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IGN 코리아에 실린 글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페르소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 중 인물명 대신 배우 이름, 아빠, 친구 같은 대명사로 표기하고, 감독명을 적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찾아내자, 진실이 보일 것이다
지난 〈러브, 데스 + 로봇〉 리뷰 때 ‘쉽게 접할 수 없는 단편을 서비스할 수 있는 게 넷플릭스의 장점이고 단편을 자주 제작했으면 하는 소망도 있다’고 썼는데, 그 소망이 채 한 달도 안 되어 이루어져서 즐겁다. 〈페르소나〉를 통해서 말이다.
〈페르소나〉는 〈남극일기〉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더 테이블〉 김종관, 〈굿바이 싱글〉 〈소공녀〉 전고운 감독이 연출한 4개의 단편을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이미 각자 장편 영화를 연출한 바 있고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이 다른 감독들이 뭉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듯하지만 가면의 성격, 숨겨진 자아, 작가, 감독의 분신을 뜻하는 ‘페르소나’라는 제목 아래 단 한 명의 배우를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과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기획은 감독들에게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매력적인 기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수많은 페르소나를 만나왔던 영화 팬이라면 이런 매력적인 영화를 지나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제작자 윤종신(동명이인인 줄 알았으나 가수 윤종신 맞다)에게 고마울 뿐이다.
4편의 단편 모두 단편의 특성상 스토리는 상당히 단순하지만, 감독들은 그 단순한 스토리 안에 하고 싶은 것과 전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담으려고 했다. 본심 아닌 행동이나 거짓된 행동 등이 상징과 함축된 의미로 표현되어 있어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쉽게 웃을 수 있는 〈키스가 죄〉를 제외하고는 허무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리뷰보다는 해석의 비중이 높을 작품이다.
러브 세트
영어 과외교사 배두나와 아빠(김태훈)이 결혼하려는 것을 막고 싶은 아이유가 배두나와 아빠가 결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배두나와 내기 테니스 시합을 한다는 사랑싸움을 그린 단편이다.
아마도 이 단편을 보는 사람들의 첫 번째 시선은 나풀거리는 스커트에 이어지는 하체와 땀에 젖은 운동복에 드러나는 몸매를 주목할 듯싶다. 카메라는 마치 훔쳐보듯 여성의 신체 부위를 근접해 보여주며 관음적인 화면은(상상 금지, 대역이다)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테니스 시합이 진행될수록 그 의미는 다르게 변한다.
처음엔 자두(여성호르몬)를 먹으며 끼 부리고 어리광부리며 아빠의 관심을 유도하고, 남자 친구를 조종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존적 여성성의 단면이 보이지만, 시합이 진행되면서 점차 아빠의 관심도 바라지도 않고, 피가 흘러도 아파하는 내색조차 하지 않으며,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되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이유의 눈은 오로지 배두나만을 향해 있다.
카메라는 땀에 젖은 몸이 아니라 땀 자체, 땀의 본질을 담기 시작하고, 남자들의 시선 역시 여성이 아닌 코트를 오고 가는 테니스공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오로지 두 여성의 시합만을 보여준다. 이는 외부의 시선이라는 형태로 보이는 선정성만으로 오해하기 쉬운 의존적 여성성과 주체성의 본질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시합이 끝난 후의 테니스공은 배두나와 아이유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것이 동성애적인 감정일지 지배와 복종의 신체 언어인지 확신이 들지 않지만, ‘러브 세트’의 주인공은 사실상 배두나였음이 드러난다. 숨겨져 있던 페르소나가 드러나면서 말이다.
썩지 않게 아주 오래
약혼녀를 헤어지고 젊고 아름답고 미스테리한 팜므파탈 아이유를 사귀게 된 남자(박해수)가 철저하게 버림받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대부분 남자의 시점에서 아이유의 비수 같은 말 하나하나에 충격받았다가 듣기 좋은 말로 점수를 땄다며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남자의 거짓된 말과 행동과는 다른 솔직한 속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유의 말이다. 하나는 2000년 대니 보일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영화 ‘비치’에 나왔던 해변, 지상천국인 줄 알았던 그곳이 실제로는 광기의 땅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카마수트라로 실언한 듯 다시 말한 요가수트라, 그 금기 중 하나가 탐욕 하지 말라는 것.
