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에게 공감하는 이상한 앵커
저도 딸이 있는데 중학생 딸이 성폭행을 당했고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아신다면, 여러분은 특히 아버지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런 상상도 하기 싫은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가해자인 10대 청소년을 흉기로 살해했습니다. 분명히 잘못했지만, 솔직히 그 아빠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2014년 3월 25일, TV조선 ‘뉴스쇼 판’에서 앵커는 군산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을 전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대체 어떻게 된 살인사건이기에 앵커가 ‘마음은 이해가 간다’고 얘기할 정도였을까? 앵커의 말만 들어보면 딸의 성폭행 사실에 격분한 아버지가 우발적으로 벌인 사건처럼 보인다.
사건의 실제
하지만 경찰 발표와 보도로 알려진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 24일 저녁 10시 20분께 전북 군산에서 박모(47) 씨가 최모(19) 씨를 살해했다.
- 박 씨 부부는 최근 이틀간 가출했던 딸에게 가출 이유를 묻다가 딸로부터 최모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부부가 함께 최 씨가 일하는 가게에 찾아갔다.
- 박 씨의 아내가 먼저 차에서 내려 최 씨의 뺨을 때렸고, 최 씨가 반항했다. 이에 박 씨가 미리 준비해간 식칼을 들고 차에서 내린 뒤 최 씨를 찔렀다. 최 씨는 도망친 후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 박 씨는 최 씨가 숨진 사실을 모른 채 자수했다.
- 박 씨의 딸과 최 씨가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시지에는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과 관련된 내용은 있었으나 그것이 성폭행이라는 내용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경찰은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수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박 씨의 딸이 자신이 성폭행당했다 주장한 만큼 마땅히 그 진위를 밝히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강력히 처벌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딸의 주장은 경찰에서 진술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가출을 추궁하는 와중에 나온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성폭행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즉 박 씨의 딸이 얘기한 성폭행은 그 실체가 너무나도 불분명한 사건이다.
반면 박 씨의 살인은 본인이 자수한데다 목격자도 다수, 사망한 피해자까지 있는 만큼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으나 그 실체는 거의 분명한 사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TV조선 앵커는 오히려 살인범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사건을 보도한 것이다. 사실만을 전달하는 딱딱하고 건조한 보도만이 뉴스의 지향은 아닐 테지만, 이런 식의 편향된 보도는 대단히 부적절하다.
TV조선만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논조가 비단 TV 조선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 연합뉴스: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딸이 지목한 용의자를 살해한 남성이 경찰에 자수했다. 이 남성은 사법기관을 믿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법의 심판자가 됐다.
- 경향신문: 성폭행 당한 딸 위해 심판자로 나선 아버지 / 영화 ‘돈 크라이 마미’는 성폭행 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부모가 직접 심판자로 나선다. 이런 일이 전북 군산에서 벌어졌다.
- 아시아경제: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가 경찰에 자수했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 속 내용이 실제로 벌어졌다. 돈 크라이 마미는 딸을 성폭행한 남학생을 부모가 직접 심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SBS CNBC: 성폭행 당한 딸이 지목한 용의자를 살해한 아버지가 경찰에 자수했다.
- 세계일보: ‘딸 성폭행’ 용의자 직접 심판…10대男 살해한 아버지 / 성폭행 당한 딸을 위해 부모가 직접 복수에 나서는 내용의 영화 ‘돈 크라이 마미’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진보지와 보수지를 가리지 않고 박 씨에게 감정이입한 듯한 기사가 많았다. ‘부모가 직접 심판자로 나섰다’는 식의 묘사는 마땅히 내려져야 할 심판을 사법기관 대신 부모가 집행했다는 인상을 준다. 심지어 경향신문과 세계일보, 아시아경제 등은 성폭행 당한 딸을 위해 어머니가 심판자로 나선다는 영화 ‘돈 크라이 마미’를 갖다붙이기도 했다.
꾸며진 이야기,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다
사건 보도가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건조한 문장만으로 채워져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 자체는 이견이 있을 만한 주장이니 굳이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박 씨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듯한 언론의 보도 태도는 여러모로 부적절했다.
또한 내사 과정조차 없었으며, 그저 딸이 부모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했을 뿐인 사건의 특성상 용의자라는 단어 선택 역시 부적절했다. 게다가 ‘심판자로 나섰다’고 표현하거나 ‘돈 크라이 마미’ 같은 영화를 인용하는 순간부터 기사의 중심은 살인사건에서 성폭행 사건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사에 아직 성폭행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 않았음을 밝혔더라도 그렇다. 당장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 반응만 봐도 박 씨에게 동감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네이트 판에는 숨진 최 씨의 지인이라는 사람의 글이 올라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귀던 사이로 성관계는 합의 하에 가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익명성에 기반한 인터넷 사이트의 특성상 이 글이 진실이라 장담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다. 실체가 불분명한 성폭행 사건이 만일 사실과 거리가 먼 조작된 것이라면, 이미 언론 보도로 인해 심판받은 성폭행범이 되어버린 최 씨의 명예는 누가 어떻게 회복시켜줄 수 있을까.
다행히 이 기이한 사건에 대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 사람이 많았던 탓인지, 언론의 논조는 금세 진실 공방이 있다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언론이 범했던 잘못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현실은 종종 영화보다 극적이라고 하지만, 기자가 극본가가 아닌 이상 현실을 극적으로 꾸며 쓰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펜은 힘이 세다.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그러하다. 그래서 펜의 무게는 더욱 무겁다.
woolrich outletFree Articles Online How to make mo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