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담하던 정신과 환자의 흉기에 정신과 의사가 유명을 달리하셨다. 김성수 PC방 살인사건이 전 국민을 경악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심신미약 판정과 감형에 관한 논란이 아직 식지도 않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너무 끔찍한 범죄였기에 벌써 이런 논의를 시작하기엔 부담스럽지만, 특히 고인은 심신미약을 포함한 사람의 정체성을 치료하던 이였기에 심신미약 처벌 논지에서 조금 벗어난 접근을 했으면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설령 사형을 당하더라도 신념을 거스르는 총을 쥘 수 없는 진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누구나 똑같이 손해를 보는 인생의 불이익을 편법으로 피해 보고자 하는 병역기피자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자기 인생을 손해 보기 싫다는 본성이나 사람을 죽이기 싫다는 마음가짐보다 종교가 특별 우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긴 하지만, 적어도 종교적인 진정성을 가진 사람을 가려낼 수는 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에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진정한 신앙심을 가려낼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특별한 거부감 없이 얼마든지 여호와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심신미약으로 인한 범죄 감형이나 무죄도 마찬가지다. 진짜 심신미약자들은 아무리 엄벌을 내리더라도 사리를 판별할 능력이 없기에 일깨워지거나 예방되지 않는다. 정말 심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창밖으로 아이를 집어 던져 살해한 정신이상자는, 그 죄의 크기가 얼마하건간에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고 인정되었다.
영화 〈식스 센스〉의 주인공인 정신과 의사 말콤은 자신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정신과 환자에게 살해당하고, 제대로 치료를 못 했다는 자책이 한이 되어서 귀신으로 남아 정신과 환자들을 계속 도와주려고 애쓴다. 그는 자신을 살해한 환자를 원망하기보단 그를 치료하려고 했다. 당연히 일반 대중들은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아온 의사를 무참히 살해한 환자를 비난하고, 심신미약이라는 변명 따위로 죗값을 덜 치르는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윤리이자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처벌의 수위와 상관없이 존재하지만 가려내기 어려울 뿐이고, 진정한 심신미약자는 감형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가짜와 가려내기 어려울 뿐이다. 우리는 심신미약을 연기하는 정상인을 심신미약자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재판 또는 사회적 인정 혹은 보험 심사와 별개로 원래 질병으로서 존재하는 정신과적 병리를 보이는 환자는, 그 존재를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면 당연히 관찰과 치료의 대상도 아니게 된다.
모든 정신과 환자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처벌과 별개로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정신과 환자는 원래 위험하다.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해 없이 사형당하는 진짜 심신미약자들은 어차피 계도되지도 않는다. 동물원에서 탈출한 사자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인간 사냥을 하다가 사살된다. 경찰이 사자를 사살하는 이유는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자를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과 환자의 흉기 난동에 정신과 의사가 사망한 것은 정신과 환자의 심신미약 여부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 아마 정신과 환자는 정말로 사리 분별이 안 되었을 수도 있고, 사리 분별은 되지만 극도로 불안정한 감정에 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우선 정부는 악용 가능성을 이유로 정신병 환자들의 입원을 매우 어렵게 만든 과거가 있었다. 많은 전문가가 그에 대한 부작용을 경고했다. 물론 억울하게 정신병원에 감금된 정상인도 있었겠지만, 억울한 사람을 막기 위해 지나치게 어렵게 설정된 입원 기준은 의학적으로 입원이 필요한 잠재 살인자들까지도 멀쩡히 거리에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또한 환자 이익단체를 위시한 몇몇 정치꾼들은, ‘폭력이 무서우면 어떻게 의사를 하느냐’는 막말을 퍼부으며, 각종 정신질환자와 주폭을 포함한 이들에게서 의료인이 자신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진짜로 잘못을 저지른 놈은 동물원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난동을 부렸던 사자가 아니다. 물론 사람을 죽인 사자는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도 즉각 사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난 문제의 해결 방식이지 재판이나 교정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반성할 능력조차 없이 동물적 본능만을 따른 사자의 처벌 수위를 논하고 있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사자는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기에 그런 논의로 힘을 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사자를 흉내 내지 못하지만, 정상인은 심신미약자를 흉내 낼 수 있기에 상황이 복잡해질 뿐이다.
그러니 그보다는 누가 동물원의 문을 잠그지 못하게 했는가. 누가 사자의 인권을 위한다며 극히 위험한 상태의 사자를 밖에 풀어놓으라고 했는가, 누가 ‘사자가 무서우면 어떻게 사육사를 하냐’면서 보호장구를 지급하지 못하도록 했는지, 사육사가 사자를 압도할 손발을 묶어 놨는지 꿰뚫어 봐야 한다. 사자가 아니라 치타든 곰이든 언제든지 뛰쳐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야생성 때문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멸종 위기의 맹수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던 사육사의 뜻을 기리려면, 가짜 심신 미약자들 때문에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했던 진짜 심신미약자들의 인권과 치료에 힘을 쏟았던 이의 뜻을 기리려면 사자를 탓하지 마라. 심신미약자를 탓하지 마라. 누가 그들을 통제 불가능하게 방치했는지 생각하라. 그는 2019년에도 스스로 임명한 단체 대표로서 각종 보건정책에 영향을 미칠 예정이다.
원문: John Lee의 페이스북
참고 기사
- 「“폭력이 무서우면 어떻게 의사하나?”」, 의협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