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IGN 코리아에 실린 글입니다.
보통 해가 바뀌어 1월이 되면 슬슬 아카데미표 영화들을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블록버스터 시즌인 여름 대목이 끝난 후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 슬슬 미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은 이듬해 열리는 아카데미 상을 노리는 감성 드라마 위주로 편성되곤 한다.
그 영화들은 1~3월에 우리나라를 찾는다. 2018년의 경우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비롯해서 〈쓰리 빌보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플로리다 프로젝트〉 〈더 포스트〉 〈아이, 토냐〉 같은 영화들이었다. 올해에도 그런 유형의 영화로 먼저 찾아온 작품이 바로 〈그린 북〉이다.
우선 영화 제목부터 좀 궁금했다. 〈그린 북〉이란 도대체 뭘까?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백인과 흑인, 이 상황에서 일단 〈언터처블: 1%의 우정〉이 연상된다. 설정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남자, 흑인 백수와 백인 갑부 장애인 간의 만남과 우정이 그 영화의 주제였다.
흑백의 두 남자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그린 북〉은 좀 더 인종차별에 대한 주제를 깊게 다룬다. 차별과 편견, 1960년대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들을 토대로 실화와 영화적 픽션을 적당히 가미해 만든 작품이다.
두 남자의 로드무비는 비교적 자주 활용되는 이야기라서 혹시 식상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그리고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긴 영화(대작이 아닌 드라마 장르로는 꽤 긴 시간이다)라는 점, 보기 전에 이런 우려가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좋은 영화라도 집중력을 꽤 필요로 하는 영화들도 종종 있기 마련이다. 과연 〈그린 북〉은 어떻게 시작하고 흘러갈까?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자면 2018년에 발표된 영화 중 아마도 〈보헤미안 랩소디〉와 〈로마〉가 거의 큰 이견 없이 많은 사람에게 찬사를 받은 작품이었는데, 〈그린 북〉은 이 두 영화를 넘어서는 평가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걸작 발견’인 셈이다.
영화를 보면서 깊게 끌려들어 가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게 흘러간다. 두 남자가 펼치는 미국 남부지역의 순회 여정에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동반자가 된다. 좋은 영화이며 꽤 재미난 작품이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기대감이 보는 내내 이어진다.
1960년대는 아직 미국 지역에서 흑인 차별이 꽤 많이 남아 있던 시기다. 그 당시 할리우드에서 이름 있는 주연급 흑인 배우라고는 시드니 포이티어 한 명이 유일했고,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남부 지역에서는 백인이 흑인을 살해해도 별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차별이 심했다. 포이티어가 주연한 〈밤의 열기 속에서(In the Heat of the Night)〉(1967) 같은 영화를 보면 주인공 흑인의 직업이 무려 ‘경찰’임에도 백인 남자들에게 린치를 당할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랬던 시대, 클럽에서 안내 및 해결사 같은 일을 하던 이탈리아계 남자 토니(비고 모텐슨)는 가게가 임시 휴업으로 문을 닫게 되자 졸지에 백수가 된다. 일자리를 찾던 중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운전기사 자리를 제안받는다.
돈 셜리는 꽤 부유한 인물이었고, 전국을 돌면서 순회공연을 펼치는 유명 피아니스트였지만 놀랍게도 흑인이다. 워낙 출중한 피아노 실력 때문에 흑인임에도 성공한 예술가가 되어 순회공연을 다니는 것이었다. 수틀리면 폭력을 휘두르는 다혈질이고 꼴통 기질이 있는 토니가 과연 흑인의 운전기사 겸 조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단순 무식한 남자 토니와 너무나 깔끔하고 세련된 예술가 돈 셜리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두 사람의 긴 여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상상 이상으로 재미가 있다. 너무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 출발부터 뭔가 불안 불안한 느낌이다. 두 사람은 서로 간의 대화부터 주도권 싸움이 팽팽하다. 명색은 분명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 주인과 하인의 관계,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인데, 토니에게 공손함과 깍듯함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는 운전하면서 너무 많이 떠들어 대고, 담배를 퍽퍽 피워대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돈 셜리 역시 토니를 막 대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지만 지적할 것은 또박또박 지적하고 나름 지켜야 할 룰에 대해서는 꽤 까다롭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차이로 인해 부딪치고,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그런 과정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뭐 뻔한 내용? 생각 외로 그렇지 않다.
