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學歷)이란 무엇일까요? 배움의 길이를 말합니다. 학력이 길면 배움이 많은 것이고 짧으면 배움이 적은 것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이런 학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두 환경에서 학력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는 학교, 또 하나는 사회라는 환경입니다. 학교와 사회는 수단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학력이 가지는 의미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가방끈이 짧은데 뭘 할 수 있겠어?
학교는 ‘교육’이라는 궁극적인 가치 아래 이 세상 모든 것을 탐구하고 알아가는 장소입니다. 학교와 학력은 같은 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학교가 있기 때문에 학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배웠음을 인정해 줄 때 한 줄의 학력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학력은 왜 필요할까요? 더 높은 학력을 추구하기 위해선 단계별로 학교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 가고 싶으면 고등학교 졸업 또는 검정고시를 패스해야 하고 박사가 되기 위해선 학사, 석사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배움의 인정을 받고 공식적인 학력으로 인정받습니다.
학교 특성상 ‘A는 B이다’라고 하면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A는 C이다’라고 하면 틀립니다. 즉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가 명확히 구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배우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석·박사 과정으로 들어가면 배움을 벗어나 도전합니다. 자신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는데 이 또한 담당 박사 교수님들에게 평가받고 제한됩니다. 학교 안에서는 크게 도전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가면 됩니다. 학교 안에서 학력은 얼마나 가르치는 대로 잘 암기하고 적용하며 따라왔는가의 척도일지도 모릅니다.
사회는 ‘이윤추구 극대화’라는 궁극적인 가치 아래 존재하는 환경입니다. 학교처럼 정해진 시간도 교육도 없습니다. 점점 똑똑해지는 대중(Smart mobs)을 상대로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거나 기존 시장에서 마케팅을 해야만 하는 시스템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적용되었던 마케팅 전략이 지금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는 현실입니다.
학문과 실전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 보급은 대중을 똑똑하게 만들었고 더 이상 정보의 유무로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현대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생산할 수 있습니다. 경제 대공황 이후 만들어진 경제 학문은 똑똑한 대중의 등장으로 다시 써지는 것이죠.
좋아하는 경제학자 중에 영국의 데이비드 리카르도(David Ricardo)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8C 인물로서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금융 교육을 받은 적도 없지만 증권 사회에서 수백만 파운드를 번 사람입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학자보다 독특한 경제이론들을 만들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죠. 리카르도의 모든 행적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배움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음으로서 경제를 자기화할 수 있었던 그를 좋아합니다.
사회에서 학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학교에서는 배움의 정도인 학력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사회에서는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시장화(化) 능력이 필요합니다. 시장화 능력이란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것,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 타인을 이끄는 능력, 배려심, 이해 등 많은 능력이 포함됩니다.
이런 능력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원래는 학교에서 배워야 하지만 창업(불안정)이 아닌 취업(안정)이 목표인 분위기가 팽배한 이상 당분간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시장화 능력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브랜딩, 포지셔닝, 트렌드 파악, 사회 구조, 언어 등 인문 사회학적인 학력이 뒷받침되었을 때 전략적이고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을 적용시키는 것. 그것이 시장화하는 능력입니다.
즉 사회라는 환경에선 학력과 시장화 능력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최대한의 능력 발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직원을 채용할 때 학력과 시장화 능력을 모두 확인하는 것입니다. 학력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죠. 하지만 시장화 능력은 경력이 적을수록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면접을 통해 검증하는 것입니다.
