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번에 쓴 ‘인간을 알아야 소통을 한다’는 글의 연장선상에서 쓰는 글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내가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 중에 꼭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성적 여러 가지 기준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학교, 회사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나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해 결혼한 배우자도 살아보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다 피하고 살면 가장 편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선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들과 어떻게 소통하며 살 수 있을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소통을 하려다 보면 화가 나는가?
먼저, 나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왜 소통이 안 되는 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소통이 안 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그 사람과 말을 섞다보면 점점 더 화가 나는 데 있다.
나는 분명히 나름의 논리와 팩트를 가지고 얘기를 했는데, 상대방은 알아듣지를 못하고, 많은 경우 억지를 피운다. 일이 그렇게 틀어지면, 이 사람이 바보거나 아니면 비양심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이 세상엔 왜 이렇게 합리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양심에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당신이 화가 나게 만든 원인제공자도 똑같이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더 잘 한다.
도덕심리학을 연구하는 뉴욕대 스턴 경영대 교수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 교수의 2012년 저서 ‘The Righteous Mind’에 따르면, 문제의 원인은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그들의 a. 이성도 b. 양심도 아니다.
먼저 왜 이성이 문제가 아닌지 따져보자.
근대 프랑스의 이성주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현대의 심리학 연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적 사고’(moral thinking)의 과정은 그렇게 이성 중심적이지 않다. 데카르트에 반대했던 영국의 경험주의적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강조했던 것처럼 ‘이성은 열정(혹은 감정)의 노예고,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에 대해서 일단 도덕적 본능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그 후에 자신의 판단을 자신의 이성을 사용해 정당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이든, 한국이든 선거 때마다 나오는 퍼즐 중 하나인 왜 일부 서민들이 보수 정당을, 그리고 왜 일부 부자가 진보 정당을(소위 ‘강남 좌파’) 지지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경제적 자기 이익(economic self-interest)만 생각하면, 이 퍼즐은 설명이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경제적 자기 이익 외에 도덕적 이익(moral interest)을 좇고, 도덕적 이익에 따라 본능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린 후, 그 후 그 판단을 이성적으로 합리화시킨다고 가정하면, 이 선택이 설명이 된다. 그 서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처지가 아닌 질서에 대한 존중을 택한 것이고, 그 부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가 아닌 변화에 대한 지지를 택한 것이다. 이성이란 코끼리는, 감정이란 조련사를 따른다.
쉽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더 잘한다. 팩트와 논리는 중요하지만(substance), 그것이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 소통에서 성공하려면, 충실한 팩트와 논리를 보여주는 것에 앞서,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도덕의 프레임(style)을 통해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도덕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어야, 이성적 설득이 가능하다. 디자인이 스펙보다 더 중요하다.
진보와 보수의 뇌는 다르다.
감정이 이성에 우선한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도덕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 사회의 도덕의 기준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서, 서구식 자유주의적 교육을 대학까지 받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내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무슨 짓을 하든 자유다’라는 원칙을 수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대학가 자취방에서 심야에 고성방가를 하는 건 민폐겠지만, 그 좁은 방 안에 숨어서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이 범죄가 아닌 이상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내 선택권을 제한하는 사람은 권위주의적이고, 무례하고, 비양심적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고, 그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철저히 내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70억 인구가, 그리고 같은 국가 내에서도 다 그와 같은 자율성(autonomy)의 기준만으로 도덕적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 외에 기준인 공동체(community), 그리고 신성(divinity)에 따라 도덕적 문제를 판단한다. 단적인 예로, 유럽 국가에서는 이제 종교가 큰 이슈가 아닐 수 있으나,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심지어 같은 미국에서도 사정은 다르다.
자기들끼리만 소통하고, 자신들만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서 소통을 하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자 한다면, 따라서 우리가 도덕이란 문제를 바라보는 스펙트럼도 더 넓어져야 한다. 이건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위해서는 전략적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례로 위의 설문 조사에 근거한 그래프를 통해 진보와 보수의 뇌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자. 먼저, 진보와 보수 모두 돌봄(care)과 공평성(fairness)에 대해서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보적이면 진보적일수록, 돌봄과 공평성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보수가 약자를 돌보지 않고, 공평성을 무시한다는 것은 맞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 두 가치가 진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가치인 것은 맞다.
