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한국의 페미니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했던 때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페미니즘 이슈가 한국 사회의 전면에 등장했던 한 해였습니다.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이에 반발하는 이들의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해져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새해가 된 지금에서야 ‘2018년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가볍고 짧게 키워드로 정리해 봅니다. 빠진 사건들이 굉장히 많을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1. 미투 운동
서지현 검사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미투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들의 고발은 남 성중심사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여성을 동등한 시민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시선, 성폭력을 조장·묵인·방조하는 강간문화 등이 모조리 잘못됐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렇듯 미투는 강력한 반성폭력 운동임은 물론 남성이 만든 시스템의 민낯을 까발리며 ‘변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 “법무부장관 있는 자리에서 성추행” 현직 여성 검사 폭로
- “한국엔 미투가 없었죠?” 게으르고 건방진 그 말
- 데이트폭력 살인범도, 찜질방 추행범도 풀어준 법원
- 법원은 왜 안희정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나
- “내게 다리 만져보라던 교감… 이런 세상 끝장내고 싶다”
2. 디지털 성폭력 문제와 웹하드 카르텔 고발
2018년 여성들의 공분을 가장 크게 산 문제는 단연 ‘불법 촬영’일 것입니다. 만연하던 디지털 성범죄 영상과 불법촬영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이전부터 쏟아져 나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편파 수사 논란, 한 연예인 남자친구의 불법영상 협박 등의 사건은 여론에 불을 지폈습니다.
또한 위디스크 양진호가 헤비업로더를 관리하며 성범죄 영상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웹하드 카르텔’에 대한 문제 제기도 계속됐습니다. 다행히 지난 11월 디지털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3. 혜화역 시위
‘워마드’에 올라온 홍대 불법촬영 게시물에 대한 경찰 수사는 여러모로 이례적이었습니다. 8일 만에 여성 가해자를 잡고 포토라인까지 세운 것입니다. 여성들이 ‘편파 수사’라며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왜 여성들이 피해자일때는 “어렵다”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라고만 말해왔으면서, 남성이 피해자일 때는 빠르게 수사를 했냐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로 시작한 게 혜화역 시위였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의의가 매우 큰 시위였습니다.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여섯 번의 시위를 통해 분노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이는 정부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여성폭력과 여성혐오 등에 경각심을 가지라는 강한 압박이 됐습니다.
4. KTX 해고 승무원 복직
결이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은 2018년 여성 노동자들이 이룬 가장 값지고 자랑스러운 성과입니다. 지난해 7월 코레일과 해고승무원들의 복직 합의가 이뤄졌고 4,521일 동안의 싸움은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험난했습니다. 특히 KTX 해고 승무원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한 판결이라는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됐습니다.
5. 낙태죄 폐지 운동
한국사회엔 여전히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는 법으로 ‘낙태죄’가 존재합니다. 이에 여성들은 꾸준히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여왔습니다. 특히 2017년 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이 있었고, 지난해 5월 헌재의 ‘낙태죄 위헌 심판 공개변론’ 전후로 낙태죄 폐지 운동이 가속화됐습니다.
특히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과 ‘비웨이브’가 중심이 되어 폐지 여론을 만들고, 정부와 헌재 등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첫 공개변론 이후 위헌 심사는 6기재판부로 미뤄졌고, 지난달 21일엔 경남 남해경찰서가 특정산부인과를 이용해 여성들의 낙태 사실을 취조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6. 탈코르셋
가부장제 사회가 규정한 미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여성들은 지금껏 ‘꾸밈노동’의 압박에 시달려왔습니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긴 머리, 화장, 다이어트 등에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10대 여성들이 과도한 메이크업을 요구받는 분위기와 갑갑한 교복과 속옷 등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탈코르셋 인증’을 시작했습니다. 짧은 머리나, 화장품을 버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식입니다.
