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의 말들은 모두가 아는 사람의 자기 고백이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94년도에 낸 첫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아내를 때리는 가부장이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낸다. 노 전 대통령의 아내 폭력은 일시적이거나 고시합격 이전만의 일도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연수원에서 동료들이 “형수님을 어떻게 꽉 잡고 사냐”고 묻자 “조져야 해”라고 대답한 일도 털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책에서 아내를 때리고, 여성을 소유물이나 장식품처럼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를 크게 부끄러워한다. 그는 사회운동을 시작하며 젊은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했다며, 여성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그가 집에서부터 가부장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내려놓았기에, 자연스레 시민들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권위 없고 소탈한’ 모습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의 아내 폭력 가해자 중 노 전 대통령처럼 반성하면서 스스로 아내 폭력을 멈춘 사례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사례를 볼 때 아내 폭력은 ‘문제 있는’ 남자들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성 개인의 폭력성이나 열등감, 혹은 정신병력 등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 없어 보이는 남성이 아내를 때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고정해놓는 가부장제가 가정폭력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가장 큰 공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부터 언제든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 폭력을 포함해 디지털 성폭력부터 살인까지, 여성 대상 범죄의 주요 가해자는 애인이나 남편이었던 남성들이다.
정희진은 ‘아내 폭력’을 다룬 책 『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폭력 남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며 “‘아내 폭력’은 극단적이거나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체제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는 불평등하다. 또한, 여성들에게는 아내/어머니라는 고정된 성 역할이 부여되는데, 남성은 여성이 이와 같은 성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며 ‘맞을 짓’을 규정하는 것은 물론 ‘훈육’까지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공/사 영역이 분리되었다는 인식 역시 ‘아내 폭력’이 지속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정희진은 지적한다. 가족을 법과 민주주의 등의 공적 질서에서 벗어난 분리된 사적 영역으로 두면서, 사회적 감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는 근대 가족 형태가 남성 중심의 핵가족인 것을 고려하면, 가족 안에서의 가부장의 무한한 권력과 폭력 행사를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사 회에선 아이들을 ‘사랑의 매’라는 명목으로 때리는데, 가부장으로서는 아내 역시 그 ‘사랑의 매’에서 예외일 리 없다. 가부장에게 폭력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금기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폭력 남편들의 기저에는 ‘어디 감히’가 깔려있다. 남성들이 보고 배우고 익힌, 또 신화화된 아내/어머니상이란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하며, 가부장과 시가의 지시에 순응하는 여성이다. 이것에서 벗어난 여성은 가족을 무너트리는, 가부장의 권위를 침범하고 ‘나를 무시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성들은 누구도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벽을 주먹으로 치며 ‘어디 여자가 감히’라는 말을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엄마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을 때였을 텐데, 난 그 말을 대체 어디서 배웠던 걸까.
남성들은 뉴스에 나오는 ‘폭력 남편’에 대해 분노하고 비난하지만, 실상 폭력 남편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제는 지켜내기에 급급하다. ‘맘충’, ‘김여사’ , ‘된장녀’, ‘화냥년’. 이런 말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전부 ‘어디 감히’의 정서에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가부장제가 원하는 ‘조신한’ 여성상에 부합하지 못했다며 여성들을 비하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성에 대해서는 유독 ‘어디 감히’가 통용되고 확산하는 사회에서, 아내 폭력이 용인 안 될 리가 없다.
가부장제 질서를 자연스럽게 익힌 나에게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20대 초반, 몸이 좀 아픈 날이었는데 당시 만나던 친구가 무엇인가를 먹자고 졸라서 식당으로 가다가 싸운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갑자기 내 가방을 내동댕이쳐버리고 집으로 가버렸다. 굉장히 폭력적인 행동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내가 데이트 중 가방을 바닥에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남성들이 드라마 남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사회적으로 용인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던지는 이 행동, 데이트폭력이나 아내 폭력 가해자들의 초기 행동이다. 여성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던지거나 엎다가, 결국 직접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남성이고, 아내 폭력범들에 진정으로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아내 폭력범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화시키는 가부장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여성에게 특정한 성 역할을 강요하지 않았는지, 남성집단의 여성을 향한 억압과 편견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아내를 때리는 남편은 평범한 사람들과 동떨어진 ‘괴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가부장제 정상 가족의 틀이 공고하고, 성 역할이 강요되며, 가족이 완벽하게 사적 영역화되어 있으면 어떤 남성이든 ‘폭력 남편’이 될 수 있다.
수많은 남성이 ‘여성 통제’와 ‘역차별’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폭력 구조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성 스스로가 성차별적 규범을 깨트리는 데 힘을 보태지 않으면 ‘일상의 홀로코스트'(정희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