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선거를 군대에서 맞이했다. 1996년 4월에 있었던 제 15대 국회의원 총선이 그것이었다. 그때 선거를 앞두고 위문편지가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었다. 예전에도 초등학생들이 쓴 위문편지가 깨작깨작 들어올 때는 있었지만 갑자기 대량으로, 한 사람 앞에 거의 4~5통 이상 배달되어 왔으니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그 이변에는 이유가 있었다. 간단하게 그때 날아온 위문편지들의 내용을 보면 다들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인 아저씨 전방에서 근무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셔요. 혹시 아세요? 요즘 저희 동네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한참이랍니다. 참, 군인 아저씨는 어떤 후보 지지하세요? 군대에 있으니까 잘 모르시겠다~ 제가 오늘은 후보 한 분 소개해 드릴께요. 기호 O번 OOO 후보는 정말 멋진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이건, 선거를 앞두고 부재자 투표를 행사해야 하는 ‘현역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선거운동 편지였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라면 “ㅋㅋㅋ 지랄들 하시네요”하면서 씹어버려야 마땅할 내용들이었겠으나, 남자끼리 24시간 군대 내무반에 갇혀 사는 잦이색히들에게 정상적인 사고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성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 결정적 장치는, 각각의 편지를 보낸 발신인들의 개인 프로필이었다. 당시 편지를 좀 더 자세히 복기해보자.
군인 아저씨 전방에서 근무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셔요. 저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19살 여대생이랍니다~ 혹시 아세요? 요즘 저희 동네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한참이랍니다. 참, 군인 아저씨는 어떤 후보 지지하세요? 군대에 있으니까 잘 모르시겠다~ 제가 오늘은 후보 한 분 소개해 드릴께요. 기호 O번 OOO 후보는 정말 멋진 분이랍니다~
군인 아저씨 전방에서 근무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셔요. 저는 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꽃다운 여대생이랍니다~ 혹시 아세요? 요즘 저희 동네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한참이랍니다. 참, 군인 아저씨는 어떤 후보 지지하세요? 군대에 있으니까 잘 모르시겠다~ 제가 오늘은 후보 한 분 소개해 드릴께요. 기호 O번 OOO 후보는 정말 멋진 분이랍니다~
군인 아저씨 전방에서 근무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셔요. 저는 스튜어디스를 준비하고 있는 아리따운 여대생이랍니다~ 혹시 아세요? 요즘 저희 동네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한참이랍니다. 참, 군인 아저씨는 어떤 후보 지지하세요? 군대에 있으니까 잘 모르시겠다~ 제가 오늘은 후보 한 분 소개해 드릴께요. 기호 O번 OOO 후보는 정말 멋진 분이랍니다~
군인 아저씨 전방에서 근무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셔요. 저는 아저씨, 아니 선배님이 다니던 OO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여고생 OOO이랍니다~ 혹시 아세요? 요즘 저희 동네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한참이랍니다. 참, 군인 아저씨는 어떤 후보 지지하세요? 군대에 있으니까 잘 모르시겠다~ 제가 오늘은 후보 한 분 소개해 드릴께요. 기호 O번 OOO 후보는 정말 멋진 분이랍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호 O번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공약이 무엇인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참 물오른 프로필의 소녀들이 편지를 보냈단 사실(?)이고,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중에는 요즘이라면 아청법에 걸릴 법한 프로필도 있었지만 그땐 그딴 개념 없었다.
이놈 저놈이고 할 거 없이 취향에 맞는 프로필에 낚여서 그쪽이 소개해준 후보를 지지해주겠노라고 답장을 쓰는 놈도 있었고, 좀 더 저돌적으로 모든 편지에 지지하겠노라고 답장을 쓴 놈, 한 발 더 나아가 후임에게 온 편지의 주소를 따서 답장을 쓰는 놈도 있었다. 자신이 한 표를 행사할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나름 조사를 하고 찍은 놈도 있었지만, 부푼 꿈을 안고 부재자 투표에 참석하여 실제로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소개해 준 후보를 찍은 놈도 실제로 있었다.
분명한 건 그때 굉장히 많은 군인들이 수없는 답장을 보냈지만 그에 대한 답장은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낚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휴가 때 가슴 한 번 만져보겠다는 장정들의 소망은 산산조각나버렸다. 내 생각엔 시발 여대생이나 여고생도 아니었을 거 같다.
그로부터 26… 아니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 동안 대통령 선거가 3번 있었으며 이제 4번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옛날 생각이 나서 확인해 보니 이제는 저런 위문편지를 빙자한 미친 선거운동은 안 하는 것 같다. 이거 정말 다행스러운 일?
위문편지 선거운동이 없어졌다고 해서 미친 선거운동 방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변신했을 뿐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선거운동원을 이용해서 여대생이나 여고생을 사칭한 선거운동 편지를 보내는 대신, 예쁜 여자 얼굴을 프로필로 달고 트위터나 온갖 커뮤니티 게시판에 표를 움직일만한 글을 쓴다. 결국 방법만 달라졌을 뿐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이 ‘선거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16년 전 여대생을 사칭한 새끼가 후보 지지 편지를 보낸 것처럼 지금도 학생, 주부, 택시기사, 인터넷 얼짱 등 갖가지 프로필을 지어낸 사람들이 정치적인 정보들을 흩뿌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네 동네 정치인을 소개해 준다던 여대생에게서는 훗날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 정치인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날라오는 저 수많은 조언자들 역시, 선거가 끝나고 나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쌀로 밥 짓는 이야기이다. 남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표를 찍어야 한다는, 뭐 그런 당연한 얘긴데, 아, 옛날 생각하니 괜히 나만 또 빡쳐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