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 만이라고 합니다. 낙태죄에 드디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고, 2020년까지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유를 반영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개정될 것입니다. 낙태죄에 대한 판단이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그것인데요.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로서 대우받아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가치나 목적, 법익을 위한 ‘수단’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됩니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할 의무를 갖고 있죠.
그러나 동시에, 헌법재판소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권은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로서, 모든 기본권의 전제로서 기능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입니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 의지해야 한다 해도 그는 그 자체로 별개의 생명체입니다.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하며, 국가는 그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뭐가 중한지를 따지는 게 어렵긴 하지만… 보통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이 충돌한다면 보통은 생명권의 손을 들어주게 될 겁니다. 이건 임신으로 인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가 심각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생명권이 말 그대로 모든 기본권의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태아를 생명으로 볼 수 있는가?” “생명이라 해서, 모두 동일한 법적 의무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건 너무 어려운 문제라서 사실 제가 여기서 결론을 내는 건 불가능하고, 사실 정리만 해도 하세월일 것 같고 능력 밖일 것 같습니다.
다만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을 보통 임신 22주로 보는데, 이 상태가 되면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이 시점까지는 생명권 보호의 정도를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낙태죄에 찬성하는 측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태아를 생명으로 볼 수 있는가?” 여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건 비단 종교계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도 여러가지 논리가 있겠습니다만, 사고나 질병 등이 없이 자연 상태에서 임신을 유지했을 때 태아가 자연히 신생아로 성장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게 마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는 없긴 합니다.
헌법재판소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짚어주는데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일견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특별한 관계로 인하여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신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생명의 유지와 성장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즉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인 매우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임신한 여성의 안위는 곧 태아의 안위이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들의 이해관계는 방향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야기했습니다만, 사실 저 이야기는…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임신 종결의 갈등에 처한 여성은 이보다 훨씬 실질적인, 실재하는, 실존적인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경제적, 사회적 사정으로 인해 임신 종결을 선택한 여성들이 얼마나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는지, 그 고통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절절할 정도로 극심해 보입니다.
임신 또는 임신 종결이 여성의 신체는 물론 정신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생각할 때, 안전한 장소에 서서 “생명권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기본권”이라는 일반론만 읊고 마는 것은 결코 최선일 수 없다는 겁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방향일 수조차 없다는 것이죠.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추상적인 형량에 의하여 양자택일 방식으로 선택된 어느 하나의 법익을 위해 다른 법익을 희생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 조화의 원칙에 따라 양 기본권의 실현을 최적화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하고 마련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성이 임신 종결을 고려할 때, 이를 정신적으로 지지하면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 그리고 임신, 출산, 육아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 경제적 요건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 이렇게 임신한 여성을 신체적, 사회적으로 보호할 때 비로소 태아의 생명 보호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은 낙태죄를 굉장히 엄격하게 따져 묻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모두가 알다시피 그 법은 사실상 실효성을 잃은지 오래되었습니다. 한편 선진국의 선례 등을 살펴볼 때, 출산율 재고에는 그 어떤 복지정책도 별무소용이고, 단 하나, 미혼모에 대한 지원과 복지가 유일하게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도 있죠. 함께 숙려해 볼 만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한편 단순위헌결정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할 이유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임신 과정은 물론 출산, 그리고 그로 인한 모자관계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임신은 여성의 신체적, 사회적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이를 유지하고 출산할 것인지 여부는 원칙적으로 여성 스스로의 결정에 의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헌법불합치결정과 단순위헌결정 사이의 논점은 낙태죄가 즉시 폐지될 경우 심각한 입법 공백을 발생시키는가 하는 점일텐데요. 사실 저는 단순위헌결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헌법불합치는 좀 더 정치적인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한편 만만찮게 뜨거운 것이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소수의견인데 초입부터 “우리는 모두 태아였다”며 시를 쓰시는 바람에(…)
이런 게 예전부터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요. 대표적인 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건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의 보충의견인데요. 해산 결정에 대한 찬반을 떠나, 결정문에 “아주 작은 싹을 보고도 사태의 흐름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그 결과를 알아야 한다(見微以知萌 見端以知末)”는 고사를 인용한다거나, “레닌이 말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이상한 비유를 써서 오히려 신뢰도를 해쳤습니다. 개중에서도 압권은 이 부분이었습니다.
“뻐꾸기는 뱁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이를 모르는 뱁새는 정성껏 알을 품어 부화시킨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알과 새끼를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낸 뒤 둥지를 독차지하고 만다. 둥지에서 뻐꾸기의 알을 발견하고 적절한 조치를 한 뱁새는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게 되지만, 둥지에 있는 뻐꾸기의 알을 그대로 둔 뱁새는 역설적으로 자기 새끼를 모두 잃고 마는 법이다.”
안창호 재판관은 박근혜 탄핵심판에서도 보충의견을 냈는데요. 여기서도 뜬금없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로다”. 그러면서 이번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권력 공유형 분권제로의 권력 구조 개혁을 역설합니다(…)
이런 건 결정문의 의의를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수의견에도 조용호 재판관의 이름이 있는데, 몇몇 재판관분들이 문학 본능을 자꾸 결정문에 발휘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 태아의 생명권을 어느 선에서부터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꽤 복잡하고, 사회적으로 ‘이것이 답’이라고 명확한 합의를 이루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심지어 저는 저 스스로도 그 답이 무엇인지, 저와 제가 막 싸우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쪽 같지만, 도저히 감정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든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서는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거나 적어도 생명권에 차등을 둘 수 있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럼 여러가지 질문이 더 튀어나오게 되죠. 독자적으로 생명 유지가 불가능해진 중환자는 그럼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에 대한 살인은 일반적인 살인보다 죄질을 덜 중하게 따져야 하는가?
물론 저는 이 논리가 전형적으로 비탈길을 쭉 미끄러져버린 극단적인 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이런 질문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는 거고, 이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의견도 아마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걸 “우리 세대가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하는 시류, 사조에 편승하여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훗날 우리조차 다음 세대의 불편요소로 전락해 안락사, 고려장 등의 이름으로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쓰시면 이건 뭐랄까…음…오…아…예.
그 외에도 소수의견에는 굉장히 뜨악한 문장이 가득한데요.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 출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임신한 여성은 ‘임신상태’라는 표지를 제거하여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라 태아를 살려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같은 문장을 보면 말입니다. 이건 갑자기 시간을 조선시대로 퇴행시킨 느낌입니다.
물론 소수의견이 모두 저런 뻘소리들로 가득찬 건 아니고요, 소수의견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지점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법질서는 태아에게 그 존재 자체만으로 생명권을 보장하는 것이지, 태아의 모의 수용을 통해 비로소 생명권 보장의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이라고는 해도 결국 모가 임신을 종결할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태아의 생명권은 어느 정도 제한하거나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소수의견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는데요. 이처럼 두 가지 권리 – 여기에서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 가 충돌할 때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할지는 사실 사법부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입법부가 결정할 사안이라는 거죠. 입법자가 태아의 생명권을 보다 중시하여 입법을 했다면, 사법부는 이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요.
뭐 현실적으로, 사실 이런 첨예한 이슈에서 보통 입법부는 마비 상태고, 교회 등 일부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반영되며 보수적, 퇴행적인 결과를 낳기 일쑤죠. 정작 입법부가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니까 결국 사법부가 ‘위헌’ 같은 칼을 빼들게 되는 건데… 아무래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입법부에만 기대기에는, 보혁의 극한 대립이 사실상 사회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고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원문: 임예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