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별 과제의 신에게 사랑받은 남자
무슨 마(魔)가 끼었는지 마지막 학기까지 조별과제를 한다.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이 세 개인데 셋 다 조별과제가 있다. 씁쓸하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익숙하고 자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조별과제를 많이 했다. 대학 생활 내내 총 25번의 조별과제를 했는데, 그중 23번이 조장이었고, 23번의 발표를 직접 했다.(이번 학기 포함하면 28번이다.)
대학생활 내내 공부를 하도 안 해서 C와 D가 정말 많은데, 조별과제 수업만큼은 거의 다 A를 받았다. 나는 이력서 특기란에 팀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이라고 적을 정도로 조별과제에 대한 여유와 지신감이 있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며 조별과제를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학년 1학기 때 가위바위보에 지면서 나의 조별과제 잔혹사가 시작됐다. 1학년 1학기에 4번의 조별과제를 했는데, 전부 다 망했다. 조별과제를 귀찮아하는 조원들에게 화를 내며, 나도 배 째라 식으로 나갔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다행히도 다른 조도 다 망했기에(…) 점수는 그럭저럭 나왔다.
뺀질대는 조원들 활용하는 요령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행정병으로서 2년간 쌔가 빠져라 문서작업만 하다가 전역했다. 전역 후 1학년 2학기로 복학했는데, 2년 후배인 동생들과 조별과제를 수행했다. 선배로서 책임감을 느껴 3개의 과제, 모두 조장을 맡았다.
어린 녀석들이 약아 빠져가지고 누구 하나 능동적으로 조별과제를 수행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을 시키던 모르쇠로 일관하는 녀석들 덕분에 혼자 모든 작업을 했다. 다행히 행정병 출신인지라 그런 작업들이 익숙했기에 혼자 과제를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점수는 좋게 나왔다. 말이 좋아 조별과제지, 정말 나 혼자 다했다. ppt 작성, 자료 수집, 발표 준비, 발표, 리포트 작성 등. 그런 노예 짓을 2학년 2학기까지 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3학년이 되자 뺀질 대는 인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조금씩 감이 왔다. 누구나 발표를 싫어하기에 발표는 그냥 내가 하기로 했다. 큰 그림을 그려주고, 세부사항을 잡아주면서,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이용해 조원들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은 항상 똑같았다. 발표를 준비하기 전에, 미리 관련 내용을 공부하고 조원들에게 내용을 설명해 줬다.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고, 한 명씩 세부적으로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감독하면서 최종 PPT 수정과 발표를 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조별과제를 하고 있다. 나는 철저하게 리더로서 조원들을 이끄는 존재 역할을 수행했다.(참고로 학과에서 조별과제 VIP로 꽤 유명하다.)
조별과제를 괴롭게 하는 5가지 유형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4학년인 지금도 약간의 부담은 있다. 조별과제마다 ‘사람’때문에 힘들었기 때문이다. 매 발표마다 꼭 몇 명씩 짜증 나게 만드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꼭 있었다. 이 인간들 덕분에 조별과제 잔혹사를 찍었는데, 대표적인 유형 다섯 가지만 알아보자.
#1.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 뺀질대면서 참여하지 않는 녀석들이 꼭 있는데, 이들은 “아프다.”, “집에 일이 있다.”, “제사 지내러 간다.”, 등의 말을 많이 한다. 신기하게도 발표가 끝나면 그들의 몸은 씻은 듯이 낫고, 가정의 우환이 사라지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도 일어난다.
이런 녀석들을 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모임에 나온 사람들끼리 역할을 짜고, 그냥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일방적으로 임무를 통보하면 된다. 그러면 마지못해 한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모임에 나올 생각이 없다. 그냥 시키자.
#2. 뭘 시켜도 안 하는 사람
– 1번 유형의 사람 중에는 뭘 시켜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죄송해요.”를 입에 달고 산다. (죄송하면 할 일 좀 해 오던가!) 끝까지 안 해온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협박하면 된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조에서 빼버릴 거예요.”라고…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진짜 빼면 된다. 친구 중에 나만큼 조장을 많이 한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은 이런 사람을 끝까지 쫓아다니며 조별 과제에 참여 시키기도 했다. 그런 모습 보면 참 신기했다.