셜리는 남부지역만을 다니며 순회공연을 한다. 왜 남부지역일까? 알다시피 남부지역은 북부와 달리 흑인차별이 굉장히 심한 곳이다. 그것 때문에 그 유명한 남북전쟁까지 치르지 않았는가? 편하게 북부지역 공연을 할 수 있음에도 셜리는 고집스럽게도 남부지역만을 순회한다.
그런 과정에서 토니는 셜리가 몸소 겪는 차별의 고난과 그런 상황에서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최고급 브랜드의 피아노를 요구하고, 상류층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며, 늘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숙소에서 조용히 ‘혼술’을 즐기는 셜리를 보며 화려함 뒤에 깃든 슬프고 고독한 분위기를 느낀다.
자기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배려, 대화, 소통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아마도 그의 고통과 어려움을 직접 옆에서 함께 경험해 보는 방법일 것이다.
자유분방한 한량 같은 인물 토니의 눈으로 본 돈 셜리의 삶.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한 예술가로서의 갈채와 환호에 싸여 있지만 흑인으로서 극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제약과 한계,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얻는 고통과 그것을 인내하는 자기 통제력 등… 토니와 셜리가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고 가까워지는 과정을 여행 중에서 겪는 여러 사건과 상황을 통해서 굉장히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왜 셜리가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인물이 아닌 토니와 같은 무대포, 꼴통끼 있는 운전기사를 채용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망나니 같고 제멋대로인 토니는 셜리에게 굉장히 적합한 인물이었다. 몇 달간의 긴 여정을 함께 한 토니와 셜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우정이나 관계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체험과 이해를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필요한 존재로서 거듭난다.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시드니 포이티어… 이들은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 꽤 유명했던 흑인 연예인 스타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성공한 유명인이자 흑인이었던 이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어느 정도 실감이 갔다.
흑백 간의 갈등과 차별을 선과 악의 관계나 억지 설득이 아닌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해시키며, 이런 과정을 통해 토니와 셜리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모든 과정이 꽤 재미있는 스토리 라인을 통해서 전개된다.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 장르 영화로는 꽤 재미가 있다.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같은 코미디 히트작들을 연출했던 피터 패럴리 감독, 일명 ‘패럴리 형제’로 유명했던 관록의 감독이 과거보다 훨씬 무르익고 탄탄한 거장이 되어 연출한 느낌이다. 좋은 주제와 의미 있는 내용도 충분한 재미를 제공하면서 보여주어야 더 큰 공감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작품이다.
〈그린 북〉이라는 제목은 흑인들이 여행할 때 필요한 가이드북, 즉 여행안내서를 지칭한다. 전국 곳곳에 흑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숙박업소 및 식당 등이 즐비하기 때문에 그런 안내서가 필요했다. 그 책을 저자인 그린의 이름을 따서 ‘그린 북’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936년부터 1966년까지 흑인 운전수나 여행객에게 널리 활용되었다고 한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을 통해서 존재감을 과시한 비고 모텐슨이 그때와는 너무 다른 비대하고 나이가 든 모습으로 등장해 주인공 토니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헝거 게임〉에서의 용맹한 전사, 그리고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문라이트〉를 통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마허샬라 알리가 돈 셜리 역으로 호연한다.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보헤미안 랩소디〉와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1월에 개봉한 외국영화 중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걸작으로 적극 추천한다. 이런 걸작을 발견할 때 얻는 희열은 영화 관객만이 느끼는 큰 행복이다.
THE VERDICT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발견한 가장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크게 호불호가 갈릴 일이 없는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무난한 걸작이며,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로마〉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펼쳐질 치열한 3파전이 벌써 기대가 된다. 흑인 노예 제도의 부당함을 다룬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노예 12년〉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고 설득력도 강했다. 기대를 뛰어넘는 걸작이다.
돈 셜리와 토니의 관계 같은 갑을 관계가 과연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까? 차별은 미국의 흑백문제만이 아니다. 여성차별, 장애인차별, 노인차별, 학력차별, 빈민차별, 다문화가족 차별, 곳곳에 만연한 차별과 갑질, 과연 이 영화를 보고 ‘남의 일’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갑과 을이 아닌 동반자이자 동료 관계, 차별 없는 세상을 갈망하는 여러 사람에게 매우 위안이 되는 작품이다.
원문: IGN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