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여왕, 김연아가 돌아왔다. 한 시즌을 완전히 쉰 일 년 반 만의 복귀. 몸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으리란 기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복귀전에서 201.61점의 압도적인 점수로 우승했다. 이번 시즌에서 200점 이상의 점수를 기록한 것은 김연아가 유일하다.
사실 김연아는 2010 벤쿠버 올림픽에서 이미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우승을 차지하며, 빙판에서 “귤을 까 먹어도 우승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쯤하니 괜한 호기심이 생긴다. 정말로 김연아는 빙판에서 귤을 까 먹어도 이길 것인가.
일단 재미없는 글을 변호하기 위해 결론부터. 아쉽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점프를 하는 대신 귤을 까 먹을 경우,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는 10위를 차지하는 데 그친다. 한편 채점 기준이 같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 종합 선수권에서는 좀 더 약진하여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 뭐 3등이나 10등이나 세계 최강의 선수에게는 모자랄 수밖에 없으니, 어쨌든 김연아도 점프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얼음판에서 춤을 추며 점프 몇 번 팡팡 뛰고 그로테스크한 자세로 몇 번 휘리릭 돌고, 그러고 나선 소숫점 두 자리까지 뭔가 쓸데없이 자세해 보이는 점수가 나온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겨스케이팅이란 딱 이 정도 이미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춤을 추고 그로테스크한 자세로 몇 번 휘리릭 도는 것들이 어떤 의미이길래,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을 빼먹고도 대부분의 선수를 이길 수 있는 것일까? 이왕 보는 거 조금만 자세히 보자. 다행히 피겨스케이팅은 프로토콜(Protocol)이란 이름으로 일종의 채점표를 제공하고 있다.
어려운 내용은 빼 버리고 쉬운 부분만 골라 보자. 제일 위에 써 있는 제일 큰 숫자들이 최종 점수다. 각 기술들을 개별적으로 채점한 총 요소 점수(Total Elemental Score) 37.42점과, 기본적인 스케이팅 기술과 안무의 충실함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총 프로그램 구성 점수(Total Program Component Score) 34.85점을 더한 72.27점. 감점(Deduction)이 없으므로, 이것이 김연아의 최종 점수다.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이 이제 기술들이다. 시도한 순서대로 기입되어 있다. 간단히 구분하자면, Sp는 스핀(Spin)의 약자고, StSq는 스텝 시퀀스(Step Sequence)의 약자다. 그리고 그 글자가 안 들어있는 기술들은 전부 점프다. 그러니까 세 번 점프하고(3Lz+3T, 3F, 2A)와 세 번 휘리릭 돌고(FCSp3, LSp3, CCoSp3), 한 번 춤추면서 걸어다니면(StSq) 한 경기가 끝나는 셈이다.
자, 그러니까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세 군데. 3Lz+3T, 3F, 2A. 모두 점프다. 처음 하는 것은 연속 점프라서 + 기호로 붙어 있고, 나머지 점프는 단독 점프라서 그냥 혼자 있다. 앞의 숫자는 몇 바퀴를 도는지를 표시하는 것. 어쨌거나, 여기에서 점프 대신 귤을 까 먹으면서 김연아는 약 22.5점을 잃는다. 결국 최종 점수는 약 50점.
프리스케이팅도 같은 요령으로 보면 된다. 다만 새로운 항목이 하나 추가되었는데, 10번째 항목인 ChSq가 바로 그것. 코레오(Choreo) 시퀀스의 약자로 말 그대로 이런 저런 안무 동작을 조합해서 빙판 위에서 짧은 춤을 추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쨌든 여기에서의 점프 항목은 3Lz+3T, 3F, 3S, 3Lz, 1A+1T+1Lo, 3S+2T, 2A까지 총 7가지. 여기에서 김연아가 점프 대신 귤을 까 먹으면 약 41점을 잃게 된다. 결국 최종 점수는 약 88점. 그렇게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합산 약 138점을 얻으며, 당당히 대회 10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겨스케이팅의 규칙에 따르면 선수는 경기에 소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를 어길 경우 1점의 감점이 주어지는데, 따라서 김연아가 귤을 가지고 빙판에 들어오게 되면 자동으로 1점 감점. 거기에 선수가 빙판에 무언가를 떨어뜨릴 경우 1점의 감점을 받게 되므로, 귤을 다 까먹고 껍질을 버린다면 매번 1점씩 감점. 만일 까먹은 모든 귤껍질을 빙판에 버린다면 총 10점이라는 무시무시한 감점을 받게 된다.
