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IGN 코리아에 실린 글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조사로 2017년 기준 국내 e스포츠 관련 산업 규모는 973억 원에 달한다.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던 이전 연도들에 비하면 낮은 수치지만, 2016년 대비 4.6%의 성장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 약 절반에 달하는 46.5%의 점유율을 ‘게임 방송사’ 매출이 차지한다. 다른 모든 부문을 합쳐야 겨우 엇비슷한 수준의 양적 규모다. 그러나 지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년 대비 -5%의 매출 감소가 눈에 띈다. 스트리밍 부분이 큰 폭의 상승세를 보인 것과는 대조되는 모양새다.
2019년을 맞이한 지금도 이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많은 이는 게임 방송사의 위기를 말하며 업계 종사자들은 이를 피부로 체감한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e스포츠 산업을 이끌어 온 가장 거대한 축이었던 게임 방송사. 그들은 지금 어떤 상황을 맞이한 걸까.
게임 방송사의 탄생과 발전
1999년 10월 2일, 애니메이션 전문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Tooniverse)에서는 이상한(?) 화면이 나왔다. 3명의 남자가 옹기종기 앉아서 한참을 떠드는가 싶더니 바뀐 화면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일명 ‘에일리언 인테리어’가 돼 있는 무대와 두 대의 컴퓨터, 그리고 선수라고 불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서로의 표정까지 다 보일 정도로 가깝게 마주 앉은 그들이 하는 게임 화면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되었다. 이것이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스타리그의 전신,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 대회이자 대한민국 e스포츠의 시작이다.
이 대회의 성공적인 반응에 힘입어 2000년 7월 4일, 게임 전문 케이블 채널을 표방하며 OGN(당시 Ongamenet)이 개국한다. 여기에 GhemTV(2003년 gameTV로 변경)와 MBCgame까지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게임 방송사 시대가 열렸고 방송사들은 당시 최고 인기 콘텐츠였던 스타크래프트 리그를 경쟁하듯이 개최한다. 그 뒤로 한동안 스타크래프트로 만들어지는 리그들은 게임 방송사들의 소위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게임 방송사는 2005년까지 성장을 지속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난립하던 게임 방송사는 OGN과 MBCgame의 양대 리그 체제로 안정화되었고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가 탄생했다. 그리고 2005년 5월 11일 양대 방송사의 통합 프로리그가 출범하며 스타크래프트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e스포츠의 초창기는 인기와 위세의 정점을 찍었다.
2006년 이후 드리워진 그림자
하지만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여러 문제가 불거진다. 앞서 언급한 통합 프로리그의 출범은 대승적인 화합과 이해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OGN은 2003년부터 이미 프로리그라는 브랜드로 팀 단위 대회를 운영했고 MBCgame 역시 2003년부터 ‘팀 리그’라는 이름의 단체전을 운영해왔다.
한국e스포츠협회(KeSPA)는 e스포츠의 종합적인 발전과 프로게임단의 견해를 대변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별개로 운영되던 두 개의 스타크래프트 단체전 경기를 통합시킨다. 이 과정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진짜 문제는 2007년에 터져 나온 ‘프로리그 중계권 파동’이었다.
최고의 인기 콘텐츠인 스타크래프트로 치러지며 인기 프로게이머가 총출동하는 프로리그의 중계권 이슈를 두고 한국e스포츠협회와 프로게임단, 그리고 양대 방송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섰다. 프로게이머를 보유한 한국e스포츠협회와 프로게임단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전반적인 팬들의 여론은 싸늘했다. 여기에 양대 방송사가 관여하지 않은 채 치러졌던 2007년 KeSPA Cup은 전대미문의 흥행 실패를 기록하며 방송 제작의 노하우는 하루 이틀의 시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만 증명하고 만다.
결국 두 진영은 한발 물러서서 이해관계를 정리했고 그렇게 극적으로 프로리그 중계권 협상이 타결되며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e스포츠 씬에는 더 큰 시련이 다가온다. 타협이나 협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문제는 바로 스타크래프트 자체였다.
스타크래프트, 그리고 리그오브레전드
2010년에 접어들면서 각 게임 방송사들은 포스트 스타크래프트, 즉 스타크래프트 이후 주력 방송이 될 만한 게임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는 게임’으로서의 스타크래프트는 이미 동력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보는 게임’으로서의 스타크래프트 역시 수명의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다.
사실 게임 방송사들이 스타크래프트 외의 다른 종목 발굴에 대한 시도를 등한시했던 것은 아니다. MBCgame은 워크래프트3 리그를 개최해 장재호 등 걸출한 e스포츠 스타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TEKKEN CRASH를 통해 아케이드 격투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OGN 역시 서든어택 리그와 카트라이더 리그로 상당한 화제성을 낳았으며 그 외에도 스페셜포스 등 여러 게임의 e스포츠 리그가 열렸고 종목에 따라서는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게임도 스타크래프트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말라가는 웅덩이처럼 스타크래프트 경기의 시청자는 지속해서 감소했고 한때 12개 팀까지 늘어났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단의 수 역시 하나둘 줄어들었다. 여기에 양대 게임 방송사 중 하나인 MBCgame이 폐국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게임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인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후원사조차 잡기 어려워진다. 그야말로 전례 없는 위기감이 e스포츠 업계의 모두를 짓누르던 바로 그때인 2012년 1월 13일, OGN은 LoL 인비테이셔널을 개최한다.
