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부터 군 장병들에게 딸기, 초코, 바나나 우유 등 가공유를 배식하기로 하자, 낙농업계가 반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흰 우유 소비량이 줄어들어 낙농업계에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군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단면이란 생각이 드네요. 적당히 쓰는 소모품, 남는 거 꾸역꾸역 밀어 넣는 짬 처리반.
군대 복무 문제는 20대 남성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의 근원 중 하나겠죠. 다들 지나고 나니 “고작 입대로 찌질하게 군다”고 20대 남성들을 비웃는데, 과거를 떠올려보면 저만해도 정말 입대가 지옥만큼 싫었거든요.
쿨한 척하지 말고 여기서부터 주목해보자고요. 군대는 엄청나게 큰 문젯거리에요. 갑자기 모든 남자를 1년 반 동안 죄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구렁텅이로 처넣는다고요. 사소한 문제들, 변으로 꽉 차서 물도 안 나오는 재래식 화장실 등 한 40년쯤 과거로 타임 워프한 듯한 삶의 질은 접어놓더라도요… 제일 큰 문제가 아래와 같은 것인데,
- 시간을 박탈한다는 것
- 신체적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
- 경력을 박탈한다는 것
이걸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봐요. 돈? …쉽진 않을 것 같아요. 2018년에 병장 월급을 21만 6천 원에서 40만 6천 원까지 인상했지만 그 정도로 사람들이 고마워하진 않을 거예요. 엄청나게 올랐지만 사실 목돈이라기엔 낯뜨거운 수준이니까요. 적어도 100만 원 이상은 돼야 하지 않나 싶긴 한데, 그것도 충분한 보상이라고 볼 순 없고, 충분히 만족하지도 않을 거라 보고요…
이 박탈감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병제’가 유지되는 이상 완전히 해결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성 평등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수록 군대 문제가 안 올라올 수도 없다고 보고요. 자꾸 일부 사람들이 이런 문제 제기를 ‘찌질하다’며 묵살하려 하는데 이거 절대로 작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성별만을 이유로 1년 반 동안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게 어떻게 작은 문제에요?
다만 이런 박탈감을 그나마 줄일 방법은 있겠죠. 신체적 자유를 조금만 덜 박탈하더라도 좋을 거예요. 휴대전화도 좀 쓰게 해 주고, 외박도 좀 자유롭게 나가게 하고. 이러면서 병영 부조리도 자연스레 줄여나갈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저는 ‘기분’인데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성 평등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데 고작 20대 남자애들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고? …네, 저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1년 반 동안 신체적 자유를 박탈할 거라면. 존경해줘야 해요. 신체적 자유를 헌납하고 국경을 지키는 숭고한 행위에 대해서요.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고, 고마워해야 하죠. 그런데 현실은 그냥 군바리 취급이잖아요. 소모품, 짬 처리반.
또 요즘 터지고 있는 여러 사회 문제가 이들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하죠.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총을 들지 않을 양심을 인정하라!” 그럼 궁금해지죠. 왜 세금을 내기 싫은 양심은 인정받을 수 없지만, 총을 들지 않을 양심만은 인정받아야 할까요? 총은 살인의 도구니까 그렇대요.
그럼 살인 무기를 든 나는 뭔데? 누군 살인 무기를 들고 싶어 들었나?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양심이란 그런 뜻이 아니고… 개인마다 다른 것…” 같은 교과서에나 나올 말을 하기 전에,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 의문에 성실하게 답을 해 줘야 해요.
“총을 들어서라도 가족과 사회를 지키려 하는 당신의 숭고함에 감사한다.”, 사실 이게 기초가 되고 그 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의의를 얘기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그러지 않았죠. 어디서는 징병에 응한 것만으로도 가해자라는 얘기가 나오질 않나 말이에요.
국민개병제 대상이 남성만인 이유에 대해 식자들은 이렇게 말하죠. “국방의 의무는 사실 병역의 의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납세를 비롯해 사회, 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모두 국방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건 궤변이라고 봐요. 징병을 남성만 대상으로 하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법리적 궤변. 병역 말고 뭐가 그렇게 뚜렷하게 국방에 이바지하나요? 남성도 납세만으로 국방의 의무를 할 수 있게 해 주나요?
‘그건 국가에 요구하라!’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미 하고 있어요. 군인권센터 같은 곳도 있고, 많은 사람이 여기에 군 내부 부조리를 내부고발하고 있고요. 씨알도 안 먹혀서 그렇지(…) 군 부조리는 고발에 고발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이제 지겨울 정도고요. 게다가 국가가 군인을 막 대하는 것만큼, 우리 사회도 군인을 막 대하고 있어요. 직접적으로 징병해가고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건 행정부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들, 수많은 개인들, 수많은 사인들이 군인을 ‘군바리’ 취급하고 있죠.
예전에 이런 모멸을 참을 수 있었던 건 그게 ‘남성’의 의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군필 남성이 사회의 주축이고, 그들이 가정을 먹여 살리고, 기업을 돌리고, 국가를 지탱하는 존재였으니까. 그 ‘기분’이 그들을 지탱해왔던 걸지도.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요. 아니어야 하잖아요. 소모품, 짬처리반. 바나나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 존재들. 그게 지금 군인을 대하는 사회의 솔직한 시선이잖아요. 마지막으로 가공유 군납에 대한 한국낙농육우협회의 논평을 인용해볼게요.
군 급식 지향점은 군 장병 체력증진에 있다. 당이나 색소, 수입 분유가 함유된 가공유를 군 급식에 포함하겠다는 것은 군 급식 목적에 역행하는 것이다.
바나나 우유 하나 먹는다는데, 무슨 대역죄라도 저지르는 것 같네요.
원문: 임예인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