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인의 자법인 설립 허용과 원격진료 등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투자활성화 대책은 큰 반발을 불렀다. 이것이 사실상의 의료민영화라는 논란이 거세졌으며, 의사협회는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집단 휴진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으며, 2차 집단 휴진까지 예고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나온 의협과 정부 사이의 합의, 소위 의정합의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진보언론은 결국 의사들에게 국민들이 놀아났다며 분노하기까지 한다. 그럴 만하다. 의협이 지지를 받았던 건 의료영리화와 원격진료 반대라는 기치 덕분이었다. 그러나 정작 의정합의는 의료영리화나 원격진료에 대한 내용은 구색이고, 대부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 개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빛 좋은 개살구 합의
합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원격진료 문제, 자법인 설립 문제, 건정심 개편 문제, 수련의 제도 개선 문제가 그것이다. 개중 국민들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앞의 두 가지 문제인데, 합의 내용이 빛 좋은 개살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원격진료는 6개월 시범사업 후 이를 입법에 반영한다는데, 6개월 내에 정책의 존폐를 달리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영리 자법인 설립에 대해서는 논의기구를 마련한다는 공허한 합의만이 남았을 뿐이다. 수련의 제도 개선 등은 물론 마땅히 필요한 일이지만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 남은 것은 건정심 개편 문제 뿐이다.
건정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는가
건정심은 요양급여 기준, 비용, 보험료 등을 정하는 보건복지부장관 소속 기구로,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총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구가 중요한 까닭은 ‘4대 보험’으로 불리며 소득이 있는 국민 대부분이 납입 의무를 가지는 건강보험료가, 그리고 의사들이 받는 의료수가가 바로 이 기구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기구의 구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위원장 1인
– 보건복지부 차관
(2) 공익대표 8인
– 중앙 공무원 2인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소속 각 1인)
– 국민건강보험공단 및 심평원 추천 2인 (공단, 심평원 소속 각 1인)
– 전문가 4인 (보건의료 및 보건경제 전문가)
(3) 건강보험 가입자 대표 8인
– 노동자 대표 2인 (한국노총, 민주노총 소속 각 1인)
– 사용자 대표 2인 (경총, 중소기업중앙회 각 1인)
– 시민단체 대표 1인 (바른사회시민회의)
– 소비자단체 대표 1인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 농어업 종사자 대표 1인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 자영업자 대표 1인 (한국외식업중앙회)
(4) 의약계 대표 8인
– 의협 2인, 병협 1인, 치협 1인, 한의협 1인, 간호협 1인, 약사회 1인, 제약협회 1인
이중 공익대표 8인은, 이름은 공익대표라고 붙어 있지만 구성을 살피면 사실 정부측 인사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4명은 아예 정부 사람이고, 전문가 4인도 정부가 추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위원장을 제외하면 정부가 8, 의약계가 8, 그리고 건강보험 가입자들, 즉 보험료를 내고 그 수혜를 받는 국민들이 8의 지분을 갖는 셈이다.
이 구조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가입자는 보험료를 덜 내면서 더 많은 서비스를 받기를 원할테고, 의약계는 보험료와 수가가 인상되길 바랄 것이다. 양자가 각자의 근거를 들어 수가 인상 폭을 제시하고, 여기에 정부가 양자의 주장과 근거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적절히 조율한다면, 이는 이상적인 구성이다.
문제는 과연 정부가 과연 그 조율 역할을 충실히 해 왔냐는 점이다.
건정심의 문제, 정부를 믿지 못하는 의협
건정심의 위원 구성은 8:8:8의 이상적인 구성으로 보이지만, 만일 정부의 입장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16:8로 급격히 추가 기울어진다.
그동안 의사협회는 정부가 이상적인 조율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정부가 인구의 급속한 노령화와 의료 원가의 상승 추세 등 여러 이유로 인해 보험 재정이 압박받자 포괄수가제 도입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재정을 아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가입자의 목표는 같다. 보험료와 수가를 최대한 아끼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협회는 공익대표 8인을 정부가 추천하는 대신 가입자와 의약계가 동수로 추천할 것을 이번 합의문에 포함시켰다.
공익대표를 가입자와 의약계가 동수로 추천한다면 12:12의 구조가 될 것이다. 다만 이 경우 가입자와 의약계가 추천한 공익대표는 오롯이 공익을 추구하는 중립적인 역할을 하는 대신 자신을 추천한 측의 입장을 대변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조율은 안 되고 수가 결정 과정에서의 공방만 더 심화될 우려가 있다.
건정심 개편, 의사 편만 든 것인가?
언론, 특히 주요 진보 언론은 이 합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건정심 위원 구성 중 정부 몫을 의사에게 줘버렸으며, 이로 인해 국민을 소외시킨 채 수가 인상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굉장히 편파적인 보도라고 생각한다. 정부 몫은 의사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다. 같은 몫이 가입자 대표, 그러니까 진보 언론의 논법을 따르자면, 국민 대표들에게도 주어졌다. 명목상으로 볼 때 이는 8:8:8의 구조를 12:12로 바꾼 것이며, 어느 한 쪽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 진보언론은 가입자 몫이 늘어난 건 은근슬쩍 묻어버리고 의사 몫이 늘어난 것만 강조하며 상황을 호도한다.
물론, 공익대표가 그간 사실상 가입자 편을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얘기는 다소 달라진다. 16:8 구조에서 12:12로 바뀐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오히려 의협의 주장에 힘이 더 실린다. 편파적이었던 구조를 공정하게 바꾼 셈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또 건정심에 참여하는 정부 측의 지분이 줄어들어 국민이 낸 소중한 보험료를 아끼려는 정부의 목소리가 약해지게 되었음을 우려한다. 그러나 건강보험을 일종의 복지 정책으로 생각할 때, 무작정 돈을 아끼는 것이 정답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복지에는 돈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돈이 얼마나 적절하게 투입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돈이 투입된다면 재정이 낭비될 것이고, 너무 적은 돈이 투입된다면 서비스가 떨어지거나 급기야는 제도가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보험제도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비단 의협만의 시각은 아니다. 강남 노른자땅에는 성형외과와 피부과만 빼곡히 들어서고, 산부인과나 흉부외과 등에 종사하는 의사는 바보 취급을 당하는 실정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그 정도에 대해 이견이 있을 뿐이다. 낮은 의료수가와 보험료가 그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논쟁은 계속된다
비정상적인 저수가 구조의 개선은 의협의 제 1 과제였고, 의협은 그 목적을 위한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도 멀다.
당장 정부와 의협은 합의문 내용의 해석을 가지고도 이견을 보이고 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공익위원을 가입자와 공급자가 동수로 추천하여 구성’한다는 문구에 대해 정부는 당연히 정부 소속 위원을 뺀 나머지 위원에 대해서만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의협은 정부 소속 위원도 공익위원에 포함되므로 공익위원 8명 전부에 대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폭풍 또한 거세다. 시민사회에서는 보험료 납부 거부 운동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실상 시민사회는 비정상적인 저수가 구조라는 의협의 주장 자체에 동조하지 않으며, 보험료를 더 내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인다. 의사 사회 내부에서조차 이 합의문이 의료영리화와 원격진료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효력도 없다는 점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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