이 대회를 통해 LoL에서 포스트 스타크래프트의 가능성을 엿본 OGN은 곧 LoL Champions Korea(이하 LCK)를 개최하고 다시 한번 e스포츠 방송의 헤게모니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한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는 여전히 열렸으나 이전 같은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으며 스타크래프트 2는 한국에서 전작과 같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그 사이 OGN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장기라 할 수 있는 고 퀄리티의 영상들과 LoL 선수들의 성공적인 스타 메이킹을 바탕으로 e스포츠 씬에 새로운 시청자들을 유입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2013년 12월 28일, SPOTV GAMES가 개국하게 된다. SPOTV GAMES는 한국e스포츠협회, 그리고 NEXON과 손잡고 스타크래프트 2, 카트라이더, DOTA 2 등 다양한 종목의 중계를 도맡으며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야말로 OGN과 MBCgame에 비견될 만한 양대 방송사 체제의 부활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게임 방송사 주도의 e스포츠 판도가 이어지는 듯했다.
규모, 그리고 시대의 변화
잠시 질문을 던져본다. 현재 국내에서 치러지는 가장 큰 규모의 LoL 대회는 무엇일까? 물론 답은 LCK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범위를 ‘세계’로 바뀌었을 때도 같은 대답이 가능할까?
2011년을 기점으로 e스포츠는 크게 두 가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게임 제작사’가 직접 운영하는 리그의 출범이다. LCK가 출범하기 이전인 2011년 6월, 라이엇 게임즈는 ‘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대회를 런칭한다. 우승 상금은 무려 5만 달러. 지금까지 존재했던 게임 리그의 상금 규모 가운데 가장 높은 액수였다.
같은 해 밸브 코퍼레이션은 자사의 게임 도타2로 진행되는 대회 디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의 개최를 발표한다. 발표 당시 총상금 16만 달러에 우승 상금 10만 달러. 바야흐로 우승 상금만 10억인 e스포츠 리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금까지 e스포츠의 중심이라 자처했던 대한민국은 실력으로나 방송 제작 노하우 면으로는 여전히 최상위에 속했으나, 진행하는 e스포츠 리그의 위상이 한 단계 격하되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LCK는 결국 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 진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에 불과하다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리그였던 셈이다.
여기에 유튜브, 트위치 등 급속도로 발달한 미디어 플랫폼 역시 TV에 기반을 두었던 게임 방송사가 대응하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 게임 방송사의 집약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제작한 e스포츠 리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제된 미학과 세련됨은 없지만 자유도 높은 방송 환경과 분위기, 다양한 콘텐츠로 무장한 인터넷 방송인들이 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해 주목받았다. 이들은 게임 방송사가 기존에 갖춘 틀 안에서는 키워낼 수도, 컨트롤 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2~3년간 더욱 심화했다. 게임 방송사의 e스포츠 리그 제작 주도권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SPOTV GAMES는 주력 콘텐츠였던 e스포츠 리그의 대다수가 폐지되거나 축소되는 상황을 맞이해야 했고 OGN 역시 라이엇 게임즈가 LCK 제작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2019년에 접어들면서 소위 메이저로 분류할 수 있는 e스포츠 리그 제작에서 게임 방송사는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돌파구
최근 게임 방송사는 모바일 게임 리그를 적극 유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바일 게임은 기본적으로 기존 e스포츠 경기장과 같은 거대한 스튜디오가 필요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단순한 게임성이 있기에 스타 메이킹에도 어려움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들이 순수한 실력대결의 장이 아닌 Pay to win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기존 e스포츠 시청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포스트 스타크래프트, 포스트 리그오브레전드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게임 시장에서 큰 점유율을 확보한 배틀로얄 장르의 게임 리그가 진행 중이거나 런칭 준비 중이기는 하지만, 시청하는 e스포츠로서의 직관성에 불편함이 있다는 견해를 뒤집은 사례는 아직 없다. ‘플레이할 때 재미있는 게임’과 ‘플레이를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게임’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게임 방송사 스스로가 잘 아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e스포츠를 이끌었던 게임 방송사. 한때 그들은 분명 대한민국 e스포츠의 선구자였고 헤게모니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로 촉발되었던 e스포츠가 뿌리를 내린 지 햇수로 20년에 달하는 지금, 게임 방송사는 그 어느 때보다 역량의 증명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한 시대의 황혼기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원문: IGN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