북극에서 냉장고를 많이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신의 시장화 능력을 검증하기 위함입니다. 학력이 없어도 시장화 능력이 뛰어나면 사회에서 크게 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최소한 둘 중에 하나를 가졌기 때문이죠. 학력이 높은 탑을 쌓기 위한 튼튼한 기초공사는 될 수 있지만 높이 쌓을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지는 않습니다. 높이 쌓는 것은 실패와 경험으로 얻어진 시장화 능력이 함께일 때 가능해 보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1999년은 여러모로 급변하는 시기의 중심이었던 때입니다. 인터넷이 PC방과 함께 대중적으로 보급화되기 시작한 때며, 개인 휴대폰을 통한 모바일 서비스를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죠. 즉 아날로그 중심이었던 시장이 디지털 시장으로 바뀌며 전국망적인 네트워크가 깔림과 동시에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개인들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동입니다. 이 급변의 시기 덕분에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인재는 기존의 정형화된 아날로그 수업이 제시해줄 수 없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기에 그 누구도 쉽게 답을 제시할 수 없었던 때입니다. 즉, 미대생 출신이 아니더라도 감각만 있다면 급변하는 파도 위에서 서핑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죠.
캐릭터 디자인 시장을 예로 들어볼까요. 1999년 이전의 캐릭터란 크게 팬시와 만화책 산업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머루와 다래, 헬로 디노, 떠버기, 둘리, 까치, 영심이, 슈퍼보드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이들 캐릭터를 접하는 데 인터넷은 필요치 않았죠. 문방구와 만화책만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당시 유명한 캐릭터는 모두 접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이후 분명 캐릭터 시장의 흐름은 바뀌었니다. 마시마로, 졸라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캐릭터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제 인기 캐릭터를 보기 위해 문방구나 서점에서 만화책을 살 필요 없이, 집에서 인터넷만 되면 무료로 캐릭터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손가락의 몇 번 움직임으로 현재 유행하는 만화(웹툰)를 모두 즐길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동은 캐릭터 시장뿐 아니라 전 시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고, 다양한 형태의 디자인을 작업할 디자이너들이 필요하게 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는 인터넷과 모바일의 보급으로 엄청난 양의 디지털 작업이 필요로 하던 시기였기에 고졸이라는 사실은 이 흐름에 편승하는 데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았죠. 흔히 디자인 분야는 실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력은 크게 중요치 않다고 하곤 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고 한 편으론 맞지 않기도 합니다. 프리랜서를 제외한 직장인을 예로 들어보죠. 크게 두 분류의 직장 군으로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
- 디자인 전문 회사: 중소 형태의 작은 기업으로 실제 디자인의 트렌드와 퀄리티가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학력보다 실력이 존중받고 이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급이 올라가면 문서 처리, 프로젝트 진행 능력, 보고서, 인사관리 등의 능력이 없어도 디자인 실력만으로도 직급 상승이 가능합니다.
- 대기업 형태의 포탈 회사: 디자인 실무와 관련해서 연차가 더해지면 대리를 거쳐 과장까지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팀장, 부장 등의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학력이 뒷받침된 실력이 필요합니다. 직급이 상승할수록 다양한 능력을 요구받고 팀 간에도 경쟁이 이루어지는 조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의 대학교/대학원을 마쳐야 자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디자인 잘하는 고졸? 이 회사 안에선 그냥 디자인만 할 것입니다.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죠. 디자인만 잘한 고졸이 대기업에서 팀장, 부장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단지 디자인 능력 하나 가지고만 그 결과를 이루진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학교에서 강의 하는 데 고졸이란 학력은 큰 걸림돌이 됩니다. 디지털의 흐름을 떠나 학력이 낮다는 사실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교육 시장에서 기본적인 자격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물론 한두 번의 특강은 디자이너의 능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시간강사를 거쳐 대학교 교수에 뜻이 있다면 학력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학력이 낮은 사람(고졸)이 학력이 높은 사람(대학생)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학교라는 교육 시스템 안에서 절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다녀와도 교수가 되는 길이 어려운 이 시점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교수가 될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들을 깨닫는 순간 고졸이라는 상대적인 열등감은 또 다른 목표로 바뀌었습니다. ‘학력으로 이룰 수 없는 더 큰 경력을 만들자’로요.
원문: Sakiroo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