귤을 까먹느라 다른 기술을 시도할 시간을 놓쳐서도 안 된다. 김연아가 점프 한 번에 소모하는 시간은 준비, 도약, 활공, 착지까지 도합 평균적으로 약 6~8초 정도. 따라서 김연아는 이 시간동안 귤 까먹기를 모두 완료해야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마칠 수 있다. 이 쯤 되면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아니라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인물인 것 같은데…
거기에 귤을 까먹느라 느려지는 활주속도도 문제. 특히 김연아는 빠른 활주를 기반으로 하는 선수라, 귤을 까 먹으면서도 속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다른 기술의 완성도도 그만큼 느려질 것. 결국 등수가 몇 등이고 상관 없이, 사실 점프 대신 귤을 까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알 수 있다.
뭐 괜찮다. 김연아님은 우월하시니. 그런데… 이거 아마 피겨스케이팅이란 스포츠 종목이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귤만 잘 까 먹어도 점수가 이렇게 나오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술을 씹어먹고 동메달이라니, 이거 스포츠 맞나?
그 비밀은 프로그램 구성 점수(Program Component Score, 이하 PCS)라는 항목에 숨어 있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피겨스케이팅은 기본적인 스케이팅 기술, 동작과 동작 사이를 연결하는 안무동작, 기술을 수행하는 수준, 안무동작의 충실성, 표현력 등을 함께 채점하여 점수로 낸다. 그리고 이 점수가 개별 기술들을 채점해 낸 총점과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관계자들이 대부분 인정하는 바, 김연아의 스케이팅 기술이나 안무 수행 등은 현세대 선수들 중 단연 독보적이다. 그러니까 한참 쉬다 나와도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겠지. 그러니 김연아가 높은 PCS를 받아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표현력’, ‘충실성’ 같은 항목은 사실 스포츠의 객관적인 지표로 삼기 무척 곤란한 요소들이다. 심지어는 ‘스케이팅 기술’ 같은 항목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리스케이팅의 퍼포먼스/수행(Performance/Execution) 항목을 보시라. 1번 심판은 다른 심판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7.50점이라는 점수를 매겼다. 반면 3번과 4번 심판은 다른 심판과 비교해 높은 9.25점이라는 점수를 매겼다. 학점으로 따지면, 똑같은 리포트에 누구는 A 학점을 줬는데 누구는 C 학점을 주는 셈이다.
결국 오늘날 PCS는 ‘이름값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김연아야 어쨌든 다른 선수에 비해 스케이팅 속도가 독보적이고 안무 동작도 이름값에 맞게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지만서도, 모든 선수가 그렇지는 않다. 어떤 선수는 이름값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어떤 선수는 이름값에 비해 잘 하는 편이란 평가를 받지만, 어쨌든 PCS는 대체로 유명한 선수에게 후하게, 무명 선수에게 박하게 매겨진다.
사실 이마저도 사정이 좀 나아진 것이다. 과거에는 아예 심판들이 6점 만점으로 ‘기술 점수’와 ‘표현 점수’를 책정하는 미친 방식을 쓰기도 했고, 잣대가 심판 맘대로라 심판 매수도 너무나도 자유로운(…) 이 방식은 결국 2002 솔트레이크 올림픽에서 판정 시비로 인한 초유의 공동 금메달 사태를 낳기도 했다. “피겨스케이팅은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예술이기도 하다”는 고집이 무명 선수를 가로막는 유리천장으로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숫자 놀음일 뿐이다. 실제로 점프를 하는 대신 귤을 까 먹는다면 그녀의 점수는 이보다 낮게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이게 귤 까먹기 대회가 아닌 이상 당연한 것이고, 실제로도 권위 있는 국제 대회에서 점프의 태반을 실패한 선수가 당당하게 금메달을 가져가는 게 이 스포츠가 당면한 현실.
한때 이 스포츠가 백인들의 스포츠로 여겨졌을 때 이를 극복하고 활약했던 한 흑인 선수가 있었다. 그는 주요 대회에서 다른 선수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표현 점수를 받곤 했고, 결국 금지된 기술을 선보이는 퍼포먼스로 이에 항의하고 은퇴했다. 이제는 누군가가 이 부패한 빙판 위에서 귤이나 까 먹을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김연아님 말고. 김연아는 금메달 따야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