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20년 덕업일치를 한 사람이 있다?!
덕업일치. 내가 하는 덕질 분야와 직업이 일치했다는 뜻으로 모든 덕후의 꿈이다. 흔히들 말하곤 한다. 덕질이 일이 되는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고. 천문학자 출신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도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한마디 하지 않았나.
천문학은 천문학자가 아닐 때 훨씬 더 재미있지.
하지만 생각해보자. 어차피 일은 괴롭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괴로울 것인가, 아니면 생판 관심도 없는 일을 하며 괴로울 것인가? 이왕이면 전자가 좋지 않겠나. 반대로 생각하면 ‘일’에서 조금이라도 즐길 거리를 만드는 게 본투비덕의 자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런데 이걸 이뤄낸 사람이 있다.
출입국 관리 공무원 23년차 이청훈 씨, 각국 여권의 역사를 연구해 책으로 내다
인천공항공사는 항상 세계 국제공항 평가에서 순위권에 꼽힌다. 여행 좀 다녀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인천공항이 얼마나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지. 여기에는 공무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다. 「페이퍼 플리즈」 라는 인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여권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청훈 씨는 출입국 관리 공무원으로 20여 년간 일했다. 만날 인천공항 출입국 게이트에서 직접 도장만 찍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남들이 노잼이라고 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각국의 여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 결과를 묶은 책이 바로 『비행하는 세계사』이다.
이 책은 정말 덕스럽다. 아무도 다루지 않은 분야를 혼자 열심히 파고 팠다는 점, 그걸 무려 20여 년이나(…) 하면서 혼자 키득댔다는 점, 그러면서 학자보다 더한 집념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 이쯤 되면 덕업일치를 넘어 일을 덕으로 만드는 훌륭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여권 덕후, 역사 덕후가 전하는 여권 속 역사 이야기
여권으로 역사 이야기를 얼마나 담을 수 있겠느냐고? 놀라지 마시라. 여권의 역사는 지폐보다도 길다. 무려 구약 성서(!)에서 페르시아 왕이 여권과 유사한 서류를 발급하는 내용도 있다. 당장 지폐만도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데, 하물며 유서 깊은 여권이라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책은 시종일관 역덕의 마음을 울리게 한다. 역사로 울리고 덕질로 또 울린다. 이를테면 이런 글들이다. 책의 깊고도 긴 내용을 간단히 Q&A로 정리해보았다. 이런 이야기가 12개국의 여권을 빌려 펼쳐진다.
Q. 영국은 왜 여권에 끊임없이 혁신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걸까?
A. 혁신은 무뎌지기가 쉽다. 혁신의 옆에는 늘 관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의 혁신이 오후가 되면 관성을 갖게 되고, 내일이면 변화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증기기관에선 앞서갔지만, 석유를 이용한 내연기관에서는 독일과 미국에 뒤처졌다. 또 가로등이 어느 나라보다 일찍 등장했음에도 가스등을 고수하는 바람에 전기 가로등의 등장이 늦춰지기도 했다. 영국은 이러한 역설을 직접 경험했던 나라다. 그래서인지 영국은 오늘날 영국은 지속적인 혁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 p.150
Q. 왜 캐나다의 여권에는 자국을 상징하는 단풍잎이 아니라, 복잡한 문장이 그려져 있는 걸까?
A. 국가 문장의 맨 윗부분에는 영국 국왕을 상징하는 사자와 왕관이 보인다. 캐나다가 비록 독립국가이지만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영국 여왕이 국가원수이기 때문에 있는 상징이다. 사자의 양옆으로는 두 개의 깃발이 보인다. 왼쪽은 영국의 유니언잭 깃발이고, 오른쪽은 프랑스의 백합 깃발이다. 백합은 오래전부터 프랑스를 상징해온 꽃이다. ― p.021
프랑스는 1763년에 일어난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함으로써 캐나다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캐나다에서 프랑스계의 비중은 만만치 않다. 전체 국민 중 영어 사용 인구가 58퍼센트에 이르고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22퍼센트이며, 그 외에 그 외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둘 다 사용하는 인구는 11퍼센트다. 캐나다는 이러한 국민들의 인적 구성을 감안해 백합을 국가문장에 포함하고 있다. ― p.022
Q. 수원 화성과 창덕궁, 훈민정음과 거북선을 품고 있는 대한민국의 여권은 어떠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걸까?
A. 거북선이나 훈민정음, 수원 화성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많은 이들의 집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다가 때로는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비장함과 결연함을 보인다. 이는 자신이 수세에 몰리더라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결정적인 때가 오면 그 흐름을 공세로 전환시켜 마침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 p.102
덕심으로 대동단결, 여권으로 배우는 세계사
책을 읽으며 자칭 많은 반성을 했다. 과연 덕후란 무엇인가, 나X위키를 끄적거리는 수준 가지고 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일찍이 공자가 말씀하셨다. 호지자(好之者) 불여낙지자(不如樂之者)라. 진정한 덕후는 역시 공자의 말처럼 ‘즐기는’ 수준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나.
아쉬운 면도 없지는 않다. 아무래도 공무원이다 보니 주관적 해석을 넣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영국이 혁신을 내세우는 건, 2차대전 후 계속 내리막을 걷는 자국에 뭔가 고양을 더하는 면이 있었을 것이라든가, 한국은 삼국시대를 넣으면 중국-일본과의 마찰이 있어서 타협했을 것이라든가… 그런 주관적 썰이 좀 더 들어갔다면 훨씬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은 현업에서의 집념 어린 연구로 우리가 모르는 부분을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간, 그 자세를 배우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대한민국 국민 2명 중 1명이 가지고 있는 여권에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우리가 생각이나 해봤을까. 여권은 단순히 해외여행을 위한 도구가 아닌, 한 나라의 개성을 드러내는 물건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여권도 마찬가지다. ― p.107
※ 해당 기사는 웨일북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