즉, 남자는 아이유를 욕망의 대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고 아이유는 그걸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이유가 건넨 선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남자의 속마음이 표현되던 하얀 방은 아이유가 이미 남자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있음을 한 번 더 증명해준다.
키스가 죄
학교에 결석한 친구(심달기)를 찾아온 아이유는 친구가 불한당 같은 친구의 아빠(이성욱)에게 머리를 깎인 걸 알고 친구 아빠에게 복수하려 한다는 이야기다.
친구가 자기보다 먼저 남자와 키스를 해봤다는 걸 알고는 당황하며 나도 해봤다고 허풍 치는 아이유의 모습이나 아빠에게 복수한다며 소심한 작전을 실행하는 것은 속은 소심하지만 겉으로는 일탈의 달인인 듯 행동하는 친구의 모습 모두 귀여웠으며, 소심한 복수가 포기 후 우연히 성공하게 되는 것도 웃음을 띠게 해주었다. 이 모든 웃음 뒤에 거짓 인격이 드러나는 페르소나가 감춰져 있다.
억압(아빠)이라든지 불안함,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웃음으로 아이유를 대하는 친구의 모습은 거짓 인격, 소심하게 복수할 거면서 “죽여버리자”고 외치는 것도 거짓 인격, 허풍 치는 거나 담배를 따라 피는 일탈 역시 상대방과 동질화하려는 거짓 인격, 스트레스 풀러 바다로 간다고 했지만 그곳에는 상고 날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불안해하는 게 이전에 보여졌으므로 이 역시 본심과는 거짓 인격을 보여준다.
밤을 걷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 죽음을 경계로 서로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가며 겪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그려낸 이야기다.
동양의 귀신은 보통 죽은 장소나 무덤을 기준으로 출몰하곤 하는데, 반면 서양의 유령은 자신이 살던 곳, 살았을 때 추억이 담긴 장소에 출몰한다. 죽음이 기준인 귀신과 달리 삶이 기준인 유령, 이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추억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남자(정준원)는 꿈을 꾼다. 그리고 아이유는 남자의 꿈속에 나타나 사랑하는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 날밤 그 장소로 남자를 데려간다.
페르소나적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가면 우울증을 가지고 있던 아이유는 남아있는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신의 기억이 희미해져가고 있음을 두려워하고 남자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진실과 속마음을 모두 보여준다. 남자는 “잠에서 깨면 잊힐까 두렵다”며 – 낮에 깨어있을 때(의식=거짓 인격) 아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다가 꿈을 꿀 때만(무의식) 추억을 불러들인다는 의미 – 사랑하는 이를 잊어간다는 죄책감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는 의식과 무의식, 사랑하는 이의 기억 속에 살아남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이란 주제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꿈과 추억이라는 무의식, 밤이라는 시간을 하나의 무대로 엮어낸 아이디어와 함께 어둠을 망각, 빛을 추억이란 상징으로 보여주고, 어둠이 빛에게 그러하듯 망각이 추억을 꺼트리는 연출은 가슴속으로 잔잔하게 파고드는 느낌이다.
THE VERDICT
잉그리드 베르히만의 걸작 〈페르소나〉부터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까지, 페르소나를 주제로 한 영화들은 난해함에 몇 번이고 반복하며 분석하게끔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만큼 쉽게 만들 수도, 쉽게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분명 이 글의 해석도 틀린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4인의 감독이 만든 4개의 단편은 더 일상적인 이야기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거짓 인격을 드러내는 방법 역시 서로 달라 흥미로웠으며, 개성이 뚜렷한 연출력을 보는 재미까지 더해져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원문: IGN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