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라는 낱말에 대하여 고한다. 언론인분들, ‘방치’라는 낱말을 얼른 치우시라. 강릉 펜션 고등학생들의 사고와 관련해서 쓰이는 그 말. 학교의 역할에 대해 다루면서 쓰이는 그 방치라는 말.
학생은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교육 방향에 관하여 자의든 타의든 동의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유 일부를 스스로 통제하는 일에 합의하여 학교생활을 한다. 수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공교육 현실에서, 수능 이후의 시간은 자신이 통제에 합의하여 묵혀 두었던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다. 수능이라는 목표를 위해 스스로 죄어 놓았던 자기 통제를 내려놓고 ‘주체적 자유’의 해방감을 누린다.
12년 만에 찾아온 ‘이 기간’은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익숙지 않은 상황이다. 이 기간에 문제가 생겼으니 주무 부처의 입장에서 철저히 대비하려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문제는 언론인들이 그 기간을 ‘방치’라는 낱말로 메꾸어 기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기축 동력인 성인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매우 비겁한 변명이다.
사회는 ‘이 기간’에 대해 철학적 고민이나 사회적 합의를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교실에 뚜렷한 다음 단계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이 문제는 학생들이 아닌, 성인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통해 정치의 장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학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방치라는 낱말로 교육 당국의 책무를 끌어오고, 교사들의 노력을 훼손하는 기사를 쓰는 것에 앞서 사회가 수능 이후 준 성인인 그들을 어떻게 이끌지를 합의해 내지 못함을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 공교육의 구조적 문제와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가 맞물린 지점을 적시하는 게 맞다. 청소년이기에 미흡함은 있지만 18세 성인에 준하는 정도의 판단력과 태도를 대부분 갖추게끔 학교와 교사는 12년 동안 해당 기능을 수행해왔다. 졸업을 목전에 둔 상황이라 함은 제 역할을 거의 다 한 것에 진배없다.
실제로 이번 사건에서 학생들이 누린 자유는 사고의 발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사건을 일으킨 것은 사회의 미비함이었다. 뉴스에 나온 CCTV를 보자. 학생들은 택시를 타고 펜션에 도착한 뒤 따로 움직이지 않고 도착하는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입실했다. 그들은 펜션에서 불법 행위를 하지 않았다. 실내에서 위험한 놀이를 하지 않았다. 어떤 경미한 범죄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누군가 방치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도 됨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 학생들이 그렇게 자유를 얼마든지 누려도 위험하지 않도록 교사들이 12년 동안 가르쳤고, 학생들은 충분히 효과를 입증했다.
도리어 사건의 직접 원인을 만들어 낸 것은 성인이 운영하는 숙박업소였다. 그리고 그 숙박업소의 안전을 관리감독 할 주무부처 성인들이었다. 성인인 시공자였다. 학교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방치한 것은 학교나 교사 또는 학생이 아니었다. 가르침을 방기하여 위험 앞에 방치한 것은 성인들이다. 학생들이 자유를 누릴 기회와 권리를 성인들이 스스로를 방치하여 막았다.
방치라는 낱말은 자격 없는 성인들이 학생들의 자유를 여전히 사회체계가 통제하고 관리 감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그들을 인격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방치’라는 그 무책임하고 비겁한 주제어, 얼른 치우시라. 창피를 느낀다.
원문: 김종현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