최순실) 정권조차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신북방정책이 있었고 여기서 연역되는 3대 협력 비전(교통물류 네트워크, 디지털 네트워크, 한류 네트워크)이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 현 정부의 대처는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지적을 하면 어이없게도 정치성향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글쓴이는 누구 못지않게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고 또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뼈아픈 지적도 필요하고 현실을 바로 보는 눈을 뜨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문재인 정부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있다. 정치적으로도 러시아와의 협력 강화는 문재인 정부에게 성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이전 정부들이 러시아와의 양적으로 경제협력을 확대해왔다면, 문재인 정부는 양적 협력뿐 아니라 이전보다 ‘깊이 있는 언어’를 주고받음으로써 질적 협력도 확대하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시장 다변화로 유도하는 성과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불화수소는 그 기회가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