#3. 무임 승차자
– 1번 + 2번 + @다. 모임에 당연히 참여 안 하고, 뭘 시켜도 안 하는 사람이다.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있다. 진짜 양심이 눈곱만큼도 없는 개자식들이다. 그냥 무시하자. 통보 없이 조에서 빼면 된다. 그게 맘 편하다. 신경 써봤자, 나만 골치 아프다.
#4. 어리바리한 사람
– 뭘 시켜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짜증나긴 하지만, 열심히 하려고는 한다. 그냥 좋게 생각하고, 많이 도와주자. 가끔 지능적으로 어리바리한 척하는 사람이 있는데… 조별 과제에서 빼기도 애매하고, 끝까지 함께 하기도 짜증 나는 최악의 유형이다. 이런 지능범들은 무임 승차자보다 더 짜증 난다.
#5. 무책임한 사람
– 뭔가 하기는 하는데…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인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어 번역을 해야 하는데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것을 가져온다거나, 네이버 지식인에서 그냥 ctrl+c, ctrl+v 한 자료를 보내는 사람이다. 역시 4번 유형의 사람처럼 짜증 난다.
버릴 수도 없고 끝까지 함께 하자니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개인적으로 4번, 5번 유형의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조별과제 끝나고 안 보면 그만이다.(개인적으로 제일 얍삽한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거머리같은 인간들.)
대학생에게의 조언: 억울해도 조별과제 리더가 돼라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 싶으면 일을 같이 해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동생, 좋은 선배여도 같이 작업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평소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후배 녀석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조별과제에 참여하는가 하면, 사람 좋기로 유명한 선배가 조별과제에서 쓰레기 짓을 하기도 한다. 조별 과제하다 보면 진짜 별의별 인간 다 만난다. 그러면서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물론 분노와 고통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한다.)
저번 학기만 해도 조별과제 때문에 한 달이나 집에 못 들어간 적이 있다. 10명이 한 조인데 그 중 8명이 뺀질이, 무임승차자였다. 진짜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덕분에 또 한번 개인적 역량을 많이 기를 수 있었다. 나도 1ㆍ2ㆍ3학년때는 몰랐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그렇게 힘들게 작업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학생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자료 수집ㆍ편집 능력, 문서작업능력(PPT, 엑셀, 워드), 그래픽 작업능력(포토샵, 프리미어 프로 등), 발표 능력(대본 안 보고 발표함.) 을 가지고 있다.(내 입으로 말하려니 쑥스럽고만…) 거기에 리더십도 남다르다. 이런 나의 역량들은 순전히 대학교 내내 개고생하며 작업한 조별과제 덕분이다. 이런 능력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생활하는 몇몇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한다. “대학교 때 조별과제 열심히 하길 잘했어.” 그 녀석들 말로는 사회생활에서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한다. 대학교 때 조별과제와 발표를 많이 해본 사람들은 사회생활도 굉장히 잘한다고 한다. 반면 대학교 다닐적에 뺀질대며 조별과제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그 버릇 못 고친다고 한다.
또한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개판이라 참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회생활 한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한 번 프레젠테이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처참한 결과를 부르기도 한다. 반면 대학교는 리스크 걱정할 필요 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연습할 수 있다.(리스크라고 해봤자 겨우 점수 조금 깎이는 것 뿐이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하는게 좋다.
4년이라는 시간동안 유난히 많은 조별과제를 했다. 정말 멋있는 친구들과 같이 작업했던 경험도 있고(사실 별로 없다.), 무임승차자 떼거지 덕분에 혼자 미친듯이 준비했던 경험도 있다.(이건 꽤 많다!) 서러움에 울어본 적도 있고, 너무 화가 나서 조원에게 쌍욕을 해본 적도 있다. 처절했고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학년 2학기 이후로 단 한번도 조별과제를 대충한 적이 없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고(덕분에 참 힘들었지만…) 항상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런 조별과제 잔혹사 덕분에 개인적인 역량을 정말 많이 쌓았다. 조별과제… 저주받을 이름이지만, 분명히 사람을 크게 성장시킨다.
출처: 꿈꾸는 독서가 / 편집: 리승환
Isabel Marant SneakerA Picture’s Worth a Thousand 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