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뒤로 물러서고, 대선에서도 지리한 공방 끝에 결국 뒤로 물러섰다. 재보선을 통해 드디어 국회에 입성했지만, 여전히 정당 없이 무소속 의원으로 남아있었다. 그랬던 그가 드디어 전면으로 나섰다. 전통의 제 1야당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그는 이제 야권을 손에 쥘 기세다.
안철수.
정치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통 잘 모르는 평범한 유권자 입장에서, 안철수는 참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리고 무서운 사람이다.
정쟁의 종식, 민생의 추구
그가 추구하는 정치란 정쟁의 종식이며 민생을 돌보는 정치다. 좋은 말이다. 문제는 그 말이 실제 어떤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지다.
예를 들어 4.19나 5.18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당장의 민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괜히 정당간의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남북공동선언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굳이 명기할 필요도 없다. 이는 불필요한 종북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대북관계 개선은 그걸 굳이 명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썩은 정치권을 도려내기를 원한다. 그는 지방선거 기초 무공천을 통해 공천 과정에서의 부패를 끊어내려 한다.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썩어빠진 국회의원 따위 많아봤자 싸움이나 할 뿐, 민생을 돌보는 데에는 도통 쓸모가 없는 것이다.
민의를 가장 잘 반영하는 정치인
그런 점에서, 사실 그는 민의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정치 혐오다.
국회에 대한 불신은 쌓이고 쌓여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10% 전후를 달리고 있다. 사기꾼도 그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을 것이다. ‘국회의원 그 새끼들 다 갈아버려야’ 하며,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거 없이 정치인 놈들은 시끄럽기만 한 놈들’이다. ‘서민들은 생각도 않고 국회에서 쌈박질이나 하는 놈들’인 것이다.
사실 이 수준의 정치 혐오가 생기기까지 기성 정치인들의 잘못이 없었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얘기야 이젠 뉴스거리도 아니다. 요새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치고 흠결 없이 끝나는 일이 없다. 너무 다들 흠결 투성이다보니 이제 흠결이 흠결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끔찍하고, 꼴보기 싫다. 정말 이 나라 정치권에는 암이 번질 대로 번진 것 같다.
극단적인 처방, 안철수
하지만 안철수는 너무 극단적인 존재다. 암세포를 도려낼지도 모르지만, 세포까지 죄다 도려내버린다.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이렇다 저렇다는 얘기는 많지만, 그건 사실 그리 와닿지 않는 얘기다. 당장은.
오히려 시끄러운 논쟁이 훨씬 더 빨리 와닿는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남북공동선언을 계승한다면 왜 박정희의 남북성명은 계승하지 않는 것이냐, 5.18을 계승한다니 빨갱이가 아니냐 등등. 당장 국정원 선거개입 사태나 증거조작 사태 등 정부의 정통성 자체를 훼손하는 심각한 사건조차도 그저 정쟁으로만 포장되고 있지 않던가.
그로 인한 변화는 느리게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꽤 치명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선거개입이니 증거조작이니, 용공조작이니 하는 일들이 사태로도 여겨지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하여, 지방선거는 암담하다. 기초 무공천은 필연적으로 야당의 지방선거 대패를 부를 것이다. 우선 온갖 꼼수가 횡행할 것이다. ‘새정치는 ㅇㅇㅇ와 함께’ 따위의 문구를 걸고 안철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걸 것이고, 나름 군소후보끼리의 단일화가 여기저기서 벌어질 것이다. 꼼수가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꼼수가 통해봤자 대패고, 안 통하면 전멸일 것이다.
구청장이나 시장, 도의회나 시의회, 구의회가 전멸한 가운데 박원순이 서울시장이 되고 김상곤이 경기도지사가 된다 한들 그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정책을 지탱해 줄 기초가 전부 무너져버린 광역자치단체장들은 식물 시장, 식물 도지사나 다름없는 권한밖에 갖지 못할 것이다.
착한 박근혜인가, 위험한 박근혜인가
사실 이런 정치 혐오를 이용하는 정치인으로는 또 박근혜를 꼽고 싶다. 모든 잘못은 그의 ‘신하’들과 썩어빠진 ‘정치인’들에게 돌아간다. 박근혜는 독야청청한 왕이다. 왕은 무결점이다. 국정에 설령 오점이 생기더라도, 왕은 신이 내린 존재이며, 오직 그의 신하들이 불충한 탓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는 정치 혐오를 영리하게 이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라는 왕과 썩어빠진 신하들, 정치인들을 대비하는 형태로 말이다. 박근혜는 희망이다. 썩은 정치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실 왕이다. 신하들이 설령 불충하더라도 박근혜를 따라감으로써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가 있다.
하지만 안철수는 이런 정치 혐오를 파괴적으로 이용한다. 그는 정치혐오에 힘입어 높은 인기를 끌겠지만, 그의 전략은 결국 자신의 기반을 파괴할 것 같다. 야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을 때, 그 후폭풍이 어떻게 미칠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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