탈코르셋은 단순히 10대들의 문화로만 끝나진 않는 분위기입니다. 여성을 외모로 판단하는 풍조와 사업장의 불필요한 복장-외모 규정에 대한 비판은 곳곳에서 이어집니다. 또한 안경을 쓴 아나운서가 늘어나고, 스튜어디스의 용모 규정이 바뀌면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7. 역사 속 여성들 재조명
2018년 초 〈1987〉이 개봉하면서 여성들의 민주화운동 역사가 영화 속에서 지워졌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1970~1980년대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여성들을 조명하고 재발굴하자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또한 역사 속 페미니스트들이 다시 조명되고,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습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문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축사에서 해녀 항일운동을 언급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할 것을 공언했습니다.
8. ‘페미니스트 정치’의 시작
6.13 지방선거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였습니다. 그의 슬로건은 명확하고 단호했습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그의 서울시장 출마를 통해 ‘페미니스트 정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벽보가 훼손되고 수 없는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지지하는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다만 선거 결과로 놓고 보면 여성은 ‘광역단체장 17명 중 0명, 기초단체장 226명 중 8명’밖에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여성에게 정치의 벽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여성 정치인을 늘리기 위한 제도나 법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커집니다.
9. 여성 영화, 여성 예능인을 향한 지지
영화 〈미쓰백〉은 특별한 영화였습니다. 여성 감독에 여성 원톱 주연. 이것만으로도 흔하지 않은데 심지어 여성 관객의 연대를 통해 ‘손익분기점’인 관객 70만 명을 넘겼습니다. 소위 ‘쓰백러’라고 불리는 마니아층이 입소문 내기, 단체 관람, 예매만 하고 가지 않는 ‘영혼 보내기’ 등으로 미쓰백의 흥행을 도운 것입니다.
비슷한 현상은 역시 다수의 여성 배우들이 나오는 〈허스토리〉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허스토리안들이 계속 단체관람을 이어나가며 영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남성 중심 영화’에 질린 여성들이 ‘여성 서사 영화’가 잘 안 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영화판과 더불어 역시 〈아는형님〉 〈해피투게더〉 등 남성들이 독식한 예능판에 대한 비판이 늘었고 여성 예능인 재조명이 이어졌습니다. 온라인 상에서는 송은이, 김숙을 비롯해 유리천장을 뚫은 이들의 재평가와 응원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고, 이는 여성 예능인이 더욱 활발히 활동할 원동력이 됐습니다.
10. 백래시: 게임업계 페미니즘 마녀사냥과 총여 폐지
2018년은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를 뒤흔들고 확장성을 갖게된 만큼, 백래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짜 미투’라는 악플,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연예인들에 대한 공격, 산이의 〈페미니스트〉 가사까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의 ‘반 페미니즘’ 움직임이 가속화됐습니다.
그중 게임업계의 페미니즘 사냥은 생계를 위협한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남성 유저들은 게임에 참여한 개발자나 원화가들이, 페미니즘 관련 계정을 구독하거나 관련 글에 좋아요만 눌러도 ‘메갈’로 몰아가며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게임회사는 노동자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마녀사냥당한 원화가들을 ‘계약 해지’ 조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한 게임회사에서는 직원이 민우회 계정을 팔로우했다는 이유로 사장이 이 직원을 ‘공개 사상검증’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총여 폐지’ 역시 백래시의 한 단면입니다. 연세대는 총여가 개편됐고, 동국대 성균관대는 투표를 통해 총여가 폐지됐습니다. 물론 총여 폐지를 단순히 ‘여성혐오’ 현상으로만 분석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총여가 왜 필요하냐”며 반발하는 대학생들의 반응들과, 익명 커뮤니티의 ‘페미니즘 조롱’ 움직임은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치며
2018년을 앞두었을 땐 2017년의 페미니즘 이슈를 달별로 정리해서 ‘아는 페미‘ 계정에 올렸습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1년 2개월간 오마이뉴스의 페미니즘 콘텐츠를 공유하는 ‘아는 페미’ 계정을 동료들과 함께 운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정상 하지 못하지만요.
계정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이슈를 정리하니 부담스럽고, 민망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저 스스로는 한 해를 정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남겨 봅니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