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퇴사란 회사와의 완전한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회사로 향하는 길목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특별한 사업 아이템도 자본금도 없는 데다 당장 내가 돈 벌기를 중단하면 누구도 나를 먹여 살려줄 수 없는 현실에서, 이직을 전제로 하지 않은 퇴사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나 같이 평범한 월급쟁이들에게는 이전 회사에서 느꼈던 단점을 조금이나마 덜 가진 곳으로 옮기는 것이 퇴사의 또 다른 정의였다. 굳이 세밀하게 분류하자면 다음 회사로 들어가기 전에 쉬는 간격(혹은 공부하는 간격)을 조금 길게 가지면 퇴사, 쉬는 간격이 없거나 아주 짧다면 이직이라고 불리는 정도일까?
‘일단 때려 치고 여행이나 다녀오지 뭐.’ 식의 대담한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뼛속까지 소심한 인간의 전형인 내가 ‘이직’ 대신 ‘퇴사’를 먼저 떠올린 것은 순전히 당시 일하던 직군의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시내에 있는 모 로펌에서 사무직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고, 로펌 업계는 스태프의 이직이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분야였다. 꽤 큰 조직에서 5년간 일했지만 다른 로펌에서 옮겨온 스태프를 본 적도, 다른 로펌으로 옮겨갔다는 스태프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이직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취업 준비를 한 뒤 아예 직종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지만, 지금처럼 야근이 일상인 팀에 있으면서 취업에 꼭 필요한 공인 영어 성적이며 각종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게 주어진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다 보니 이직을 원한다면 일단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한밤중의 사무실에서 엄마와 통화를 한 다음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채용공고를 들이파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발길을 끊었던 취업 사이트와 카페에 들락거렸고, 대기업과 공기업 홈페이지에서 채용요강과 일정을 확인하기도 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일단 때려 치고…’ 형 인간이 못 되는 내겐 목표로 삼을 회사나 업계의 윤곽이 대강이라도 잡혔을 때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쯤 취업정보의 홍수 속에서 헤엄쳐 다녔을까, 문득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 많은 채용공고 중에 지원하고 싶은 회사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껏 내가 거쳐 온, 나를 이토록 불행하게 만든 회사들과 크게 달라 보이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이 시점에서는 당연히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너무 나약한 게 아닐까, 모든 상황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책도 많이 했다. 남들을 멀쩡히 다니는 회사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부모님만 해도 마냥 편할 리만은 없는 직장생활을 몇십 년씩 해가며 자식들을 키워냈는데, 어째서 나는 고작 몇 년을 못 버티고 퇴사를 생각하는 걸까?
한 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대단한 공을 세운 적은 없지만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는데, 퇴사를 생각할 정도로 불행하다는 것만으로(사실은 불행한 것도 억울한데!) 자신을 탓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나도 지금까지 겉으로는 꽤 멀쩡한 회사생활을 해왔다.
마음으로부터 모든 구성원을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인간관계로 트러블을 일으킨 적은 없었고, 업무에서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와 함께 일한 모든 사람들이 이 생각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퇴사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갑게 얼굴 보며 지내는 전 상사, 동료들이 꽤 있는 것으로 보아 내 회사생활이 아주 엉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내 눈에 너무나 모순적으로 비쳤던 그 모든 절차와 체계에도 분명히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거쳐 온 모든 회사는 그 시스템 속에서 잘만 굴러갔다. 하지만 나는 괴로웠다. 내 인생이 괴로운데, 당사자인 내게 이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민의 흐름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규모나 업계, 업무의 성격과 관계없이 비슷한 본질의 괴로움을 느낀다면, 나는 ‘특정한 회사’가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자체에 맞지 않는 사람인 게 아닐까? 한 마디로 ‘회사 체질’이 아닌 게 아닐까?
스스로 조직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행여 누가 볼 새라 꾹꾹 눌러 담기 바빴다. 강하게 버티고 무던하게 참는 것이 곧 능력인 이 사회에서 나약한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월급으로 풀칠하는 일개미에겐 징징댈 자격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이러한 자책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악다구니와 맞물려 묵직한 부담으로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감정의 벼랑에 몰린 상태에서 문득 떠오른 ‘회사 체질’이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마음의 수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지금껏 너무 개인적이고 사소하다며 애써 외면해왔던, 내가 조직 안에서 불행했던 이유들이 봇물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의 야근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상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윗선의 결재를 기다리고, 다른 팀의 자료를 기다리며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묶여 있는 시간은 1분 1초가 고문이었다. 그렇게 긴 야근을 마치고도 기다리던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집에 온 날이면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일단 퇴근을 하면 스위치를 끄듯 회사 일을 잊어버리고 마음 편히 쉬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책임이면서 남의 손에 달린 그 일들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직접 하고 말지.’라는 부아 섞인 생각이 치밀었지만, 내게는 그 일들을 직접 처리할 권한이 없었다. 나는 조직의 일부에 불과했고, 조직의 일부에게는 업무의 일부밖에 맡겨지지 않으므로.
남들 속도에 맞춰 후루룩 마시듯 먹은 점심은 늘 명치 언저리에 얹혀 있었고, 뻣뻣하고 갑갑한 정장은 5년 내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억울해도 웃고, 화가 나도 웃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웃어야 하는 그 모든 날들에 신물이 났다. 나는 점점 우울해졌고, 사람을 피했고, 급기야는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을 내 손으로 처리하느라 야근을 할 때면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저녁 시간이 그다지 짜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된 자료를 전송하고 퇴근하는 길에는 자못 보람찬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다. 나는 일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시간과 감정을 담보로 무정하게 돌아가는 이 조직이 싫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조직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테고, 어떤 이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조직이 주는 혜택과 보호막에 나름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답답함과 우울함이었다. 이렇게 체질이 맞지 않는 장소에 갇혀 있는 한 언제까지고 시간을 낭비한다는 괴로움을 월급으로 마취시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점에서 ‘프리랜서’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자못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다. 일이 아니라 조직이 싫다면 조직을 떠나야 하고, 조직을 떠나려면 이직이 아니라 ‘프리 선언’을 하는 편이 이치에 맞을 테니까.
딱 한 가지 현실적인 조건만 빼면 프리랜서는 지금 이 시점의 내게 꼭 맞는 결론으로 느껴졌다. 자격증 하나(심지어 운전 면허증조차) 없는 문과 출신에 줄곧 사무직으로만 일해 온 내게 프리랜서로 일할 기술이 전혀 없다는 딱 한 가지 조건만 빼면.
원문: 서메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