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WWF는 엄청난 인기였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WWF 신작을 보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 했으며, 한국어로 된 WWF 잡지까지 창간될 정도였다. 주말 오전, 아이들은 AFKN이 나오는 집 TV 앞에 모여 앉아 알아들을 수도 없는 해설자의 영어를 들으며 함께 소리를 질렀다. 또한 많은 소년들이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기술을 따라한답시고 부상을 당해 깁스를 하고는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던 선수는 단연 헐크 호건이었다. 현재 ‘레슬매니아’의 이름 유래 자체가 ‘헐크 매니아’에서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5년 간 레슬매니아에서 4번을 우승했으며, WCW로 이적하기 전 9년 간 7번을 우승했을 정도였으니.
헐크 호건의 라이벌, 얼티밋 워리어의 등장
하지만 흥행의 역사에는 라이벌이 있는 법. 헐크 호건의 라이벌로는 얼티밋 워리어가 있었다. WWF 역시 호건의 인기에만 얹혀 가기에는 불안함이 있었기에, 그의 뒤를 이을 또 한 명의 영욱이 필요했고, WWF는 워리어를 선택했다. 카리스마와 명성에 비해 기술, 특히 결정기가 단순하다는 비판을 받던 호건에 비해 워리어는 이름과 복장에서 알 수 있듯 좀 더 화려하고 강렬한 이미지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 아이들은 둘 중 누가 센지, 의미없는 논쟁을 계속했다.
1990년 레슬매니아 6(위 영상)에서 워리어는 호건을 꺾고 최강자의 위치에 오른다. 하지만 이 매치는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한다. WWF는 기본적으로 권선징악적 스토리를 가지고 갔다. 악당들이 비겁한 짓으로 호건을 괴롭히지만, 최후의 무대에서는 호건이 승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호건과 워리어는 둘 다 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결말조차도 호건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훈훈함으로 맺어졌다.
덕택에 워리어는 챔피언 자리에 오른 이후 오히려 WWF의 인기는 떨어진다. 결국, WWF는 이후 3년 연속 헐크 호건의 우승을 주선했으며, 워리어는 챔피언십 매치에 오르지조차 못한다. 한국에서는 대등한 상대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실제 미국에서 그 라이벌리는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호건의 인기조차 떨어지며 WWF의 위기감은 더욱 커져 간다. 워리어가 챔피언에 오른 해의 실적이 떨어져서 다시 호건을 띄웠지만, 정작 호건이 챔피언을 되찾은 후에도 WWF는 계속 하향세를 그릴 뿐이었다. 결국, WWF는 1992년 호건과 시드 저스티스와의 타이틀 매치에서 워리어를 호건을 구하는 역할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워리어는 다시금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알린다. (위 영상 17분 30초부터 재생)
호건의 본좌 등극과, 워리어의 몰락
저주라도 있었던 것일까? 되찾은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WWF는 약물 파동에 시달리며, 1992년워리어를 해고하게 된다. 성장호르몬을 영국에서 공수 받았다는 이유였다.
이를 통해 WWF는 어느 정도 이미지 회복에 성공하지만, 워리어가 억울했다는 의견도 많았다. 당시 많은 레슬러가 스테로이드를 사용하고 있었으며(마초맨, 크리스 벤와, 에디 게레로 등 당시 활동한 레슬러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워리어가 상당히 많은 보너스를 지급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이후 호건과 워리어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뀐다. 호건은 94년 WCW로 이적한 후 승승장구한다. 과거 선한 이미지를 버리고 악역으로 변신한 그는, 이전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WCW의 인기를 드높인다. 2000년 WCW와의 큰 마찰 이후 이적하게 되지만, 1년이 되지 않아 WCW가 망해버린 건 그의 위치를 보여준다. 부침은 있었으나 이후 WWE(전신 WWF)에서 복귀와 은퇴를 번복하며 지금까지도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반면 워리어의 인생은 엉망이었다. 종종 WWF에서 뛰기는 했지만, 높은 개런티를 요구했기에 이전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프로레슬러 양성 학원 사업이 실패했으며, 98년 WCW에서 단발성 게임에 등장한 후 사실상 레슬러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하필 그 단발 게임이 호건과의 매치에서 패했기에, 더욱 비극적으로 보여졌다.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2004년에는 WWF 챔피언 벨트를 이베이에 내놓을 정도였다.
초라한 워리어의 삶을 공격한 호건
조용히 살고 있던 워리어와 호건이 만난 곳은 링 위가 아닌 언론에서였다. 호건은 2011년 한 인터뷰에서 워리어가 자신의 지위를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워리어도 그에 대응하여 헐크 호건을 비방하는 내용의 영상을 공개했다. 헐크 호건은 워리어를 ‘찐따(assclown)’, ‘패배자(loser)’ 등으로 비난. 워리어도 헐크를 두고 ‘사악한 모함꾼(malicious backstabber)’라고 대응했다.
하지만 산업은 언제나 강자의 편이다. WWE는 더 이상 사용 가치가 없는 워리어를 홀대하고, 호건의 편을 들었다. WWE는 2005년 워리어를 비방하는 내용의 DVD를 내세울 정도로, 그를 홀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을 줄 이유가 없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호건의 말을 받아 적는 쪽이었고, 워리어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세계를 뒤흔든 라이벌의 관계는 이제 성공한 남자와, 초라한 실패자의 관계로 비춰졌다.
그렇지만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팬들 때문인지 인기 게임 WWE2K14에 재등장하는 등 WWE와 워리어의 관계는 회복된다. 그리고 뒤늦은 2014년, 워리어는 WWE 명예의 전당에까지 헌액된다. 뒤늦은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고, 워리어는 다시금 WWE 쇼에 출연하게 된다.
이를 통해 호건과 워리어의 관계도 극적인 회복이 이뤄진다. 호건이 언론을 통해 “더 이상 워리어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그들이 생전에 나눈 마지막 교감이었을 것이다.
RIP WARRIOR.
그런 그가 2014년 4월 9일 목숨을 잃었다. 공식 발표는 없으나 스테로이드로 인한 심장 마비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상황이다.
트리플 H(유명 레슬러): 얼티밋 워리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하게 되어 슬프다. 하나의 아이콘이자 친구였다. 그의 아내인 대나와 딸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짐 로스(WWE 유명 아나운서): 얼티밋 워리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슬프다. 그의 아내와 두 어린 딸들에게 조의를. RIP 워리어.
스테파니 맥마흔(WWE 맥마흔 회장의 딸, 트리플 H의 아내): 당신의 캐릭터가 갖던 힘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누구도 당신과 같지는 못할 거에요.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가족과 함께 합니다.
케빈 내쉬(유명 레슬러): 지난 토요일 밤, 무대 뒤에서 워리어를 만났을 때 허그를 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내 마음은 그의 가족과 함께한다. 언제나 믿는다.
분명 워리어의 커리어는 호건에 비해 그 전성기가 매우 짧았으며, 이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지도 못했다. 한국 팬들에게 라이벌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WWF 비디오가 흥한 시기가 마침 워리어의 전성기인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때나마 워리어가 호건 못지 않은 인기와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것 역시 사실이긴 하다.
WWE는 언론 플레이조차도 계산된 쇼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호건과 워리어의 관계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호건이 그에 대해 트위터로 마지막 추모 메시지를 남긴 것으로, 한때 라이벌이었으나 완전히 급이 다른 인생을 살게 된 두 남자의 라이벌 관계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 뿐.
헐크 호건: RIP WARRIOR. only love. HH.
woolrich parkaRobert Pattinson to Start Clothing 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