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받았다. CIO라는 세 개의 머릿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학부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했고, KAIST에서 전산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이력을 쌓은 곳은 삼성SDS와 삼성종합기술원, 현대정보기술. 환갑을 눈앞에 둔 그는 이론과 실무 모든 측면에서 평생을 소프트웨어와 씨름하면서 살아온 국내에서 손 꼽히는 소프트웨어 전문가다.
그와 함께 일하는 후배는 한양대 전자공학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SK텔레콤에 들어가 인터넷 사업을 담당했고 ‘넷츠고’라는 인터넷 서비스도 만들었다.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며 SK텔레콤을 나와서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CD롬에 담아 판매하던 벤처기업 에임텍도 창업했다.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새로 번역돼 나온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혁신가의 딜레마’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을 만난 곳은 울산의 현대중공업 조선소였다. 현대중공업 전체의 최고정보책임자(CIO)인 황시영 부사장과 황 부사장과 함께 배를 스마트하게 바꿔가는 ‘스마트십(Smart Ship)’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통합전산실 조성우 상무다. 본인들도 배를 만들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2000년대 중반에 두 사람 다 현대중공업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지금까지 왔다.
배란 덩치가 커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탈 것이고,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엔진을 돌리고 조향장치로 방향을 정한다. 그래서 조선소도 자동차 공장과 비슷하다. 다만 덩치가 크고 조립에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다. 자동차 공장에선 건물 한 채에서 차 한 대를 만들 것을, 조선소에서는 건물 한 채에서 한 공정을 하는 것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차와 비교하면 편하다.
스마트십은 기본적으로 스마트카와 비슷하다. 아직 개념만 있고 초기 단계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스마트해지지는 못했다는 점에서도 차와 다를 게 없다. 스마트카의 핵심은 ‘연결성’이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 모든 정보에 언제나 연결돼 있어야 스마트카다. 오늘날 자동차들은 무선통신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처리한다.
막히지 않는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기본이고, 차량에 큰 사고가 나면 사고 신고를 해준다거나, 조만간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부품이 발견되면 정기점검 기간 이전에라도 서비스 센터를 방문하도록 권하고, 이 정보를 서비스센터로도 전송한다.
스마트십도 마찬가지다. 최적의 항로를 계산하고 최적의 예방 정비를 가능하게 도와준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배에서는 차와 달리 불가능했다. 물리적인 한계 탓이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가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연결될 수 있는 건 통신사들이 육상 대부분의 지역에 기지국을 설치해 전파를 송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다에는 기지국을 세울 수가 없다. 대신 위성 통신이 있긴 하다. 하지만 위성통신은 값도 비싸고, 속도도 느렸다. 그런데 최근 이런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영국의 위성통신 회사인 인마샛은 2014년 말부터 약 50Mbps 속도를 내는(이 정도면 대략 지금 우리가 쓰는 LTE 속도와 맞먹는다. LTE는 이론상 75Mbps 속도까지 낸다) 위성통신을 서비스할 예정이다. 이는 지금 위성통신으로 주고받는 데이터 속도보다 100배 이상 빠른 속도다.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량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통신료도 싸지게 마련이다. 현대중공업은 이런 통신망에 대응하는 배를 만들고 있다.
차가 모을 수 있는 정보는 다양하다. GPS를 이용해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이를 차량 내비게이션용 지도와 연결지어 운전자에게 경로를 안내할 수 있다. 외부에서 수집된 실시간 교통정보를 기반으로 최적 경로 안내가 가능하고, 차량의 전후방 카메라를 이용해 도로 표지판 등을 인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초음파 센서를 사용해서 충돌 상황을 예상하고, 자동 주차도 돕는다. 또 와이퍼 동작용 센서는 비가 오는지, 얼마나 오는지에 대한 기후 조건을 수집하고, 엔진의 회전수와 제동장치 작동 상황 등을 이용해 순간 연비와 평균 연비도 파악해낸다. 차량 내 네트워크(CAN, Controller Area Network)을 통해 각 부품을 통제하는 차량의 ECU는 차 자체의 상태 정보도 실시간으로 파악해 저장하고 있다.
배도 마찬가지다. GPS와 전자해도 덕분에 오늘날의 항해사들은 별과 달과 태양에 의존하지 않고도 훨씬 쉽게 항로를 찾는다. 배에 설치된 레이더는 바다 위의 해도와 다른 장애물(다른 선박 또는 유빙 등)을 쉽게 찾아내도록 도와주고, 지상의 관제소는 선단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파악해 최적 경로를 계산한다.
선박 내 네트워크(SAN, Ship Area Network)를 통제하는 선박 제어장치는 배에서 수집된 모든 부품과 기계장치의 데이터를 통제하며 전송할 수도 있게 된다. 실제의 기상 상황과 기상 예보 등을 토대로 항로의 기상 상황 예측도 가능해진다.