반대로 사람이 보수적이면 보수적일수록 충성도(loyalty), 권위(authority), 그리고 고상함(sanctity)과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해진다. 진보가 돌봄과 공평성을 무시하는 보수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보수에게는 충성도, 권위, 고상함 같은 가치는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진보에게 분노를 품는 것을 정당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즉, 같은 팩트와 논리라도 이런 도덕적 감수성의 차이에 따라 어느 쪽으로 치우친 사람을 대상으로 소통을 하느냐에 따라 소통법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진보를 상대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나(보수의 진보 공략법), 반대로 보수를 상대로 권위에 대한 타파를 호소하는 것이나(진보의 보수 공략법) 무력하고 유해하긴 매한가지다. 거듭 강조하지만, 먼저 도덕적 공감을 얻어야 이성적 설득이 가능하다.
인간은 90% 침팬지, 10% 꿀벌
침팬지는 이 지구상에서 인간 다음으로 똑똑한 동물이다. 수화도 할 줄 알고, 속임수도 쓸 줄 안다. 그러나 세계적인 침팬지 연구자인 Michael Tomasello에 따르면 두 마리의 침팬지가 같이 통나무를 옮기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다. 간단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해봐도 인간의 어린 아이는 74%를 해내는 데 비해, 침팬지는 35%밖에 되지 않는다.
즉, 인간을 다른 동물과 가장 구별짓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그렇게 집단을 이루고, 언어를 비롯한 공유된 협력의 방식을 만들고, 그래서 갈등을 줄이는 진화된 본능이며, 인간의 도덕적 본능(moral institution)도 이런 진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다.
일찍이 찰스 다윈이 말했던 것처럼 협력하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생존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면, 인간의 역사가 사회 조직체를 발달시켜온 과정인 건 우연은 아닌 것이다. 왜 고대 사회부터 배신은 다른 그 어떤 죄악에 비해서 더 악독한 죄악으로 처벌을 받았는가? 그 이유는 간명하다. 배신자들이 늘어난다면, 신뢰가 붕괴된다면, 한 집단은 유지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나단 하이트 교수가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은 부족 간의 갈등을 통해 발전한다는 측면에서 90% 침팬지이고, 자신의 벌꿀집을 중심으로 협력한다는 측면에서 10% 꿀벌이다.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도덕적 본능의 스펙트럼 중에서 어떤 부분이 더 강하게 태어나는 지는, 그리고 그런 본능이 어떻게 사회적 학습을 통해 발현되고, 변화하는 지는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뇌의 위협과 분노에 대한 반응 물질인 글루타민과 세로토닌이 더 잘 분비되도록 태어난 사람은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낄 가능성이 더 많다. 반대로, 감각 추구와 다양한 경험에 대한 반응 물질인 도파민이 더 잘 분비되도록 태어난 사람은 오히려 답답한 현실에 갇혀사는 것을 더 싫어한다.
이런 사람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자신과 맞지 않는 가정 환경, 교육 환경에서 자라면 기존의 성향은 더 약화되기보다는 더 강화된다. 질서가 흔들리면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개방적 가정 환경, 비판적 교육 환경이 주어지면 이들의 태생적 공포감은 사회적으로 강화된다.
역으로, 그 반대측에 서 있는 사람에게 아주 엄격하고, 고지식한 가정 환경과 교육 환경을 제공하면, 그들은 저항아적 기질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진다. (흔히들, 목사 아들은 잘 되거나 삐뚤어진다고 말을 하는 데, 그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되서, 이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렇게 자리잡힌 자신의 입장을 더 그럴듯하게 합리화시키니, 한 번 고정된 것이 뿌리뽑히긴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이가 먹으면 쉽게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마크 트웨인은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다 못으로 보인다’고 했다.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견해가 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일 수도 없다는 걸 인정해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모든 사람이 다 나 같지도 않고, 나 같을 수도 없고, 나 같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팩트와 논리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먼저 대화가 통하려면, 소통이 되려면,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감정을 얻지 않으면, 이성을 얻을 수도 없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이해하려면,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지를,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지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수 년동안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왔고, 그렇게 가르치는 게 즐거웠다. 그러나 난 한 번도 신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빠져본 적이 없다. 나는 이 세상에는 3,500 종의 파리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만약 신학자들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 중에 어느 쪽이 지배하든], 이 세상엔 오직 한 종류의 파리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창조주는 다양성을 영화롭게 하셨다. 그리고 이 두 다리로 걷는 피조물보다 이 지구상에서 다양성을 더 잘 드러내는 존재는 없다.
-자신의 자서전 ‘방관자의 일생’ 서문에서, 피터 드러커.
덧1. ‘The Righteous Mind’ 한 번 번역해보고 싶은데, 판권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는 출판 업계 종사자분들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 정말 괜찮으니,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세요.
덧2. 사실, 위의 내용은 비즈니스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에 기초해서 컨설팅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는 나중에 또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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