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IGN 코리아에 실린 글입니다.
아내와 사별하여 슬픈 나날을 보내던 한 노인이 어느 날 비닐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쓴 채 시체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그 집의 가정부다. 가정부는 노인이 자살을 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무죄를 주장하지만, 검찰은 가정부를 살인죄로 기소한다. 노인은 심하게 저항한 흔적이 있었고, 비닐봉지에는 가정부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 가정부는 오히려 자살하려는 노인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에는 유일한 목격자가 존재하는데 바로 이웃집에 사는 15살 여중생 지우(김향기)다. 그런데 지우는 자폐증 소녀라서 증언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한다. 가정부를 기소한 검사(이규형)는 젊고 경험이 없지만 유능하게 돌아가는 머리와 특히 자폐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만만찮은 인물이다. 가정부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된 양순호 변호사(정우성)는 민변 시절 이름을 날렸고, 현재는 대형 로펌에 스카우트된 굉장히 능력 있는 변호사다. 지우의 인터뷰 영상만으로 증인 진술을 끝내려는 검사, 지우를 법정에 세워 직접 증인신문을 하려는 양변호사, 과연 사건의 진상은? 노인은 살해당한 것인가? 아니면 자살한 것인가?
미남 톱스타 정우성과 천만 영화 <신과 함께>로 이름을 널리 알린 기대주 김향기가 함께 공연한 법정 드라마로 한 노인의 죽음과 관련하여 치열한 법정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추리물이나 범죄물의 형식이 아니다. 재판보다 더 큰 주제가 자폐증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외침이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 장르가 복합적으로 걸쳐 있는 영화다. 한 변호사의 삶과 양심, 갈등 등 내면을 다룬 심리 드라마이고, 자폐증 소녀를 중심으로 장애에 대한 편견에 일침을 가하는 사회 드라마이며, 그런 장애에 대한 따뜻함과 관심을 다룬 휴먼 감성 드라마이기도 하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는 법정물이며, 한 사건을 파헤치는 추리물이기도 하고, 부패한 기업인과 법조인을 응징하려는 정의 구현 드라마이기도 하다. 드라마 장르에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거의 다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아주 약하긴 하지만 주인공의 로맨스도 쬐금 들어 있고.
정우성이 연기한 양순호 변호사는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 중년의 전문직이면서 꽤 유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40대 중반의 노총각인데 파킨슨씨 병을 앓기 시작한 연로한 아버지(박근형)와 단둘이 살고 있고, 아직은 그리 넉넉지 못한 상황이다. 민변에서 오래 활동하고 이름을 날린 나름 정의파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얼마 전 전관예우 변호사들이 운영하는 대형 로펌에 전격 스카우트되어 살림살이가 좀 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자, 이런 주인공의 상황, 정의롭게 살아왔고 불의에 맞서온 인물이지만 삶의 어느 지점에서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다만 적당히 때를 묻히면서 수구 기득권과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들이 전개되면서 주인공이 겪는 여러 갈등이 펼쳐지고 있다. 성공을 위해 변심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의 구현을 위해서 달콤한 유혹을 뿌리쳐야 되는가.
이런 양변호사와 어떤 사건 때문에 만나게 되는 한 소녀가 있다. 김향기가 연기한 임지우라는 여중생은 자폐증으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어렵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소녀다. 그런데 기억력이나 관찰력이 엄청 좋은 놀라운 능력도 있다. 자폐증 주인공을 소재로 했던 1988년 더스틴 호프만 주연 영화 <레인맨>에서 보면 자폐증 증상이 있는 주인공은 아주 놀라운 기억력, 관찰력이 있다. <증인>에서의 지우 역시 <레인맨>에서 보여준 자폐증 주인공과 거의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 다만 일반인과 상당히 다른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고, 그런 다루기 힘든 자폐증 소녀를 법정에서 증인으로 활용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처음에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추리 영화, 법정 드라마처럼 펼쳐지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친절한 변호사와 자폐증 소녀 간의 만남과 둘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이 제법 오래 전개되면서 법정에서의 공방전은 잠시 뒤로 미루어진 느낌이고 변호사와 소녀와의 전형적인 휴먼 드라마처럼 흐르고 있다.
살인 사건과 자폐증 소녀의 이야기, 이것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영화의 소재인데, 여기서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양변호사의 대학 동창인 수인(송윤아)은 중학생 딸을 키우는 인권 변호사인데 독성 생리대를 팔아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 악덕 기업을 상대로 법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수인과 양변호사 간에 살짝 로맨스의 암시가 전개되고 있다. 거기다 양변호사를 스카우트한 대형 로펌 조직은 이 악덕 기업 사장의 변호를 전담하고 있다. 즉 수인은 거대한 골리앗 조직과 싸우는 다윗 같은 존재다. 그리고 하필 연인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양변호사가 그 로펌에서 일하게 되면서 애매한 악연이 엮이고 있다.
