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한 달에 5~6만원씩은 레고에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왜 레고에 돈을 쓰는지 생각해보았다. 조립할 때 재미있고, 보기에 예쁘고, 조립하는 손맛도 좋고, 조립이 쉽고, 설명서는 친절하고, 유사품에 비해 굉장히 튼튼하고 품질도 좋다.
하지만, 그런 건 한두 개 살 때나 통하는 설명이지, 왜 레고를 ‘계속’ 사느냐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게임 분석에 쓰는 ARM funnel, 즉 고객확보(Acquisition), 고객유지(Retention), 수익화(Monetization) 측면에서 레고를 살펴 보기로 했다.
고객확보
레고에는 여러 시리즈들이 있다. 화면 중앙에 있는 크리에이터 시리즈가 가장 기본이 되는 시리즈이다. 가장 기본이고 재미있지만, 유아기의 아이들이 조립하기에는 어렵고 삼킬 위험도 있다.
유아기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시리즈가 듀플로이고, 크리에이터 시리즈가 너무 쉬운 십대 후반이나 성인들을 위해서는 테크닉 시리즈를 마련해놓고 있다.
크리에이터 시리즈로 집이나 성을 만들다 보니, 좀 더 제대로 된 집이나 성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용자들이 생겼다. 이들을 위해선 각각 시티와 킹덤 시리즈를 준비해놨는데, 여기까지가 레고의 가장 기본 라인업이다.
반면, 초등학생쯤 되는 남자아이들은 한손에 잡히는 커다란 로봇들을 갖고 노는데, 이들을 위해서 마련한 게 바이오니클 시리즈이다.
레고가 남녀노소에게 인기있는 편이지만,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열살 부근의 여자아이에겐 덜 매력적이었는데, 이들에게 야심차게 내놓은 게 프렌즈 시리즈이다.
다양한 연령, 성별의 사용자가 좋아할 수 있는 제품군을 준비해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레고는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 어벤저스, 카, 해리 포터 등등 수많은 저작권물 시리즈가 있다. 단순히 레고 블럭만 내놓는 게 아니라, 이를 이용해 비디오 게임도 내놓고 있는데 이들도 모두 괜찮은 편이다.
레고가 뭔지는 알지만 굳이 살 생각까진 없던 사람이라도, 특정 영화의 팬이라면 해당 시리즈 레고 제품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팬이 탄탄한 영화, 만화, 게임 등에서 새로운 고객을 유입시키는 것이다.
레고는 그동안 여러 시리즈에 테마와 이야기를 담아 독자적인 저작권물 시리즈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최근에 성공한 것이 닌자고 시리즈이다.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인기를 끌자, TV 시리즈로 제작해서 방영하고 있다. 카드 배틀 요소도 있어서,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아이들이 아주 열광하고 있다. 올해 마트 등에서 유일하게 품절되곤 했던 시리즈가 바로 이 닌자고이다.
다양한 연령대, 성별에 맞춤형 시리즈를 제공하고, 외부 저작권 시리즈를 통해 기존 시리즈 팬의 유입을 노리는 한편, 특정 시리즈를 TV 애니메이션 등의 다른 매체로 내보내 독자 저작권 시리즈의 팬 또한 만들어가는 것이다.
고객유지
한 번 갖고 놀다가 지겨워지면 더 이상 갖고 놀 수 없는 다른 장난감과는 달리, 레고는 한 번 만들었다가 다시 분해했다가 다른 형태로 재조립하는 등 본질적으로 여러 번 갖고 놀 수 있게 되어 있다. 한 제품 자체의 고객유지(retention)력이 높은 것이다.
달마다 쏟아지는 신규 컨텐츠의 양도 엄청나다. 위에서 볼 수 있듯 시티 시리즈 하나만 해도 한 달에 4~7개의 신제품이 나온 셈이다. 전부 다 모으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의 불가능한 정도이다. 하지만, 시리즈의 팬이라면 맘에 드는 것이 한 달에 최소 1-2개 정도는 충분히 있을 확률이 높다.
2012년 월별로 신제품이 있었던 시리즈들을 뽑아 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 시리즈마다 월별 최소 3-5개의 신제품이 나오는 편이니, 레고 매대에는 늘 새로운 즐길 것들이 가득한 것이다.
4월의 신제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눈에 띈다. 연말에 이어 3월 정도까지 신제품들을 많이 내놓고, 이를 4월까지 매대에 유통시키면서 소비자들의 신제품 욕구를 어느 정도 끌어올린 다음, 어벤저스가 개봉하고 어린이날이 있는 5월에 어벤저스 시리즈와 공룡 시리즈를 내놓는 것이다.
수익화
왼쪽 위에 있는 게 내가 실제로 갖고 있는 레고 장난감이다. 그 자체로도 귀엽고 나쁘지 않은 편이다. 실제 판매용 박스를 보면, 배경을 공사장으로 그려서 좀 더 현장감있고 ‘이야기’를 느낄 수 있게 해놨다. 뒷면을 보면 이 모델의 어떤 부분이 움직이는지를 강조해서 ‘실제로 어떻게 갖고 놀 수 있는지’를 그려놨다. 박스 크기만으로는 제품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박스의 옆면에는 부품을 1:1 축척으로 표시해서 박스 아트를 보며 제품의 실제 크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놨다. 제품만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이걸 조립하면 어느 정도 크기의 물건이 나올 테고, 나는 이걸 갖고 이렇게 저렇게 갖고 놀 수 있겠구나.”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레고에는 가끔 보너스 프로모션이 있다. 왼쪽은 제가 구입한 작은 전기 자동차 모델이다. 실제로 상자를 뜯고 나니, 왼쪽 아래처럼 원래의 전기 자동차 모델 외에 다른 작은 차가 한 대 더 들어있었다. 뭔가 공짜로 선물받은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고, 덩달아 레고에 대한 인상도 더 좋아진다.
