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거법 같은 ‘게임의 규칙’은 여야 합의로 해야 한다는 자유한국당의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거대정당이 다른 소수정당을 찍어누르는 식으로 선거법을 바꿔버릴지 모를 일이니까요. 거대정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법을 바꿔버리면, 거대정당은 더욱 거대해지고, 소수정당은 더욱 쪼그라드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말겠죠.
문제는 이러다 보면 비례성과 대표성, 전문성 등 선거제도의 대원칙이 아니라 각 당의 유불리만 따져 타협안이 나오기 마련이란 건데요. 결국 여야 합의로 해야 한다는 관례도 중요하지만, 그 합의란 건 그냥 국회의원들끼리 샤바샤바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선거제도의 대원칙을 지키기 위한 학계와 연구자들, 시민사회 등의 고민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 같은 경우 지난 12월 ‘연동형 비례대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고 합의했음에도, 올 3월에는 비례대표를 폐지하는 내용의 선거제도 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합의를 위반한 것은 물론이고, 표의 비례성 문제를 헌신짝처럼 내버렸고, 지역구 위주의 선거제도로 인한 작금의 폐단을 오히려 강화하는 안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수의 헌법학자는 이것이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41조 3항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국회가 아무리 까이고 자유한국당이 아무리 극우 정당이 되어간다 해도, 어쨌든 국회는 민의가 그나마 ‘비례성’을 갖고 대변되는 곳이고 이 정도의 극한 대치가 일어난다면 그 법안은 통과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현재 정국의 특이성을 고려할 필요도 있죠. 전임 정권은 국정농단으로 탄핵되었고, 자유한국당은 바로 그 사태의 범인으로서 같이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적어도 30-35% 정도의 지지를 얻는 정당이고, 제가 워낙 잘 틀리는 예언가긴 하지만, 다음 총선에서도 여전히 거대정당의 자리를 유지할 테고요. 자유한국당은 무시할 수 없는, ‘상당히 큰’ 민의를 대변하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이번 패스트트랙이 뭐 전무후무한 사례네 하는 얘기에는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게… 지난 정부에서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가 있었잖아요? 이게 국회의장이 무려 직권상정을 해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직권상정의 사유는 ‘천재지변, 전시, 사변,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에 한하거든요. 국가비상사태의 해석을 엄청나게 넓게 한 건데, 사실… 초법적인 발상이었다고 봐야죠.
사실 여야를 막론하고 거대정당이 법안을 통과시키려 온갖 꼼수를 동원하고, 상대 정당이 이를 막기 위해 물리력까지 동원하는 광경, 정말 자주 봐왔거든요. 그래서 사실 ‘꼼수를 썼다’ ‘물리력을 동원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 정당은 선이고 이 정당은 악이고를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유한국당도 여당일 땐 온갖 쟁점법안에 직권상정이나 날치기를 동원해왔고, 민주당도 야당일 땐 물리적으로 회의장을 봉쇄해왔고.
그렇다고 해서, 외적으로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만으로 도긴개긴이라 말할 순 없겠죠. 이건 굉장히 ‘쉬운’ 비평이고요. 무엇을 막기 위한 물리력 동원인가?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과정에서 바른미래당이 사개특위 위원을 사보임 시킨 것을 명분으로 드는데요, 법학가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이미 정당 결정에 반하는 행위에 대한 징계성 사보임이 적법하고 위헌적이지 않다는 헌재 결정이 있고요. 의장의 승인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죠. 물론 이를 의장이 승인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고, 이런 강제 사보임이 적절한가도 또 다른 문제지만요.
그리고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안도 역시 물리적으로 막고 있는데요, 선거법은 여야 합의로 개정하는 것이 관례라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 자체는 맞는 말이긴 한데, 자유한국당의 안을 보면 이미 기존 합의는 커녕 비례성, 대표성, 전문성 강화라는 대의에도 맞지 않고 위헌 소지까지 있는 강짜식 포퓰리즘이라…
이렇게 일부러 합의를 파탄 내면서 합의를 주문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죠. 합의를 요구하는 게 진심이라고 볼 여지도 전혀 없고요, 자유한국당이 노리는 장면이 사실 합의를 파탄 내고 스스로를 ‘좌파독재를 막는 투사’로 포장하는 것일 테지요. 공안검사 출신의 당 대표가 독재를 막느니 어쩌느니 하는 얘길 부끄럼도 없이 하는 꼴을 보면, 참 기가 찰 따름이에요.
원문: 임예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