살인사건, 악덕 기업의 부패에 맞서는 여성 변호사, 큰 로펌에 스카우트되어 양심과 출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자폐증 소녀가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과 그 소녀를 돕는 친구의 양면성, 노총각 주인공의 로맨스 뭐 등등 여러 이야기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부류의 영화는 결국 ‘정의 구현’이라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고 이 영화도 딱 그렇다.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정의 구현이 되며 거기서 얼마나 통쾌감을 보여주고 감동을 주는지가 관건이다.
출연배우가 많고 펼친 이야기도 좀 많은 느낌이라 후반부가 걱정되긴 했는데 나름 “한방”에 잘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결은 역시나 주인공의 몫이다. 관객의 바람대로 어느 정도 확실한 정의 구현이 되는 셈이다. 그 절정은 재판을 통해서 드러나는 진실규명 과정이다.
제목이 ‘증인’이니 당연히 증인의 진술이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증인이 자폐증 소녀이니 과연 어떻게 법정에서 제대로 증언을 하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 부분에서 나름 역발상을 통한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증인이 일반인과 다르기 때문에 증언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관객과 영화 속 인물들은 동일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런 상황이 많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은 절대로 하지 못할, 자폐증 소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증언이 (그것도 상당히 믿을만한) 결국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부분을 아주 그럴싸하게 다루고 있다. 거기서 정우성과 김향기가 벌이는 활약 또한 주인공답다.
영화는 끝이 재미있어야 더 인상적이기 마련인데 이 영화가 그렇다. 후반부의 반전 부분에서의 설정이 나름 흥미롭다. 물론 앞과 중간의 과정도 나름 무난하긴 하다. 액션 장르가 아닌 드라마로서 지루하지 않게 잘 끌고 가고 있다. 여러 사건을 다루고 등장인물도 많은 편이지만 영화는 전혀 어렵지 않고 산만하지 않다. 그리고 주인공들에게 역할을 잘 쥐여주고 있고, 관객이 원하는 방향대로 무난히 끌고 간다. 정의 구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감동도 있다. 신파 없는 감동이라 더 인상적이다.
나름 관객과 잘 타협한 착한 영화다. 친절한 변호사, 자폐증이지만 착한 소녀, 똑똑한 검사, 정의로운 여성 변호사, 헌신적인 엄마, 인간적인 아버지, 그리고 반대편에서 확실한 악역을 하는 조연들…. 너무 무난해서 심심한 영화라고 할까? 펼친 이야기가 많으니 영화는 다소 길어졌지만 그래도 2시간 좀 넘는 시간 동안에 잘 담아냈고 마무리도 잘 한 편이다. 액션, 로맨스 등에도 잘 어울리는 정우성이 사회물에서 나름 꽤 좋은 역할로 출연하고 있다. 부를 쫓으며 때 묻히며 살 것인가 정의를 택하며 명예롭게 살 것인가의 기로에서 당당히 주인공다운 선택을 하고 있다. 김향기는 훨씬 어린 역할을 연기했지만 자폐증 연기를 무난히 선보였다. 엄마로 출연한 장영남은 유난히 이 영화에서 인상이 좋아 보인다. 송윤아, 박근형 등 관록 있는 배우들도 주인공의 갈등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로 출연하고 있다.
너무 무난한 영화고 착한 영화라서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해서 흥행의 폭발력 여부는 미지수다. <말모이>도 그런 부류였지만 대박이 아닌 준히트에 그쳤었다. <증인>은 톱스타 배우를 내세웠지만 무리하게 제작비를 많이 들인 영화는 아니다. 자극이나 화려함 보다 무난함으로 타협한 작품이다. 늦겨울 극장가의 확실한 다크호스 역할을 할 것이다. 액션보다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드라마 장르를 원하는 관객이 찾기에 적당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자폐증이란 단어가 생소하지 않게 된 것은 1988년 영화 <레인맨> 덕분이다. 과거에 단순히 “바보” 취급을 당했던 “자폐증”이 하나의 장애 증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영화를 통해서였다. <증인>은 자폐증 소녀를 본격 주인공으로 활용했을 뿐 아니라 한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름 기발한 설정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폐증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감동도 주고 있다. 이 정도면 <레인맨> 못지않은 자폐증 소재의 영화가 되는 셈이다. 자폐증 소녀가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도 <레인맨>의 설정을 능가한다.
통쾌한 정의 구현과 따뜻한 감동 두 가지를 다 주는 영화로 봄이 찾아오는 길목에서 맞이하기 적당한 소재였다. 딱딱하지 않은 사회물이고, 편견에 대한 일침도 자연스럽게 싣고 있다. 걸작 여부를 떠나서 보고 나면 기분이 좋은 작품이다. 물론 영화가 기본은 되어야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원문: IGN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