레고 회사에서는 이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도 쓴다. 예를 들어 오른쪽의 헐크 피겨는 해외에서 총구매액이 얼마를 넘는 사람들에게 지급한 비매품 프로모션이다. 따로 구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희소성이 늘어났고, 이때문에 이베이 등에는 이런 프로모션만 따로 판매하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이다.
레고의 다양한 가격대도 재미있다. 예를 들어 이건 시티 시리즈에서 경찰에 해당하는 제품 중 일부분이다. 각각 전부 개성이 있으면서도 어쨌거나 ‘경찰’이라는 공통 테마가 있다보니, ‘대체제’로서 구입하는 게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마트에서 아이가 “엄마, 나 경찰관-”하면서 14만원 짜리를 들고 오면, 부모는 “어, 그건 안 돼. 이것도 경찰관인데, 이거 사.”라며 7500원 짜리 경찰관을 제시할 것이다. 아이와 부모가 얘기를 하다 보면 “그럼, 이거라도”라는 식으로 2만원 또는 5만원 대 제품을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레고는 이야기의 힘이 굉장히 강하다. 기존에 갖고 있던 모델에 새로운 모델을 더했을 때 거기에서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보니, 그게 바로 구매 욕구로 이어진다. 시티 코너 모델을 샀는데, ‘작은 마을에 버스 타고 다니는 사람 말고, 자가용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으면 좋겠는데?’ 싶어 전기 자동차 모델이 끌리기도 하고, ‘이 시티 코너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이야기가 궁금해지면 소방차를 놓고 싶고, 시티 코너에 가로등이 있는데 ‘이게 고장 나면 누가 고치지?’라는 이야기를 넣고 싶어지면 가로등 수리 트럭을 사고 싶어진다.
앞에서 엄청난 물량의 신제품을 보면서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물리적으로 제한된 매대에 신제품을 진열하려면 자연히 단종되는 모델들이 생겨난다. 인기 있는 모델은 더 오래 팔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모델은 4-5개월 뒤면 사라지기도 한다. 이렇듯 ‘기간 한정’이라는 걸 알고 나면 좀 더 물건을 바라는 욕구가 커진다.
예를 들어 왼쪽 아래의 레미콘 모델은 색깔도 그렇고 정말 갖고 싶은 모델이지만, 2007년 제품이라서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오른쪽의 녹색 청소차 모델은 지난 3월에 나왔는데, 몇달 째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모델이다. 이제 두세달 뒤면 마트 매대에서 빠질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더 고민하게 된다.
레고에는 일종의 럭셔리 라인도 있다. 소위 10,000 번대 모델인데요. 대부분 20만원대로 아이를 위한 제품이라기보단 레고의 열성팬인 성인을 위한 제품이다. 10,000 번대 모델들은 나도 아직 구경만 해봤는데, 확실히 일반 모델에 비하면 그 크기나 정교함이 뛰어나서 만족감이 대단할 것 같았다.
레고는 건물이나 탈 것 표현도 좋지만, 여러 캐릭터를 레고 특유의 미니 피겨로 표현했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좋다. 특정 저작권물의 팬이라면 해당 저작권물의 레고 미니 피겨를 정말 갖고 싶어하게 된다. 그리고 레고는 이를 잘 활용해서 패키지를 구성했다. 최근에는 어벤저스 관련 제품들이 특히 그랬다. 저 거대 헐크는 참 잘 나왔는데, 왼쪽 아래의 모델에만 들어있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오른쪽 아래 제품에만, 호크아이는 오른쪽 위의 제품에만, 블랙 위도우는 왼쪽 위 제품에만 있었다. 결국 어벤저스를 전부 모으고 싶다면 전제품을 구입해야 한다.
마을을 구성하고 이런 저런 자동차를 갖추고 나면, 정말 진짜 도시처럼 도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물론 레고에서는 그런 도로와 보도가 갖춰진 멋진 바닥판을 팔고 있다. 값은 제법 비싸지만, 제대로 도시 디오라마를 갖추고 싶다면 꽤 매력적인 제품일 것이다. 오른쪽 위는 기차 모델 중 하나인데, 기본으로 제공되는 레일은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철도 모형에서는 철로를 길게 뽑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찬가지로 궤도와 구부러진 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훌륭한 철로를 팔고 있다.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레고에는 ‘미니 피겨’ 시리즈도 있다. 총 16종의 다양한 미니피겨들을 몇 달마다 내놓는데 ‘블라인드+랜덤’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다. 돈을 주고 어떤 걸 사게 되는 지 모르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또는 16종 전부를 수집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번 구매를 해야 한다. ‘돈을 주고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한다.’라는 상황이 오히려 좀 더 역설적인 재미를 주기도 한다. 밀봉된 봉지를 겉에서 만지작거리면서 어떤 제품인지 추측하고, 실제 뜯어봤을 때 일치/불일치할 때의 재미도 있다.
이렇게 레고의 판매 전략을 ARM funnel 틀로 살펴봤다. 유저의 유입, 유지, 수익화 부분 모두에서 교과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물건을 팔려면 레고의 사례에서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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