차에선 이미 이 정도의 내용이 상용화돼 있다. 하지만 배에선 이제 시작이다. 현대중공업이 ETRI와 함께 SAN을 만든 게 겨우 2년 전이다. SAN과 연결되는 레이더를 현대중공업이 직접 만들어 완성한게 겨우 이달 초였고, 이런 정보를 육상과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위성통신망의 완성은 내년 말에나 가능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배를 똑똑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셈이다.
하지만 스마트십의 이점은 굉장히 크다. 차량이 연료를 아끼는 기술은 아직도 엔진에 달려 있다. 전기를 함께 쓰건(하이브리드) 엔진의 배기량을 낮추면서도 파워를 최대한 유지하건(다운사이징) 아예 전기만 쓰건(전기차) 간에 대부분 차량 설계가 연료 절감에 직결된다. 강철 대신 탄소섬유를 써서 차체 무게를 가볍게 하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덜 막히는 도로’를 안내해 주는 스마트한 길 안내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차는 기본적으로 운전자의 개인 이동수단이라 변화무쌍한 도로를 다니기 때문이다.
배는 다르다. 전기의 힘으로 연료를 절감하기엔 일단 너무 대형이라 동력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가 소형차 형태인 것도 이런 이유다. 선체와 프로펠러, 엔진의 설계를 아무리 바꾸고 개선해봐야 1%의 연료절감을 얻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항로를 바꾸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가 적고, 해류의 방향이 유리하며, 타 선박의 이동이 뜸해 충돌 회피를 위한 경로 이동 필요가 줄어드는 길을 찾으면 된다. 요트라면야 개인 항해사의 기분이 중요하겠지만 상선은 늘 정해진 항로로 이동한다.
한두 척의 배로는 이런 최적 항로를 찾기 힘들지만 수백 척이 수년 간 데이터를 쌓는다면 최적 항로 계산 공식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알고리즘 개발이 현대중공업 통합전산실의 일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판매하는 배들이 바다에서 수집하는 각종 정보를 한 곳에서 수집해 최적 항로를 계산해 주면 약 3%의 연료절감 효과가 기대된다고 했다.
최근 널리 쓰이는 1만3000TEU(컨테이너 1만3000개 적재가능 선박)급 컨테이너선으로 치면 한 척 당 연 8억 원의 연료비를 아끼는 효과다. 그러니까 ‘T맵’을 바다용으로 바꾸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200억 원 정도를 아낀다는 얘기다.(배들은 보통 25년 정도 항해한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데이터다. 그것도 많은 데이터. 이걸 모으려면 가장 많은 배를 만들어 바다 위에 가장 많이, 오래 띄워 놓는 회사가 가장 좋은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소유해야 돈벌이가 되는 서비스를 판매하게 된다. 현대중공업은 조선 업계에서 규모로 세계 최대다.
이른바 ‘빅데이터’를 수집할 기본은 갖춘 셈이다. 물론 이 데이터에 눈독을 들이는 곳은 많다. 당장 해운업체들이 직접 데이터를 모아 관련 서비스에 뛰어들고 싶어한다. 또 위성인터넷을 선원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그 데이터만 모아도 배의 이동경로와 속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인터넷 기업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B2B 사업모델이 나오는 셈이다. 위성인터넷 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셈인 인마샛 같은 회사도 통신망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데이터에 접근 가능하다. 그래서 이 분야는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다. 누가 주도권을 쥐게 될지는 모른다.
이외에도 스마트십의 장점은 많다. 예를 들어 운항 중단 기간도 최소화할 수 있다. 항구에 들어와 정비를 시작하는 대신 바다 위에서 컴퓨터가 자체 진단을 실시간으로 벌인다면 유지관리 업무는 정박과 함께 가장 효율적으로 이뤄져 운항 중지 기간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 선원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해사기구(IMO) 규정에 따라 배는 안전을 위해 선장과 1등 항해사 등 선박 규모에 따라 규정된 일정 수의 승무원을 반드시 탑승시켜야 항해가 가능하다.
수개월 이상 항해하는 배에서 이들의 인건비도 큰 비용인 셈이라서 대부분의 해운회사들은 자국 선원보다는 동남아시아 국가 등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싼 제3국 선원을 선호한다. 문제는 이들의 영어 실력 등이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할 만큼 높지 않다는 점이다. 관제소에서 선박의 상태와 주위 환경 변화를 거의 대부분 모니터할 수 있는 스마트십은 항해중인 승무원들과의 의사소통 수준을 쉽게 높여준다.
거대한 쇳덩어리 같지만 결국 이 무지막지한 구조물들이 각축을 벌이는 시장을 아래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건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